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정승혜 대표 |
정승혜가 지난 20년간 국내 영화계에 남긴 족적은 다양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1989년 영화사 신씨네에서 일을 시작한 정승혜는 1991년 씨네월드에 몸담은 후 거의 20년간 같은 회사의 이준익 감독, 그리고 조철현 프로듀서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2005년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 신화를 낳은 후 세 사람은 발전적 해체를 했다. 정승혜가 영화사 '아침'을 설립한 것이다. 조철현 프로듀서는 이미 '타이거 픽쳐스'라는 영화사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승혜는 죽을 때까지 이준익, 조철현과의 인연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이준익 감독과 조철현 대표는 정승혜에 관한 한 가장 특혜를 받은 인물이다. 정승혜는 '아침'을 통해 4편의 영화를 내놨다. <도마뱀>과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그리고 <궁녀> 등이었다. 최근 제작중인 <비명>은 결국 그의 유작이 됐다.
프로듀서로서 많은 작품을 만들어 냈지만 정승혜는 입담과 필담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많은 영화에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다. 정승혜는 한마디로 최고의 영화 카피라이터였다. 그는 영화를 보면 척,하고 카피가 떠오른다고 했다.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을 보자마자 '지독한 범인 악독한 형사'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굳세어라 금순아>같은 영화를 보면 '아줌마가 일어섰다. 다 죽었다'같은 말을 그 자리에서 만드는 인물이었다.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두고는 '내공걸고 밀어내기, 목숨걸고 버티기'라고 했던가. <슈팅 라이크 베컴>을 가지고 후배들이 쩔쩔매고 있을 때는 슬쩍 '그거 그냥, 언니들이 찬다라고 쓰면 어때?'라고 했다고 한다. <몽정기>를 가리키면서 '꿈에서는 해도 되나요?'라고 했을 때 약간 겸연쩍어 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K-19>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곧바로 '거대한 운명이 수면위로 떠오른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잠수함 소재의 영화로 그만한 카피가 또 있을까 싶다.
▲ 왕의 남자 |
정승혜의 총기와 재기는 주변에 늘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그가 오래 몸담았던 영화사 씨네월드는 충무로의 방앗간이었다. 충무로를 오가던 '참새'들은 그를 보기 위해, 영화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혹은 영화판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된다고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그래서 그렇게 한번 수다를 떨기 위해 씨네월드를 들렀다. 구석에 놓여 있던 그의 자리에 같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얘기하고, 인생을 논하고, 세상을 한탄했다. 20년간 정승혜는 국내 영화판의 중추 네트워크였다.
정승혜가 죽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던, 그 누구라도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마담이 죽었다. 그리하여 그 마담이 운영했던 살롱도 이제 문을 닫은 셈이 됐다. '정승혜 살롱'의 시절이 지나갔다는 것이며 한국 영화계의 한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죽음이 슬픔을 넘어 침통함을 느끼게 하는 건 그때문이다. 45살에 죽은 정승혜는, 이제 다 소용없는 얘기지만, 20년은 더 살았어야 옳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한국 영화의 영광을 봤어야 맞았다.
언젠가 만났을 때, 요즘 당신 행복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끼던 시계를 잃어버려서 불행하다고 했다. 그 정도 가지고 불행하다고 하는 건 오바라고 했다. 그러자 정승혜는 특유의 똘망거리는 표정으로 소중한 걸 잃었을 때는 한동안만이라도 불행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니냐고 했다. 정승혜의 말대로 우리는 한동안, 아니 영원히 불행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정승혜의 영전에 다시 한번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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