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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영화읽기] <터미네이터 4 : 미래 전쟁의 시작> 리뷰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은 이 곤혹스러운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이미 관객들은 존 코너가 누구인지, 스카이넷이 무엇인지, 터미네이터가 어떻게 시간여행을 하는지를 다 알고 있다. 또한 그 종결이 어떠한지도 대충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게다가 <터미네이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터미네이터>라는 영화를 계속 만들려면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근육질 몸이 필요한 것이다.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서사에서 새로운 인물을 하나 추가하고,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을 이리 저리 엮어서 에피소드들을 꾸몄다. 허구가 허구를 참조해서 자기 증식하는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증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또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내적 논리가 <터미네이터>의 형식성 자체에 장착되어 있다. 거의 장르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는 <터미네이터>의 형식성은 '모든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몽땅 한 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터미네이터>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 <터미네이터 4 : 미래 전쟁의 시작>으로 새로운 시리즈의 재시작을 담당한 맥지 감독은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들이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내용을 재조합하고 액션 및 전쟁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는 데에 더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미녀삼총사>의 감독이기도 했던 맥지는 별반 '새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택한 길은 이야기의 반대편, 바로 전쟁과 액션 장면을 재현하기 위한 최고의 할리우드 기술들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야기 따위는 보는 사람이 만들어라, 있는 대로 터미네이터란 터미네이터는 다 보여줄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결승점에 당도해서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영화는 쉬지 않고 내달린다. 터미네이터는 거의 변신합체로봇 수준이고, 정교한 그래픽이 제공하는 '실감 효과'도 영화 <트랜스포머>에 비견할 만하다. 최근 할리우드 컴퓨터 그래픽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있다. 여기에 곁들여서 맥지 감독이 보여주는 현란하고 숨 막히는 액션 시퀀스의 조밀성까지! 다음 장면이 등장할 것을 기대하는 관객의 예측보다 항상 한 발 앞서서 개입하는 장면전환의 묘미는 영화의 전편을 압도한다고 할 수 있다.

미래주의 회화에서 표현한 연속동작의 속도감과 컴퓨터 게임의 입체감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장면구성은 <터미네이터>를 물경 저예산 SF에서 실사 애니메이션의 수준으로 도약시킨다. 완전한 사이버 세계의 구성을 위해 인간 배우들은 소품으로 등장할 뿐이다. 존 코너는 이 전환에 저항하는 마지막 '인간성'의 보루처럼 보인다. 영화를 지배하는 '목소리'는 존 코너의 것이지만, 실제로 이미지를 독차지하는 주인공은 터미네이터들이다. 새삼스럽지만,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존 코너였다기보다, 터미네이터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터미네이터 구원자"(Terminator Salvation)인 까닭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영화는 아놀드 슈워제네거 없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첫 작품인 것처럼 보인다. 숀 코너리 없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가능한 것처럼, 이런 시도가 불가능할 이유는 없다. 드디어 터미네이터가 완전한 자본의 논리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올 시리즈는 대충 '마징가' 시리즈처럼 가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겠다. 살아남은 스카이넷이 알 수 없는 곳에 비밀기지를 만들고, 거기에서 인간을 말살한 신형 터미네이터를 보낸다는 설정으로 가는 게 아마 가장 안전하고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자본은 어차피 안전하고 쉽게 이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르'를 원하는 것이니 이렇게 예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건 개인적 생각이고, 어떻게 차기작들이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터미네이터영화의 주인공은 터미네이터이니까, 관객들은 훨씬 강력해지고 무시무시한 터미네이터를 욕망할 것이고, 이런 욕망의 증식이 바로 터미네이터를 장르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영화가 끝날 때가지 시종일관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자극이 숨 막히게 밀려오고, 전쟁영화와 SF영화를 통해 세련화한 기술력들이 총집결했다. 그리고 이렇게 현란한 기술의 제전은 '터미네이터'라는 필연성(Necessity)의 은유를 실감나게 상징화한다. 인간은 나약하고 기계는 거대하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과 기계를 조화시킨 '미지의 존재'가 출현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주제는 철학적인 것처럼 꾸몄지만, 그렇게 심오하진 않다. 오락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그래도 나는 즐기기만 하는 나쁜 관객은 아니야"라는 자기 위안을 간직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해볼 주제를 던지는 게 이 영화의 '미덕'이다. 적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군이라서 혼란스럽다는 설정은 이미 90년대 포스트모던 영화에서 실컷 써먹었던 낯익은 문제의식일 따름이다. 시간물리학적으로 파고들면 얼마든지 복잡할 수 있는 시간관의 문제도 골치 아프게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터미네이터에게 잡힌 카일 리스(존 코너의 아버지)가 포로들에게 내뱉는 "살아남으세요"라는 대사이다. 영화의 논리 상 이 말은 아무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기계에 잡혀 있는 인간의 모습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생산의 네트워크에 갇혀 있는 인류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숙명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터미네이터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미국식 자유의지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살아남는 생존의 문제로 중심이 이동했을 때는 정확하게 지금 현재의 경제위기라는 상황과 겹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라는 터미네이터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칠 것이 아니라, 그와 맞서 싸워야지만 그 필연성의 숙명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모든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초시간적 상황을 터미네이터가 전제하는 한, 이 영화가 그려내는 '현실'은 단순하게 영화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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