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절의 말미에 적은 내용은 부분적으로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에서도 감지되고 있는 흔적이 있다. 예컨대 미국 소고기 수입이나 경부대운하 등의 시책에 대해, "정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추진하는 과정이 더 문제"라는 입장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시각은 우리 사회에 상당히 두텁게 분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반드시 내용보다 소통이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의 반영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내용에 대한 반대의사를 두루뭉수리로 표현하는 편의주의거나 아니면 단지 여론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적인 수사일 때도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적으로 박근혜 같은 사람이 즐겨 쓰는 화법이 전형적으로 그런 식인데, 만약 내용보다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라면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일에 대해서도 일관된 반응을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 용산참사의 원인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다; 용산참사 재판에서 검찰이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한다는 것은 스스로 공소의 명분을 파괴하는 짓이다; 신영철 대법관은 한나라당이 앞장서서 위증을 고발하고 아울러 탄핵소추를 서둘러야 한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경찰의 원천봉쇄는 사회를 갈수록 분열시킬 뿐이다; 이종걸 의원과 이정희 의원에게 10억 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는 공론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이다; 미디어법과 집시법 개악은 현시점에서 강행해야 할 까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가 정치사회의 소통을 방해하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런 문제들에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못한다면, 내용보다 소통을 중시하는 신념의 표현일 수는 없고 단지 일시적인 편의나 기회를 위한 수사일 뿐이다.
그렇지만 편의나 기회를 위한 수사라고 할지라도, 일단 "과정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과정의 중요성을 인지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단지 "과정의 중요성"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면서도 그 문구로부터 파생할 수 있는 수많은 쟁점들에 관해 충분히 숙고해보지 않은 탓에, 이 주변에서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정리되어 있지 못한 상태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내용보다 소통"이라는 내 입장을 좀더 뚜렷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도덕의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선험주의가 왜 소통을 가로막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도덕을 또한 훼방하게 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칸트 이래 선험적이라는 단어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다수결이라는 양적 절차에 부족함을 느끼고 "마음의 결혼"(marriage of the minds)과 같은 영적 교감의 여지를 추구해 온 사람들이다. 칸트 나아가 헤겔의 강력한 영향 아래 성장한 독일의 하버마스나 아펠은 물론이고, 영미의 계약론과 공리주의의 전통을 물려받은 롤스조차도 단순한 다수결만으로는 뭔가 핵심이 빠진다고 느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험성이야말로 소통되는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험주의가 소통을 가로 막는다"고 말한다면 일견 부당하기 짝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도덕에 관해 선험적인 소통을 강조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은 곧 도덕의 원칙이 어떻게든 수렴되어야 한다고 느낀다는 말과 같다. 예컨대 칸트가 "인간을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목적으로 다루어라"는 등의 격률들을 소위 정언명령의 예로 제시한 바탕에는, 선험적인 소통을 통해 모든 사람이 그것을 절대적인 도덕기준으로 받아들이리라는 기대 또는 예상 또는 주장이 깔려있다. 그러나 징기스칸, 연산군, 나폴레옹, 히틀러, 닉슨, 전두환 등까지는 거론할 필요도 없이, 유영철이나 강호순과 같은 연쇄살인범들이 "인간을 목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격률에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말로만 동의하고 행동은 딴판이라면, 단순히 "정언명령"이라는 문구의 뜻을 모른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저런 사람들은 워낙 예외적이므로 논외로 치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이 신출귀몰해서 잡지 못한다면 할 수 없겠지만, 잡은 다음에 처벌하지 않을 수는 없다. 대개 사형 또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중형에 처하게 될 텐데, 이런 경우 우리는 그 범죄자를 수단으로 다루는 것인가 아니면 목적으로 다루는 것인가? 교사에게 영어를 배우는 학생에게 교사는 수단일까 목적일까?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수술해야 한다고 해서 밤중에 병원으로 달려가는 의사가 중간에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치게 되어 또 다른 응급환자를 만나서, 이 사람을 돌보면 저 사람이 죽고 저 사람에게 가면 이 사람이 죽는다고 할 때, "사람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격률은 어떤 지침을 주는가?
선험적 정답의 가능성이란 이런 경우 이와 같은 경험세계의 갈등과 변수들을 추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향하는 모종의 갈망을 대변한다. 그런데 도덕의 경우에는 각 개인이 저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가 곧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있지만 거기에 정답이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허만 멜빌의 소설 『빌리 버드』를 소재로 이를 살펴보자.
