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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아틀란티스트(Atlantist)'로 살아가기"

[철학자의 서재] 플라톤의 <크리티아스(Kritias)>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

고된 추위를 이겨내고 온통 산천이 연록색으로 뒤덮였다. 생명의 출발과 연장은 이토록 지난한 시간을 거름으로 하여 가능하고, 그 가능성으로 인해 핏방울처럼 뚝 뚝 떨어지는 작은 꽃 한송이를 피워 내는 것 같다. 이처럼 우리네 삶 또한 후퇴하는 반동적 권력의 역사 속에 신음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하루를 희망 없는 현실 속에서 작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고 살아간다. 희망의 노래는 많이 있다. 그 중 참으로 오랜만에 <떠나가는 배>라는 노래를 들었다. 책 얘기를 하는 자리에 노래 얘기를 하는 것이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원래 이 노래는 <이어도>라는 다른 제목을 갖고 있다. 이 노래는 제주도 동남쪽에 있다는 제주도 토착인들의 전설에 나오는 환상의 섬 '이어도'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의 구절 중 "(…)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라는 노랫말이 좀처럼 내 귀를 떠나지 못하고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내 가슴 언저리에 머문다. 무얼까? 사라졌다 보이고 보였다 사라지는 환상의 섬 '이어도', 그 환상의 섬을 노래하는 가사는 나에게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하였다. 바로 플라톤의 <크리티아스>(이정호 옮김, 이제이북스)에 등장하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꿈꾸고 있는 희망과 그리움은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은 우리네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대서양(The Atlantic Ocean)과 아틀라스 산맥의 이름은 모두 이 아틀란티스 섬으로 인해 나온 것인데, 60세를 넘은 플라톤은 <크리티아스>를 통해 먼 옛날 지진으로 대서양 해저에 가라앉았다고 전해오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에 관해 최초로 언급하였다. 사실 이 섬에 관한 원형은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한다. 아틀란티스 섬의 최초의 왕인 아틀라스는 올림포스 신들을 공격했던 이아페토스(Iapetos)의 아들이며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인간에게 불을 갖다 준 죄로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이 가해진 프로메테우스이다. 아틀라스는 플레이오네(Pleione)와의 사이에서 아틀란티데스라고 하는 일곱 명의 딸을 낳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아틀란티스는 아틀라스의 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후, 이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이 영역되어 알려진 19세기 이후로 5000권을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크리티아스에 등장하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를 둘러싸고 그것이 꾸며낸 이야기인거나 역사적 사실이라는 상반된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양쪽의 입장 보다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아틀란티스의 상징적 의미와 이를 통해 플라톤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정작 이 저작을 통해 아틀란티스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을까? 현상적으로 플라톤의 저작 속에는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하고픈 이야기는 아틀란티스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2500년 전의 플라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실현 가능한 훌륭한 지상의 국가를 위하여

▲ <크리티아스>(플라톤 지음, 이정호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프레시안
플라톤에 저작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대가로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로부터 그 훌륭한 나라가 실제로 구현된 모습에 대해 듣기를 요청한다. 이 요청에 대한 티마이오스의 대답이 <티마이오스(Timaios)>이고, 크리티아스의 대답이 <크리티아스(Kritias)>의 내용이며, 그 다음 헤르모크라테스의 대답인 <헤르모크라테스(Hermokratēs)>가 구상되었다. 그러나 <크리티아스>는 도중에 완성되지 못한 채 미완으로 남고 마지막 저작은 집필되지 않았다. 하여간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3부작을 훌륭한 나라의 구현이라는 주제 의식 속에서 구상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이 대화편을 통해 각각 이상적 정체(政體)와 인간 근원간의 동일한 구조, 이상적 나라의 현실적 증명, 이러한 이상적 나라를 위한 구체적인 법률과 제도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구상 속에서 그는 <크리티아스>를 통해 고대 아테네와 아틀란티스 제국 간의 전쟁을 다루며, 아틀란티스 제국을 이겨낸 고대 아테네 사람들을 칭송하며 이상적인 나라와 시민이 존재했었음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크리티아스> 1부와 2부보다 마지막 부분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플라톤은 마지막 부분 전까지는 아틀란티스의 통치 체제와 법률에 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가, 마지막 부분에 와서 다음과 같이 아틀란티스의 통치자들과 타락 과정에 대한 묘사를 한다.

