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는 중국 병법 구절을 떠올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 때문이다. 비은행지주회사에 금융·비금융 자회사 동시지배를 허용하는 이 법안은 일부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 '삼성 특혜법'이라고 불린다. 은행이 없는 삼성그룹이 삼성생명을 지주회사로 삼아 삼성전자 등 비금융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판단 때문이다.
본회의에 갑자기 끼워넣어진 공성진 법안…'보이지 않는 손'은 삼성?
이 법안이 갑자기 주목받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법안이 정상적인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갑자기 끼워넣어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배후'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본회의에서 이 법안은 부결됐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이 법안을 슬그머니 통과시키려 한다는 의혹은 확대되고 있다.
결국, 논란의 당사자인 삼성이 최근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이 자리에서 삼성 측은 "이번 개정안이 이건희 일가 및 삼성에게 아무런 실익이 없다"며, '삼성 특혜법'이라는 지적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에버랜드가 사실상 지주회사 구실을 하고 있는 현 지배구조에 어울리지 않는 법안이라는 주장이다. 삼성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시민단체들은 이런 주장이 당치않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들 단체가 진짜 우려하는 대목은 따로 있다. '삼성 배후' 논란에 휩싸여 있는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의 법안에 눈길이 쏠려 있는 사이, 진짜 위험한 다른 법안이 통과될 수 있다는 우려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병법 구절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공성진 법안은 바람잡이일 뿐, 재벌이 주목하는 것은 공정거래법 개정안"
경제개혁연대는 7일 "금산분리 완화 법안, 삼성과 무관하다고?"라는 성명을 통해 "공성진 의원이 대표 발의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바람잡이일 뿐이고 실제 재벌들은 6월의 공정거래법 개정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비은행지주회사에 금융·비금융 자회사 동시지배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같은 취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금융지주회사법의 경우, 설립시 사전인가 절차를 통해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하고 금융그룹에 대한 통합감독의 체계도 갖추고 있다. 반면, 공정거래법에는 이런 규제가 아예 없다.
경제개혁연대가 "삼성그룹을 비롯한 재벌의 입장에서는 지주회사 전환 시 규제가 약한 공정거래법을 이용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이는 국민경제의 위험성이 그만큼 증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경고한 것도 그래서다.
삼성 지배구조에 법과 제도를 끼워맞추려는 시도는 현재 진행형
물론, 이런 입장이 공성진 법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날 성명에서 공성진 법안이 삼성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삼성그룹의 핵심 출자구조를 감안할 때 보험자회사(삼성생명)가 비금융회사(삼성전자)를 손자회사로 지배할 수 없도록 한 이번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삼성그룹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경제개혁연대는 "이번 법률 개정이 우리나라 금융지주회사 제도의 변치 않을 최종 귀착지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은 뒤 "작년 10월 정부의 금융지주회사법 입법예고 이후 삼성그룹 측이 정부와 여당에 추가 규제완화 로비를 하고 다녔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제개혁연대는 "작금의 은행법·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만이 아니라 이미 시행되고 있는 자본시장법, 그리고 지금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보험업법 개정안 등의 내용이 지난 2007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심상정 전 의원이 공개한 '삼성금융계열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로드맵(2005.5)'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것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 측의 움직임은 일련의 로드맵에 따라 이뤄지고 있으며, 자신의 소유지배구조에 맞춰 법과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는 변함이 없다는 설명이다.
공성진 법안으로도 삼성생명의 보험지주회사 전환은 가능
그리고 경제개혁연대는 "이번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삼성그룹에 불만족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굳이 하려고만 한다면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 측은 삼성생명이 보험지주회사로 전환하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현 지분율 7.2%에 추가로 22.8%를 매입할 23조 원이 필요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라며 "그러나 삼성 측의 이러한 항변은 공성진 의원안이나 정무위 수정대안의 법조문조차 확인하지 않은 엉터리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번 개정안의 경우 비은행지주회사가 비금융 자회사를 지배할 경우 금융자회사 주식보유 기준과는 달리 공정거래법상 20%이상의 주식만 보유하면 되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며 "삼성 측의 논리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추가 취득할 지분은 22.8%가 아니라 12.8%만 매입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경제개혁연대는 실제 삼성 측이 보험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추진한다면 12.8% 마저도 추가 매입할 필요도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전환 과정에서는 회사분할과 주식교환 과정을 거치면서 총수일가와 계열사들에 흩어져 있는 지분을 지주회사로 모으는 과정을 밟으면 추가로 지분을 매입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택하면 여러 단계의 회사분할과 주식교환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삼성이 치러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경제개혁연대는 "다만 삼성이 현재의 출자구조를 가능한 한 그대로 유지하는 지주회사 전환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관련 법의 추가 규제완화를 이끌어내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