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강철군화'의 시대…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강철군화'의 시대…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철학자의 서재] 잭 런던의 <강철군화>

<강철군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은 바야흐로 '강철군화'의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나라이다. 철거민을 비롯한 도시 빈민들이 '강철군화'에 의하여 짓밟혀 목숨을 잃고, 불에 타 죽는다. 수만의 평화적인 촛불 또한 '강철군화'에 의하여 '불법'(한국의 실정법이 보장하지 못하는 인권에 대한 모든 요구는 불법으로 매도 당한다. 실정법은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낼 수 있는 한에서만 시민권을 보장할 뿐이며, 이익을 내지 못하는 모든 인간 활동은 무가치한 것이며, 그런 활동을 요구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으로 취급 당한다)으로 낙인 찍히면서 무참하게 꺼져 간다.

0교시 수업을 없애서 졸지 않고 수업하게 해 달라는 고등학생들, 취업해서 열심히 일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학생들, 생존의 위협을 그나마 덜 받는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고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는 이주 노동자들, 최소한의 이동권 보장과 차별을 철폐해 달라는 장애인들, 성 소수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염원과 희망의 촛불이 '강철군화' 앞에 서서히 꺼져 갔다. 이러한 모든 부당한 일들은 이미 <강철군화>(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궁리 펴냄)에게는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신자유주의라는 미명 하에 더욱 광포하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우리 시대를 배회하고 있는 '자본'이라는 저 유령이 날뛰고 있는 이곳, 이 시점에서 과연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혹자들은 <강철군화>가 소설 정치경제학이니, 소설 자본론이니, 100여 년 전에 이미 오늘날 자본의 첨예한 모순을 예견했느니 하면서 이 책을 칭송(?)하거나 아니면 일종의 예언서처럼 평을 하기도 한다(마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자본주의를 딱 들어맞게 설명을 하고 있느니 또는 아니니 하는 부르주아들의 호들갑과 어딘지 모르게 무척 닮아 있다).

그런데 <강철군화>에 대한 이런 평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평들에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와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평들에는 '봐! 결국 해봐야 강철군화에게 무참하게 짓밟히잖아!'라는 교묘한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잭 런던은 이러한 평들에 깔린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는 <강철군화>에서 먼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이미 사회주의 국가를 꼭 올 수밖에 없는 사회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은 미완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꼭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잭 런던은 20세기 초와 이로부터 700년이 지난 가상 시점 사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잭 런던이 우리에게 남겨 준 과제인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강철군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사회주의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니스트'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한 마리로 말한다.

"권력! 우리 노동계급이 그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강철군화>에서 나타난 노동계급의 권력 쟁취를 위한 실마리

▲ <강철군화>(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궁리 펴냄). ⓒ프레시안
그렇다면 이 권력을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처음에 잭 런던은 부르주아 의회를 장악하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소설 전체에 걸쳐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환상인가를 너무나 절절하게 보여 주고 있다(이런 점에서 의회주의자들은 의회 진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의회 장악이 아니라면 고전적인 방법대로 폭력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우리도 힘으로 봉기하는 거지요."
"그때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혈 속에 잠겨 있을 거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필자 수정) 힘이란 게 어디에 있지요?"


도대체 폭력혁명을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즉 힘은 정말로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대체로 그 힘이란 '강철군화' 앞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혁명은 도처에서 실패했고, 사회주의권은 무너져 버렸다. 이제 그 힘을 어디서 찾아서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다시 의회주의로 돌아가서 자본주의 체제만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중의 표를 통해서? 이미 잭 런던은 그것이 환상임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밝혀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그 힘을 현실화시켜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여자들이야말로 파업의 가장 강력한 추진 세력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해서 한사코 반대의지를 굳혔다. 그들의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또 그 총파업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사람들의 기분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대중의 유머 감각에 적중했다. 그 아이디어는 전염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학교에 걸쳐서 어린이들까지도 수업을 거부했으며, 학교에 오는 교사가 있더라도 텅빈 교실로부터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총파업은 거대한 국가적 야유회의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총단결이라는 생각도 그처럼 확고한 증거로서 나타나고 나니까 모든 사람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바가 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대대적인 놀이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위험도 없어졌다는 점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유죄인 판에, 어떻게 어떤 사람들만 처벌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 하나-여성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 확보

여기서는 크게 2가지가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처럼 보인다. 첫째,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 스스로를 반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으로 형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이다. 둘째, 노동계급의 총파업을 어떻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민중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놀이판으로 만들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선차적인 것은 첫째이다. 여성, 그리고 여성의 노동이 모든 사회적 생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을 만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노동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인데, 이 노동은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의 할 일에 대해서 말해 보자. 첫째 할 일은 출발점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여성이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사회화, 즉 상품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화를 시켜봤자 결국 여성의 몫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으로 그 부담을 여성에게 덧씌우는 것이다. 즉 여성이 자본과 임금 노동자인 남성 노동자에게 이중적인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노동계급→자본이라는 먹이사슬 체제처럼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최소한의 신체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자본은 이 노동자가 기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노동자 역시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데, 이렇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간 '생산' 노동에 대해서는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내부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부불노동(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착취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을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계급 자신 내부에서의 착취의 계기를 근절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계급의 경제주의적 경향은 여성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을 더욱 더 억압과 착취의 사슬로 옭아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제주의적 경향은 개별 노동자의 임금 상승에만 초점을 두는 것인데, 개별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의미하는 바는 임금 상승에 따라서 노동자 자기 생산을 위한 더 많은 요구를 여성에게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대 자본 투쟁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모든 임단투 투쟁은 일단 아이들의 공동 양육과 공동 교육을 위한 물적 조건 확보에 맞춰져야 한다. 공동 양육과 공동 교육에 필요한 비용을 자본으로부터 쟁취해야 한다. 이렇게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될 때, 노동계급의 진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노동운동이 고민하고 있는 지역운동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둘-노동계급의 총파업을 대대적인 놀이판으로 만들기

둘째 할 일에 대해서 말하려면, 첫째 할 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더 할 필요가 있다. 공동 양육, 공동 교육은 철저하게 자본 교육, 제도권 교육으로서 공교육에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반 자본 교육, 비 제도권 교육, 노동계급 교육으로서의 사교육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 사교육 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상상력 풍부한 열린 인간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 생산의 방법으로는 각 연령 별로, 각자 하고 싶은 영역 별로 코뮌을 형성해서 자신들이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코뮌들이 상호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들로 자신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생산된 사회적 개인은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각 활동 단체들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부모나 누나, 형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일상생활을 잠시 접고 여행 가듯이 파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각 코뮌 단위로 각각의 깃발 아래서 먹고 놀고 자유로이 담소를 나누면서 휴식을 가지는 파업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파업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파업, 나아가서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파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모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사표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사표 던지고 논다는데, 그것을 불법이라고 잡아 갈 것인가? 설령 잡아가더라도 감옥에는 온통 나의 동지들일 테니 그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감옥에서 놀면 될 테니까 말이다.

자본에 대항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본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움직이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본이 무엇을 하던 간에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만드는 일이다. 몇 푼의 임금 인상이 새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노동계급 자신 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악한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강철군화>를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또한 자매,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우리 노동계급의 손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