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나드 쇼는 아흔 넷 평생 동안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과시적이고 건방지고 불손했던 인물이었다. 그럴 만했고 또 그래야 했다. 젊은 시절 그는 소설가를 꿈꿨지만 처녀작 <미성숙>은 런던의 모든 출판사한테서 퇴짜를 맞았다.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사회 비평 운동에 몰두했다. <자본론>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됐고 페이비언 협회를 이끌었다. H.G. 웰즈와 버트런드 러셀이 회원이었던 페이비언 협회는 영국 노동당의 모태가 됐다. 연극은 조지 버나드 쇼가 생애 처음으로 창작의 희열을 맛본 분야였다. 그의 걸작들은 모두 비딱했다. <성녀 조앤>에서 쇼는 잔다르크를 아름다운 순교자가 아니라 억압받는 이상주의자로 그렸다. <피그말리온>의 학식 있는 남자 주인공은 내기를 한다. 길거리 하층민 여자를 기품있는 여인으로 교화 시켜보겠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가 교화라고 주장했던 건 사실 지식인인 자신의 이상형을 만들어내는 짓거리였다. 쇼는 <성녀 조앤>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지만 거절한다. 평론가로서 정치가로서 창작자로서 평생 반골이었던 그가 노벨 문학상 따위에 반색할 거라고 기대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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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쉬가 찍은 단 한 장의 조지 버나드 쇼의 사진 |
카쉬도 정말 어렵사리 아흔 살의 조지 버나드 쇼한테서 사진 촬영 허락을 얻어냈던 모양이다. 카쉬는 쇼가 몹시 못마땅한 듯 촬영 장소로 들어왔다고 기억했다. 사진 따위를 왜 찍어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카쉬의 시대엔 파바바박 연속 촬영이 가능한 디지털 카메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번 은판 촬영이 가능했다. 카쉬도 조지 버나드 쇼를 구슬릴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시간은 한정돼 있었고 기회도 한 번뿐이었다. 카쉬는 그대로 셔터를 눌렀다. 그렇다고 무작정 찍기 바빴던 건 아니었다. 그건 카쉬의 사진에 담긴 쇼의 퉁명스런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카쉬는 괴팍한 쇼의 그런 표정이야말로 구십 평생 살아온 한 인간의 정수라고 여겼던 듯하다. 퉁명스런 표정엔 조지 버나드 쇼의 일생이 담겨 있다.
카메라가 차고 넘치는 시대다. 삼청동과 가로수길과 홍대 앞을 쏘다니며 이곳저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인파들도 넘쳐난다. 블로그질 탓도 있다. 다들 먹고 마신 흔적들을 인터넷에 퍼 나르느라 여념이 없다. 카메라 회사들은 영원을 미끼로 더 값비싼 장비들을 팔아댄다. 전문 스튜디오라도 마찬가지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긴장 관계는 자본주의화됐다. 서로가 이해관계를 갖고 카메라 앞에 선다. 카메라 앞에 선 자의 표정 안엔 의미는 없고 목적만 있다. 그 속에서 이미지는 포착하는 게 아니라 조작되는 것이다. 카쉬 시대의 사진은 영험한 것이었다. 찍는 자는 찍히는 자의 영혼이라고 빼올 것처럼 렌즈를 들이댔다. 찰나를 놓치면 영원도 없었다. 이제 세상엔 사진이 넘쳐난다. 거꾸로 영원한 영혼의 이미지는 희귀해지고 있다. 예술의 전당 카쉬 전시회에서 살아 있는 조지 버나드 쇼를 만났다. 카쉬展은 오늘 끝난다. 생각만 하고 미처 못 가본 분들을 위해 조지 버나드 쇼가 이런 말을 자기 묘비에 남겼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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