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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노무현은 무엇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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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당신에게 노무현은 무엇이었습니까?"

[현장] 23일 오후 서울 도심 풍경

"그래도 옛날 대통령들보다는 낫잖아요."

23일 오후, 서울역 근처에서 만난 시민이 한 대답이다. 질문은 뻔했다. 이날 아침 봉화산 절벽에서 뛰어내려 숨진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생각이다.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라는 제목이 큼직하게 박힌 신문 호외를 들고 걸어가는 그를 붙잡고 계속 질문을 이어가기가 무안했다. 그래서 근처에 앉아있는 노숙인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호외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 23일 서울역 근처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실을 알리는 호외를 들여다보는 시민. ⓒ프레시안

'몇 천억'과 '겨우 그거'

"몇 천억 받아먹은 놈들도 떵떵거리며 사는데, 겨우 그거 받았다고 죽나."

"'겨우 그거'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제 한 몸 누일 곳이 없어서 노숙을 하는 그가 노 전 대통령이 받은 수십억 원을 "겨우 그거"라고 말하는 게 영 어색해서다.

"선진국에서는 정치인이 백만 원만 받아도 난리가 난다. 노 전 대통령이 받은 돈은 결코 적지 않다. 다른 전직 대통령보다 비리 규모가 적다는 점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내뱉을 기회는 찾을 수 없었다.

▲ 호외를 들여다보는 시민들. ⓒ프레시안
오래된 먼지 냄새가 풀풀 풍기는 노숙인은 "몇 천억 받아먹은 놈들도"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오후 3시경, 서울역 근처에서 만난 사람 모두에게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는 '뉴스'가 아니었다. 다들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 관련 소식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유무선 통신으로 촘촘하게 엮여있는 한국에서 중요 뉴스가 길거리 시민들에게 전달되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믿겨지지가 않아서 뉴스를 본다"

'서울역 대합실 텔레비전 앞'은 중요사건이 터진 날이면, 방송기자들이 '시민 반응'을 담기 위해 늘 들르는 곳이다. 이날도 이 자리에 방송 장비가 설치돼 있었다.

역시나 텔레비전 앞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는 이미 오전에 발표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요. 그래도 뉴스를 열심히 보시네요."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년 남성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을 건넸다. "그렇긴 한데 믿기지가 않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서울역 대합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시민들. ⓒ프레시안
그들에게 뉴스를 보는 행위는 새로운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었다. 믿기지 않은 소식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일 따름이었다. 지하철 역 입구에 쌓인 호외를 펼쳐놓고 읽는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외에 담긴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며, 믿기지 않은 소식이 준 충격을 달래는 듯했다.

곳곳에 배치된 경찰

서울역 근처에는 경찰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었다. 이날은 민주노총의 집회가 서울 도심에서 열리기로 돼 있었다. 정부 당국은 민주노총의 집회를 불허했고, 민주노총은 집회를 강행할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경찰과 민주노총의 충돌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불안해진 민심을 타오르게 하는 불씨가 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예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집회를 허용해버리면 될 게 아닌가.

경찰이 곳곳에 배치된 서울 도심 풍경은 이런 질문을 단칼에 자르는 대답이었다. 잠시 후,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으로 이동했는데 서울광장 방향으로 향하는 출구가 전투경찰에 의해 막혀 있었다. 지난해 촛불집회가 열렸던 서울광장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경차로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시청역 출입구마다 배치된 경찰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아저씨 누구세요. 왜 찍는 거예요"라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들 전경들도 계단에 앉아 호외를 읽고 있었다.
▲ 서울광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역 출구를 막고 있는 전경들. ⓒ프레시안

"사람 냄새 났던 그, 세상이 너무 힘들게 했다"

그들은 흑백으로 인쇄된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비슷한 질문을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던졌다. "당신에게 노무현은 무엇이었습니까."

롯데백화점 근처에서 만난 대학생 이민정 씨의 대답은 명쾌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통령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물론 허물이 있지만, 정치하는 사람치고 그 정도 허물조차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 이어졌다. 수사를 진행한 검찰, 그리고 현 정부에 대한 성토가 뒤따랐다. "이명박 대통령은 과연 깨끗하냐, 퇴임 이후가 두렵지 않느냐"라고 되묻는 것으로 대답은 끝났다. 30대 자영업자 한 명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사람 냄새나는 정치인이었는데, 세상이 그를 너무 힘들게 한 것 같다."

'3김', 'SKY', '조중동'…기득권과 맞선 삶
▲ 서울광장 근처를 막고 있던 전경들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호외를 읽고 있는 전경들. ⓒ프레시안
30대 회사원 김유철 씨의 대답은 '기득권'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끝났다. 노 전 대통령의 삶은 기득권 세력과의 투쟁으로 채워진 것이었다는 대답이다.

이른바 '3김'으로 대표되는 지역 정치 기득권 세력, 'SKY 대학'으로 상징할 수 있는 학벌 기득권 세력,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기득권 세력과 끝없이 부딪히면서 기득권에서 소외된 이들의 입지를 넓혀왔다는 설명이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노 전 대통령이 비록 '고졸'이지만, 서울법대 출신도 되기 힘든 판사를 지내지 않았느냐. 변호사 시절에는 돈도 제법 벌었다더라." '비주류'임에는 분명하지만, 넓게 보면 그 역시 기득권 세력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모든 '비주류 엘리트'가 노 전 대통령처럼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여전한 편견

역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노인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대답은 한마디. "못 배워서"였다. 물론 실제 대답은 이보다 길었지만, 결국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었다. "못 배워서", "무식해서", "아는 게 없어서"…등.

앞서 회사원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비록 고졸이지만, 당시 명문이었던 부산상고 출신이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노 전 대통령은 여느 정치인보다는 책도 많이 읽는 편이었다"라고. 그래도 대답은 같았다. 그저 무식하다고 했다. 자꾸 따져 묻는 게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고졸 대통령 시대가 10년이나 이어졌지만, 한국에서 고졸에 대한 편견은 여전했다.
▲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는 시민들. ⓒ프레시안

그가 남긴 숙제

▲ 호외를 집어든 시민을 찍는 사진기자들. ⓒ프레시안
노트북 컴퓨터가 담긴 가방 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졌을 무렵, 한때 시민운동을 했던 대학원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화제는 역시 노무현이었다.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그는 노 전 대통령에게 몹시 비판적이었다. 한번 터진 말문은 닫히지 않았다. '노무현'이 화제가 될 때면, 으레 그랬다. 살아서도 논쟁을 몰고 다녔던 그는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 전 대통령이 언젠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여기서 '시장'이라는 게 결국 재벌을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권력이 어쩔 수 없이 재벌에게 넘어간 걸까. 아니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재벌에게 넘긴 면도 분명히 있다. '서민 대통령' 되겠다더니, 너무 노골적인 배신 아닌가.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이들조차 돌아서게 만들었던 한미FTA는 또 어떤가.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자칫 그의 과오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재벌에게 넘어간 권력을 시민이 되찾아오는 것은 산 자들의 숙제로 남았다.
▲ 경찰은 이날 전경차를 동원해 서울광장 진입을 봉쇄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은 지난해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프레시안

여전히 뜨거운 이름, 노무현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사진기자들이 있었다. 사진기자들은 호외를 들여다보는 시민을 찍느라 분주했다. 인터넷 속보의 시대에 호외를 든 시민들의 풍경은, 사진기자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서울광장 맞은 편 덕수궁 대한문 근처에는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이 경찰에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늘 뜨거웠던 이름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던 날, 서울 거리는 이렇게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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