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한여름 뙤약볕처럼 '햇볕'이라는 용어가 신문지를 수놓았고 노무현 정부 때 국민은 '로드맵'이라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용어와 한 동안 씨름해야 했다.
이명박 정부의 최대 유행어는 '녹색'이다. 엄밀히 말하면 '녹색성장'이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의미를 짐작키 어렵다. 흔히들 '녹색'하면 떠올리는 '평화', '자연' 따위를 살리는 정책은 일단 아닌 것 같다.
일단 대통령이 워낙 녹색을 좋아하시는지라 공무원들이 아무 데나 녹색을 갖다 붙인다. 흙 길에 시멘트 바르고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면 '녹색건설'이 되고, 멀쩡한 강바닥 파내고 배 떠다니게 하면 '환경 살리는 4대강 정비'가 된다.
친환경적이니 원자력 에너지 개발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녹색성장위원회'라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친목(?)도모회까지 만들어졌다. 친환경의 개념을 완전히 바꿨으니 이걸 '전환시대의 논리'로 봐야 할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듯하다.
소소한 정책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지경이다. 원래 누렇게 떠야 수확하는 쌀에 '녹색 브랜드'를 갖다 붙이는 건 애교로 넘어가자. 심지어 시뻘건 피 좀 보자고 만드는 무기체계를 개선하자며 '녹색 무기체계' 이름을 갖다 붙일 정도다. 삼성 야구선수 양준혁이 '파란 피'를 가진 건 야구팬들은 다 아는 얘기인데, 군인들은 '녹색 피'를 흘리는 건지 기자의 상식을 재점검해야 할 지경이다.
▲ 녹색 성장이 별건가?ⓒ프레시안 |
98프랑스월드컵 개최를 두 달 남짓 남겨놓고 벌어진 해괴한 사건이 불현듯 떠오른다. 당시 잠실운동장에서 친선경기로 한일전이 열렸는데, 한국측 관계자들이 누렇게 뜬 잔디가 '쪽팔린다'며 잔디 위에 녹색페인트를 칠하는 엽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비가 안 왔으면 괜찮았을 텐데, 비마저 주룩주룩 내리니 선수들 다리에 페인트가 다 번져 보는 사람들은 진짜 쪽팔렸다.
잔디가 생생해 보여야 한다며 잔디를 다 죽여 놓는 무식한 일을 거리낌없이 하던 그때와 녹색성장 해야 된다는데 정작 녹색은 없는 지금이 뭐가 다른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 정부가 21세기에도 20세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니 단순히 '옛날사람'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나마 창의적이니 정부청사를 '상상마당'이라 칭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다.
기자처럼 아직까지도 녹색 철학을 이해 못한 범인을 위해 확실히 정답을 보여주시는 정책을 정부가 8일 발표했다. '2020년 수도권 광역도시계획'을 개정하면서 개발제한구역, 곧 그린벨트 추가 해제 범위를 확정한 것이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이번 개정안으로 그린벨트 80㎢가 해제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거·교육·문화·레저·산업·의료·공공체육시설 등 자족기능을 갖춘 '친환경 녹색성장 복합단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이번 정책에서 확실한 것은 원래 녹색지대인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아파트 건설하겠다는 사실 뿐이다. 고로 정부의 녹색성장 전략은 곧 '녹색 없애고 성장하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세상에.
이러니 결국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한국의 녹색성장 전략을 두고 "전직 건설사 CEO인 이명박 대통령은 삽과 콘크리트가 관련된 일자리만 나온다면 '어떤 녹색정책'도 좋아한다"고 비꼬는 일까지 발생하는 거다. (바로가기 : FT "한국 녹색뉴딜 중심에 콘크리트가 있다")
그린벨트에 나대지가 많으면 숲을 조성하면 그만이다. 서민들을 위한 주택이 모자라다는 말에는 100% 공감하겠는데, 그러면 서민이 입주할 수 있게끔 주택가격 낮춰서 분양토록 하면 된다. 지금도 아파트 남아돈다.
기존 도심이 친환경적이지 않으면 도심 한복판에 숲 조성하고 친환경적으로 재생시키면 될 일이다. 어디 할 일이 없어 숲 죽이고 거기다 녹색 함부로 갖다 붙이나. 정말 이건 양말에 녹색페인트 묻혀가며 투혼의 가위차기 결승골을 넣은 황선홍이 통곡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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