빌리 버드는 영국 해군의 흑인 수병으로 명랑하고 유능하고 씩씩한 청년이다. 도무지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라 동료와 상관들이 모두 좋아하고 사랑한다. 반면에 군기담당 하사 클래거트는 심술과 시기로 가득 찬 인물로 빌리의 선의를 시기해서 어떻게든 빌리를 악에 빠뜨리고자 한다. 그리하여 엉뚱한 얘기들을 모아 빌리가 반란을 모의하고 다닌다고 함장 비어에게 모함한다. 함장이 두 사람을 불러 대질하는데, 하도 어이없는 헛소리에 기가 막힌 빌리는 말로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한 채, 격분하여 상대를 밀친 것이 그만 클래거트를 바닥에 쓰러뜨려 뇌진탕으로 죽게 만든다. 비어 함장은 클래거트가 모함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다. 클래거트가 죽어버렸으니 이제부터 빌리의 말만 듣고 모함이었다고 판정한다면 공정한 재판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빌리가 상관인 클래거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자기가 목격한 사실이다.
당시는 전쟁중이었고, 얼마 전 다른 함정에서 선상반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비어는 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과, 하급자가 상관을 살해하고도 무죄로 방면된다면 군대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직업상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장교들로 구성된 약식 재판에서 빌리를 상관살해죄로 처형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비어는 그 집행을 허락한다. 그는 그후 어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숨을 거두는데, 임종 직전 병상에서 희미하게 "빌리 버드"를 부르는 소리를 간호병은 들을 수 있었다. 멜빌은 그 소리에 "회한의 색조가 묻어있지 않았다"고 묘사한다.
비어가 봉착한 선택 상황에서 선험적 변증법을 따른다면 어떤 정답이 나올까? 여기서도 여전히 "선험적 정답은 오직 하나뿐이고, 그 하나의 정답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선험적 변증법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길동이와 꺽정이가 각각 무죄방면과 처형을 "선험적 변증법에 따른 정답"으로 찾았다고 주장한다면, 선험적 변증법이라는 방법은 정답에 관한 견해 차이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답에 관한 논쟁을 방법론에 관한 견해 차이로 전이시켜서 오히려 쟁점을 흩뜨릴 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도덕의 문제란 단순히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만 결부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고민을 거쳐서 어떤 길을 선택했느냐에 더해, 그러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느냐는 차원도 지극히 도덕적인 문제가 된다. 멜빌은 비어 함장이 그 선택을 자신의 몸뚱이 일부로 담고 살다가, 죽을 때에야 빌리에 대한 미안함과 화해하는 것으로 그렸다. 비어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비어가 고뇌를 거쳤다는 사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일을 부담으로 간직했다는 사실에서 도덕성의 한 요소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도덕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천박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산수문제에서 정답만 찾으면 되듯, 도덕의 문제에서도 정답만 찾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오히려 도덕의 핵심요소에 관한 철저한 몰이해가 되고 만다.
멜빌은 소설에서 딱 한 군데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메시지를 표명한다. "전투가 끝난 지 40년이 지나 거기서 싸우지도 않았던 사람으로서 그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어야 했는지를 따지기는 쉬운 일이다. 눈 앞을 가리는 포연 속에서 날아오는 총알 아래에서 몸소 전투를 행하는 일은 그것과 완전히 별개이다." 도덕의 문제에서는 일인칭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이는 그림과 제삼자 논평자의 입장에서 보이는 그림이 반드시 같지 않음을 명심하라는 경고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도덕의 문제에서도 당사자보다는 제삼자의 눈이 더 밝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주어진 선택을 위해 당사자가 부담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무게를 제삼자가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라면, "도덕"이라는 단어를 아무리 자주 사용하더라도 전형적으로 구경꾼의 심심풀이 잡담 신세로 전락하기가 십상이다.