"그들은 덕 이외에 모든 것을 경멸하였고 갖고 있는 재산 같은 것도 하찮게 여겼을 뿐 아니라 막대한 황금이나 그 밖의 재물 같은 그런 무거운 짐도 거뜬히 감당해 냈지. 그래서 그들은 부의 사치스러움에 취해 자제심을 잃고 그들 자신을 망쳐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애로운 교분을 통해 덕과 함께 불어나는 것임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다네. 반대로 부와 사치스러움을 얻고자 안달하고 그것들을 떠받들면 오히려 덕은 줄어들고 급기야는 그 덕 자체도 그들에게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말일세."(121a) 그리하여 "사악한 탐욕과 권력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을 "참되고 삶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왕들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사람들로 여겨졌던"(121b)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가치와 의미, 윤리적이고 미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과 사물이 갖는 가치 모두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된다. 그 속에서 재물과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들은 일반적 모습일 수밖에 없다. 우리 또한 이러한 삶으로부터 그리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소유욕과 권력을 위한 탐욕으로 삶의 양식을 전면화하여 우리 모두를 그러한 존재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재물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지향하는 삶의 양식이 아닌, 새로운 삶의 존재 방식만이 진정한 삶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고민하지 않으면 몰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플라톤은 사적인 소유가 지배하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다른 사회체제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의 잠재의식, 그 희망의 아틀란티스에서 살아가는 아틀란티스트

한쪽의 달콤한 탐욕은 다른 한쪽의 쓰라린 고통과 죽음을 시체를 씹어삼키며 흘리는 더러운 흡혈의 이빨로 성취된다. 그러나 권력자들의 탐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민중들은 언제나 그 고통만큼 꿈을 꾼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결코 저 먼 미래에 실현됨을 통해 위로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래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유토피아는 잠시 현실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바로 아틀란티스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지상의 유토피아를 실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과거 플라톤이 자신이 그렸던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목도하며 간절히 염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타락해 가던 아틀란티스인들을 제우스의 이름을 빌어 벌을 내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의 중심에 자리하여 생성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굽어볼 수 있는 신들의 가장 존귀한 거처로 모든 신들을"(121c) 불러들인다. 이제 타락한 권력자에 대한 심판이 제우스에 의해 행해지듯, 21세기 제우스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타락한 권력은 민중의 정치에 의해서만 진정한 심판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 플라론이 말하는 제우스의 역할은 민중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과거의 <크리티아스>는 21세기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지배자들의 권력과 재물의 탐욕에 대해 벌을 내리기로 결심하고 '모든 권력의 중심에 자리하여 생성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굽어볼 수 있는 인간들의 가장 존귀한 거처로 모든 민중들은 스스로 소집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네 역사에서 권력의 탐욕과 개인의 욕망의 실현을 위한 일상적 폭력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인간들을 벌하는 민중 권력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이 땅의 제우스는 바로 민중의 권력이다. 이것은 천상의 권력이 아닌 지상의 권력이요, 미래의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며, 천상의 철학이 아닌 지상의 철학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가 아닌 현실의 유토피아 사상의 철학적 기원인 플라톤이 21세기 우리에게 하고픈 절절한 외침이다. 이것이 플라톤 철학이 갖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힘이다. 희망의 잠재의식, 그 희망의 아틀란티스에서 살아가는 지상의 아틀란티스트,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또한 환상의 섬에서 살아가는 아틀란티스에서 아틀란티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희망의 존재론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존재론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나 존재하고 있는 것을 다룬다. 그러나 아틀란티스트에게 희망의 존재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존재의 미래적 차원으로 자신의 존재론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물질과 정신의 통일체이다. 그런데 물질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존재의 가능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틀란티스의 미래지향적 변증법적 존재론의 핵심일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계기를 포착하여 우리네 삶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이로부터 아직 도래하지 않는 것을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위해 구축하는 삶이 환상의 섬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공허한 환상의 섬이 아닌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아틀란티스트인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새로운 인간과 세상에 대해 꿈을 꾼다는 것은 아직 그러하지 않은 존재의 실재적 가능성이며 '아직' 그러하지 않은 미래적 존재자의 존재 방식이다. 공허하지 않는 아틀란티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미래적이지만 실재적인 우리네 삶의 잠재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다루는 과거지향적 철학은 과거의 이상을 표준으로 요구하는 회상의 철학이다. 그러나 우리네 존재의 현실적 가능성의 실현을 과제로 삼는 희망의 철학, 곧 현실적 환상의 섬을 구축하고자 하는 아틀란티스트는 도래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이다.

이제 회상의 철학은 희망의 철학으로 전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견은 단지 미래에 대한 내다봄이 아니라 미래를 '여기' 지금의 흐름으로 변형시키려는 결연한 의지이다. 따라서 아틀란티스트의 의지는 현실의 실존을 신비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거꾸로 탈신비화하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네 삶에서 아틀란티스트는 현실에 대한 실천적 비판으로 거리에서,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정치를 현실화하고자 물질적 저항의 몸짓으로 메마르고 황량해져버린 삶에 내버려진 자아에 조용히 손을 내밀고 함께 걸어가는 우리 모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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