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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전임자를 잘 모시겠다"더니…

[기자의 눈] '잃어버린 10년'의 비극적 청산

60년 헌정사에 전직 대통령은 모두 9명.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한국 정치사는 이들이 피해가지 못한 비운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4.19 혁명의 여파로 하와이로 망명해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이승만 전 대통령, 심복에 의한 시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영구집권의 꿈과 물리적 생애를 마친 박정희 전 대통령,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과 재임시 부정축재로 나란히 옥살이를 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중에 자식들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두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마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여전히 되풀이되는 '비극의 대통령사'에 한 장을 보탰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비참한 마지막을 앞선 전직 대통령들의 역사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평면적이다. 노 전 대통령은 비극의 20세기를 뒤로 하고 21세기에 집권한 최초의 대통령이거니와 헌팅턴이 '민주주의가 되돌이키기 불가능할 정도로 공고해진 지표'로 꼽은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교였기 때문이다. 그의 급서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해 18년 5개월을 장기 집권한 끝에 부하의 총탄에 숨진 어느 군부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와 비교된다면, 87년 이후 공고화 된 줄 알았던 민주주의와 정치문화의 퇴행을 먼저 의심해야 할 일이다.

진통 속의 진전

정권이양은 갈등과 마찰을 필연적으로 빚는다. 부정적 유산의 청산은 필요악이지만, 그것이 적실했는지, 지나침이 없었는지는 결국 민심 본위로 기록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2.12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부정 축재로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사법심판대에 세울 때 민심은 크게 호응했다. '문민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기획이 저변에 있었다 해도 군사정부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당대의 시대의식에서 과거사 청산은 너무나 당연한 역사적 과제였기에 그러했다.

97년 첫 번째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을 때도 신·구정권의 마찰은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97년 말 발생한 외환위기 사태의 책임을 집중적으로 추궁해 강경식 전 부총리 등 YS 측근들을 줄줄이 법정에 불러세웠다. YS 역시 청문회 답변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 결과 YS는 '국가경영에 실패한 통치자'라는 멍에를 안았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 자금' 문제에 대해선 강삼재 씨에게 국한시켰을 뿐, YS를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였건, 돈 문제에 대한 이심전심이었건, 전·현 정권 사이의 관계와 국론 분열을 고려한 통치 차원의 판단이 엄연히 존재했다.

정권재창출을 달성한 노무현 정부도 DJ 정부와 대북송금 특검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박지원, 한광옥 등 DJ정부 핵심인사들이 구속됐다. 이 문제는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까지 번져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북송금 특검은 결국 DJ와 노 전 대통령 사이 불화의 시작으로 기록됐으며, 노무현 정부가 행한 처음이자 최악의 실수로 남아 참여정부의 정치적 몰락을 불렀다. 그러나 대북송금 특검은 노무현 정부의 기획과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강한 압박에 따른 것으로, 이를 거부하기 어려웠던 노무현 정부의 불가피성도 일정하게 인정받는다.

'ABR'의 비극적 귀결

이처럼 군사정부 이후 등장한 세 번의 전 정권은 모두 정권 교체와 이양에 따른 갈등을 빚었지만, 나름의 명분이나 불가피성을 확보해 상궤를 크게 벗어난 무차별 보복과는 거리를 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전 정부 과오에 대한 청산, 나아가 사법적 심판은 권력자의 필요가 아닌, '통치의 룰'과 '민심의 흐름'에 의해 결정되는 정상적인 정치문화를 향해 진전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충격적인 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극단적 형식뿐만 아니라 더디게나마 축적해 온 룰의 붕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민심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전부터 64억 원의 인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검찰이 그토록 모질고 치졸하게 전직 대통령을 괴롭혀야 했느냐고 묻고 있었다. '1억원짜리 명품시계 뇌물' 등 시시콜콜한 뒷얘기를 언론에 흘리며 전직 대통령에게 모멸감을 안긴 데에는 정권과 검찰 사이의 모종의 공모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게다가 살아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에 대한 차별도 두드러졌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뿐만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집권 1년여 동안 촛불 시위, 용산 철거민 사태, YTN과 MBC 등 언론 탄압, 신영철 대법관 파동, 화물 노동자 대량 구속 등 권력기관을 앞세운 정부의 정책방향은 모두 민심의 흐름과 반대편에 서 있었다. '다른 건 다 돼도 노무현 정부 것은 안 된다'는 소위 'Anything but Roh(ABR)'가 '잃어버린 10년'의 다른 이름으로 무조건적 청산주의의 슬로건이 되어왔음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 지난 2007년 12월 28일 청와대에서 회동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인 ⓒ뉴시스

이렇게 필연성을 결여한 과거 정부 뒤엎기,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한풀이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급서가 발생한 혐의가 짙은 이상, 이는 정치 퇴행을 드러낸 일대의 사건이다. '역사와의 대화'를 즐겼던 그이기에 벼랑 끝으로 몸을 던진 그의 마지막 메시지 역시 14줄의 짧은 유서에 남긴 인간적 비애로만 국한될 일도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노무현 시대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됐지만, 이 비극은 두 번째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현 정권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임을 각성하지 못한 업보로 남게 됐다.

왜 이렇게까지 되고 말았을까. 2007년 12월28일 이명박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첫 회동 자리에서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반드시 만들겠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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