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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뺨 때리면 왼뺨도 대라'…진실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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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뺨 때리면 왼뺨도 대라'…진실은 이렇다

[화제의 책] 김규항의 <예수전>

"'예수전'을 쓰는 것처럼 그 사람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은 없다. 각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에서 자신의 사상을 발견했다. 실제로 그것이야말로 예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김규항이 <예수전>(돌베개 펴냄)을 썼다. 예수전? 많은 기독교인은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예수의 삶을 기록한 <신약 성경>이 버젓이 있는데 웬 예수전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이들이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신약 성경>의 4대 복음서 역시 특정 시기에 쓰인 예수전이라는 사실을….

4대 복음서는 한 인물이 영감을 받아서 일필휘지로 쓴 것이 아니다. 이들 4대 복음서는 각각 여러 시기에 걸쳐서 다양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구술한 내용을 수집한 것들 중 일부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이 4대 복음서는 예수의 삶에 초점을 맞춘 전기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으로 봐야 할 것이다.

70년경 로마의 교회 공동체가 지은 '마르코복음(마가복음)'은 4대 복음서 중 가장 빨리 쓰였다. 김규항은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종교적 첨가도 적은" 이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예수의 삶을 들려준다. 그는 "예수에 관한 '김규항의 견해'보다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슈바이처가 지적했듯이 이 책은 '김규항의 예수전'이다.

예수의 정치성

▲ <예수전>(김규항 지음, 돌베개 펴냄). ⓒ프레시안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예수의 정치성'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이 쓰일 무렵 로마 교회 공동체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로마를 적대시하는 행동, 언사를 직설적으로 적는 것을 피하고 있다. 김규항은 "예수의 생각이나 태도로 볼 때 그가 로마에 아무런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 취급 못 받는 인민들이었다. 예수는 어떤 교조나 논리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바로 그들의 삶과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했고 행동했다. 그들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다시 말해서 그들을 해방시키려는 하느님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이 예수의 적이다. 여기엔 눈곱만큼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죄인, 여성, 아이들이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을 구름 위에, 관념 속에 건설하려 한 게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그 현실을 변화시킴으로써 만들려고 했다. 그 변화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당연히 정치적 갈등과 불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김규항은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주장도 반박한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마태 5:39).' 그는 "(이 표현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라고 꼬집으며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 번 들어보자.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결국 이 유명한 경구는 (…) 매일처럼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가슴 아픈 위로다."


나눔의 지혜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연구실장)는 "<예수전>은 성직자, 신학자의 비밀 영역이던 '역사의 예수'를 대중에게 돌려준다"고 평했다. 실제로 김규항은 예수의 삶을 들려주면서 이른바 '역사의 예수' 연구 성과를 폭넓게 활용한다. 이 연구는 <신약 성경> 속이 아니라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새 세상을 꿈꿨던 '혁명가 예수'의 삶을 추적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신앙의 대상으로는 부정해야 할 존재인가? 아니다. 김규항이 명확히 밝히고 있듯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가, 인간으로서 존경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그렇다면, 자구 그대로 이해하면 현대 과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예수의 이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규항은 "'과학'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伍餠二魚) 이적을 살펴보자. 장정만 5000명, 여자·아이를 합치면 실제로 수만 명이 아주 적은 양의 먹을거리를 배부르게 먹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가 설파한 '나눔의 지혜'다.

"이 이야기는 이른바 '나눔'에 대한 우리의 알량하고 가식적인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 누구나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 말하자면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 그런 변화를 위한 실천이며 행동이다."


진정한 부활

그럼, 끝없는 논쟁을 부르는 부활은 어떨까? 부활은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김규항이 지적했듯이 "예수가 잡히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떠났던 그들은 이 부활 사건을 계기로 다시 돌아왔다.

(수난을 받던 교회 공동체는 <마가복음>에 자신의 수난사를 그대로 투영했다. <마가복음>이 예수를 안팎으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유난히 외로운 이로 그리는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단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예수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흩어진 것"이라는 김규항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예수의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났을까? 그러나 이런 이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그를 떠났었다. 남다른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거부했던 예수를 다시 좇으려면 훨씬 더 중요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김규항은 제자들을 움직인 진짜 이유, 즉 '진정한 부활'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오랜 종교적 수련이나 특별한 구도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바로 이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은 후에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예수를 살리는 길

김규항은 <예수전>을 "다 읽고 '마가복음'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이토록 풍성히 해석한 이 책 역시 두 번, 세 번 읽고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 다시 한 번 슈바이처의 말을 인용하자면, 지금 이 참담한 곳에서 김규항은 멋지게 "예수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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