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설문 조사에 한국과 일본의 간호사가 똑같은 답을 했다. 답은 이랬다.
"자고 싶어요."
12일 국제간호사의 날을 맞아 보건의료노조가 주최한 '간호사 인력 노동 조건 한일 비교 토론회'에서 발표된 양국의 조사 결과였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일본 공공병원 노동자 14만 명을 조직하고 있는 자치노(JICHIRO)와 1만2000명 정도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는 헬스케어 노협이 공동으로 지난해 말 실시한 조사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와 보건의료노조가 한국 간호사를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가 한 자리에서 발표됐다.
그 결과 일본은 조사에 응답한 간호사 9700명 가운데 6500명, 무려 70% 가까이가 지금 가장 필요한 시간으로 '수면 시간'을 꼽았다. 취미 시간(58%), 가족과의 시간(53%), 친구 및 애인과의 교제 시간(33%) 등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실시한 '대학병원 노동자의 교대제 개선을 위한 노동 조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잠이 부족하다"는 호소는 무려 66.7%였다. 특히 3교대 간호사의 경우 86.2%가 이 같이 답했다.
자치노 건강복지국 마쯔지 류노스케 국장은 "'자고 싶다'는 것이 가장 많은 대답이었다는 것 자체가 일본 간호사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드러내는 슬픈 조사 결과"라고 말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도 "우리 조합원들도 임금 인상보다 인력 충원을 통해 좀 쉬고 싶다는 요구가 가장 높다"고 말했다.
때문에 이주호 단장은 "올해 38회를 맞는 국제 간호사의 날에 한일 간호사들이 공동의 슬로건을 붙여 본다면 '잠자고 쉬어라(Sleeping & Relexing)'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간호연맹(ICN)이 정한 올해의 주제는 '창의적으로 간호를 혁신하라'다.
국제 간호사의 날, 한일 양국 간호사의 절규 "잠자고 쉬고 싶다"
이런 결과는 양국의 간호사들이 공통으로 놓여 있는 장시간 노동 구조에서 비롯됐다.
한국 간호사의 하루 근무시간은 3교대가 아닌 간호사가 9.6±1.0시간, 3교대는 9.5±0.8시간이었다. 심지어 점심을 못 먹고 일하는 날도 많았다. 3교대 근무자의 경우 지난 3개월 간 근무 시간 중 식사를 거른 횟수가 15회 이상이라는 사람이 36%에 달했다.
일본의 간호사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균 6~8시간의 시간 외 노동을 하고 있었다. 류노스케 국장은 "심지어 한 사람이 '낮근무(데이)'와 '밤근무(나이트)'를 다 하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렇게 되면 귀가와 출근 사이의 간격이 6시간이 채 안 되는 경우마저 발생한다. 자치노 조합원의 경우는 31.9%, 헬스케어노협은 27.0%, 전국일반노협은 62.3%가 "그런 적이 있다"고 말했다.
▲ 한일 양국의 간호사들은 공통으로 장시간 노동 구조에 놓여 있다. ⓒ뉴시스 |
이런 장시간 노동 덕에 "몸이 힘들다"는 호소가 상당히 높았다. 일본의 경우 조사 응답자의 60%가 "심신이 힘들다"고 호소했고, "예전에 비해 쉽게 피곤해진다"는 대답도 66%에 달했다. 한국의 경우도 "교대 근무로 몸이 너무 힘들다"는 답이 95.%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의 94.8%가 특히 눈의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재미난 것은 양국의 간호사 평균 연령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자치노 조합원의 경우 평균 연령이 38세, 헬스케어 노협이 35세며, 보건의료노조 조합원은 33세다. 이주호 단장은 "반면 영국은 45세인데 재밌는 점은 우리나라에서도 병원 외에 보건소, 학교의 보건교사 등 밤근무가 없는 의료 노동자의 경우 평균 연령이 영국 수준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평균 연령이 어린 것이 '일이 힘들어서'라는 얘기다. 당연히 이직율도 높고 근속연수도 짧다. 한국의 경우 동종업계를 포함해 총 경력 기간이 평균 6.13년 밖에 되지 않았다. 10년 이상 일했다는 사람은 24.4%에 불과했다.
우리보다 더 심각한 일본…"MB의 '의료 영리화' 진행되면 우리의 미래"
일본이 우리보다 다소 더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례도 있었다. 류노스케 국장은 "일본은 직원 식당이 있는 병원이 거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따로 식당이 없어 휴게실에서 식사를 알아서 하게 돼 있다는 얘기였다.
특히 최근 과로사로 사망한 2명의 간호사가 모두 20대라는 점은 열악한 일본 간호사의 노동조건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07년 입사 1년 만에 과로사로 사망한 24세의 젊은 간호사는 사망 직전 한 달 동안의 시간 외 노동시간이 100시간이 넘었다.
류노스케 국장은 "과로사라 하면 보통 나이 많은 50대의 일로 생각하는데 가장 활발하게 일할 수 있는 건강한 20대가 과로사로 죽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런 일본의 얘기를 듣던 토론회 참석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보다 더 심한 것 아니냐"는 술렁임이었다.
일본 관계자들이 "고이즈미 이후 10년 동안 병원 예산을 삭감하면서 이런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났다"고 설명하자 유지현 보건의료노조 사무처장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 년 뒤 우리의 모습이 지금 일본의 모습인 듯 하다"고 말했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영리병원 정책이 실현될 경우 일본의 지금과 똑같은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병원에 사람이 부족하다"
양국 공히 현장의 간호사들이 1순위 요구로 꼽고 있는 것은 '인력 충원'이었다는 점도 관심을 모은다.
지난 2008년 보건의료노조가건 원진노동환경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 결과 82.9%가 '인력이 부족하다'고 대답했다. 간호사는 85.8%가 이 같이 대답했다. 보건의료노조가 자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산별교섭 요구안을 묻는 질문에 33.3%가 인력 확보를 1순위로 선택했다. 간호사는 40%였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간호직장 개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인력 충원'이라는 답이 30%였다.
양국 공히 간호 인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시노하라 구니조 보건의료노조협의회 사무국장은 "고이즈미 이후 병원 예산을 줄이면서 인력을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도 100병상 당 인력은 지난 15년 사이 확 줄어들었다. 병원협회 통계에 의하면 1992년 107.4명이었던 100병상 당 인력이 지난 2006년 90.4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 수를 대비해 보면 우리나라의 간호사가 일본보다 훨씬 더 부족하다. 인구 1000명 당 활동 간호사는 미국이 10.5명, 일본이 9.3명인데 반해 우리는 4.0명이다.
인력 충원이 시급한 이유다. 류노스케 국장은 "일본의 초등학교 여학생들에게 물으면 '장래 희망' 5위 안에 반드시 간호사가 들어있다"며 "그 아이들이 동경하는 직업이 실제 꿈의 직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보호자 없는 병원과 OECD수준의 인력 충원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있는 보건의료노조도 이에 공감했다.
김인아 소장도 "장기적으로는 교대제를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하지만, 단기적으로도 휴식 시간의 실질적 보장, 연장 근무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해야 한다"며 "이직을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일이 힘들어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의료 서비스의 질을 고려할 때도 인력 충원을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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