누구나 인생을 사는 동안 수없는 기로를 만나는데, 그 중에서 도덕적으로 의미심장한 기로는 거기서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구성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비어가 만난 것과 같은 기로에서 선택이 단순히 "빌리 버드를 처형하느냐"와 "방면하느냐"와의 사이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실존적인 무게가 있다. 처형한 다음에 져야 할 양심의 상처가 있고, 방면한 다음에는 그로 말미암아 병사들의 마음에 군기에 관해 어떤 인상이 새겨질지 모른다는 부담이 있다. 만약 빌리를 방면하게 된다면, 클래거트의 심성을 가진 병사가 빌리의 심성을 가진 상관을 "사고로 가장해서"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런 오판을 조장했다는 도덕적 책임을 또한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것이 도덕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서, 징벌이나 예방 또는 선도나 교화 등등, 사회규범의 의미는 도덕으로서는 부차적인 영역이며, 도덕의 문제로 다루기보다는 사회정책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논의를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물론 사회적 규범이라는 항목은 현실적으로 도덕과 쉽게 뒤섞인다. 살인, 방화, 강도, 거짓말, 뇌물, 모함, 전횡, 표절 등등,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때로 실정법으로 처벌대상이 되는 행위들은 부도덕하기 때문에 비난이나 처벌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그렇지만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따위로 마치 사법과 도덕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도덕이나 사법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덕은 본질적으로 문화와 관습의 소산으로서 다양한 반면에, 사법이란 사회를 문명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질서로서 정합성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덕에서 요구될 수 있는 정합성은 기껏 키르케고르가 강조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 차원의 통일된 영혼 정도인데, 그러한 가치는 어떻게 바라보더라도 경험적인 개인들에게 보편적으로 강제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키르케고르와 같은 사람의 도덕적 정체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꺼삐딴리와 같은 인물도 그 가변적인 처세로 말미암아 사람이 아닌 광물질이나 하등동물이 되는 것은 아니며, 우호적으로 바라보자면 처참한 시대를 절묘하게 살아남은 생존곡예의 귀재라고 서술해줄 수 있다. 선험적 변증법을 통해서 도덕의 최종표준을 찾을 수 있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도덕적 정체를 하나의 잣대로 서열화하기를 바라는 셈인데, 뒤집어 검토해보면 그런 서열화 자체에서 애당초 뭔가 비도덕적인 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 "세상의 모든 독선이나 교조주의, 또는 전횡은 바로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곧 "모두에게 옳은 것"이라고 우기면서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아끌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뉴시스 |
전근대 사회는 대체로 도덕과 사법이 서로 엉켜있었다. 종교와 정치가 서로 엉켜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마을 공동체 단위로 획일적인 권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나 미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던 시대까지도, 러시아나 아시아의 경우에는 19세기 말까지도, 중앙정부란 전국의 인민을 포괄하는 공동체를 대변하기보다는 궁정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작은 마을에 해당했다. 이처럼 좁은 면대면 사회에서는 관습과 가치가 획일화되기가 쉽다.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를 아랑곳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곧, 과거에 행했던 행동의 궤적들 사이에 일관성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 사회들과 접촉 면적이 넓어질수록, 그리하여 나와는 다른 형태와 종류의 생활방식들을 이해하는 정도가 높아질수록, 내가 추구하던 도덕이나 가치가 일단은 나에게 국한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점점 더 많이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처럼 5000만에 가까운 인구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천 명이나 이천 명 또는 만 명이나 이만 명으로 구성되는 마을공동체에 비해 도덕적인 다양성을 더 많이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서양 등, 다른 나라들의 관습에 노출되는 빈도가 증가하는 만큼, 허용되어야 할 다양성의 정도도 크게 넓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성 사이에 세워져야 할 질서는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이룩될 수밖에 없다. 앞 제3부에서 제일층위의 합리성들이 서로 경합하면 제이층위의 합리성이 필요하게 된다고 했던 것처럼, 제일층위의 매개되지 않은 도덕규범들이 서로 경합할 때 질서는 오직 제이층위의 사법규범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 사법규범의 필요성이란 오직 사회적 평화의 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한 쪽 도덕의 이름으로 다른 쪽 도덕을 침해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교 사이의 갈등이나, 다양한 정치이념 사이의 갈등을 내용을 파고들어 정오를 판정하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폭력의 행사를 방지하는 데에 사법의 목표가 맞춰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평화의 유지란 폭력의 행사뿐만 아니라, 어떤 침해를 통해 누가 폭력을 도발했느냐는 고려도 당연히 핵심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즉, 침해의 경계를 일관되게 설정해서 위반한 쪽을 처벌하는 데에 사법의 모든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경계는 선험적으로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즉 사회적 결과를 저울질해서 그어져야 할 문제이다.
자연계에 관한 지식이나 도덕의 영역에서 선험적 변증법에 의해 정답으로 의견이 수렴될 수 있다는 기대에 관해 내가 비판한 내용을 철학자나 도덕이론가들이 단번에 받아들일 리는 물론 전혀 없다. 하지만 그들 중 누가 내 입장을 비판해 오더라도 나로서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즉, 이 지점에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논쟁이 언제나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가치나 도덕에 관해 현실 정치사회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 최종적인 정답을 알려줄 이치란 경험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선험적인 정답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자기가 "선험적인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표명하지 못하는 한, 단지 경험세계의 논쟁을 견디지 못하는 내적 불안감의 징표에 불과한 것이고, 설사 나름대로 "선험적이라고 생각하는 정답"을 내놓더라도 그것은 바로 경험세계에서 논쟁을 구성하는 여러 주장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자기가 "선험적"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무력으로 관철하고자 하게 된다면 바로 문명에서 야만으로 전락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독선이나 교조주의, 또는 전횡은 바로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곧 "모두에게 옳은 것"이라고 우기면서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아끌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각자가 자기의 의견을 가지고 공표하며, 그 의견에 따라 일관되게 (또는 모순되게) 행동하는 것은 자유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득하거나 권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폭력이나 겁박으로써 의견을 관철하려고 하면, 그 자체로 그 의견이 이미 "선험적"이지는 못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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