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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손님에게 옛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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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손님에게 옛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요"

[한국에서 살아보니] 유서깊은 과천

여름에 덴마크에서 손님이 왔다. 덴마크에서 지낼 때, 자신들이 사는 뉘보라는 고장에 초청해서 구경시켜주었던 모은스 씨 부부다. 모은스 씨는 자물쇠를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다가 최근 회사를 정리하고 은퇴했다. 자그마하지만 독일까지 수출을 하는, 자물쇠 업계에서는 일류 회사다.

모은스 씨 부인은 한국인으로 뉘보에서 초등학교 방과 후 학교장을 지낸 이영주 씨다. 이들이 서울에 일주일 다니러 왔는데 그 중 하루를 내어 과천에 전철을 타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초청으로 덴마크의 뉘보 구경했던 일을 떠올리고 과천에서는 어디를 보여주어야 할지 난감해졌다.

덴마크의 뉘보라는 곳은 코펜하겐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동화작가 안델센의 고향인 오덴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고장이다. 인구 만 삼천 명인데 덴마크에서는 이 정도면 중간보다 큰 시라고 한다. 이곳의 역사는 8백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서 중세의 성이며 요새며 오래된 교회와 집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뉘보에서 모은스 씨 부부의 안내로 구경한 곳은 옛 성과 성 입구의 장애인이 운영하는 식당, 그리고 장애인센터였다. 오래 쌓인 시간이 주는 아름다움이 어디에나 녹아있는 중세도시 뉘보에서도 옛 성은 단연 일품이었다.

12세기에 축조된 성이 남아있어 오늘날에도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나름대로 잘 보존을 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전시관으로 쓰이고 여름에는 성안에서 음악회도 열린다고 했다. 성의 옛 기능은 사라졌지만 이 오래된 건축물이 새로운 기능을 하면서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성 입구에는 매우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소박한 식당이 있는데 시에서 지원을 하여 장애인들이 운영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음식도 훌륭했고 나르는 사람들도 밝은 표정이었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이 유서 깊은 도시 뉘보에서 모은스 씨 부부가 특별히 자랑스럽게 보여준 곳은 장애인 센터였다. 설립된 지 30년이 된 그 센터는 중증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시설이며, 장애인들이 부담 없이 살고 있는 방이며 집들이 있었고, 그 주변은 유명한 정원사가 30년을 내내 공들여 가꾼 정원 겸 공원이었다. 그 공원이 하도 아름다워 일반인들이 곧잘 산책이나 소풍을 나오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장애인들과 가깝게 대한다고 했다.

장애인 센터가 기피시설이 아니라 그 고장에서는 일종의 자랑거리라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런 시설은 덴마크 국민이 내는 혹독하리만치 높은 세금으로 유지가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사람들을 돌 볼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고 하는 모은스 씨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들이 구경시켜주었던 뉘보를 떠올리며 그들에게 과천 어디를 구경시켜주어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모은스씨는 1970년대의 서울을 아는 사람이다. 아직 개발이 되기 전의 동네, 낡고 초라한 집들, 좁은 골목, 골목에서 들리는 사람들 말소리, 풍겨오는 음식 냄새…. 이런 것을 소중히 여기고 천여 장의 사진을 찍어 세밀한 기록을 남겼다. 옛 건물을 함부로 없애지 못하는 덴마크의 시민답게 옛 모습이 없어진 지금의 서울을 슬퍼하는 사람이다.

모은스 씨를 생각하고 뉘보를 떠올리며 나는 과천에서 가볼 데를 이리저리 궁리했다. 과천도 역사로 따진다면 뉘보 못지않은 유서 깊은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율목이라는 이름으로, 그 후에는 율진, 과주를 거쳐서 과천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1413년이다.

그런데 이 유서 깊은 과천을 느껴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다. 굳이 들라면 온온사와 향교 정도 들 수 있을까. 그러나 온온사도 향교도 굳게 닫혀있어서 겉에서나 구경할 뿐 들어가서 볼 수는 없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천 초등학교 앞에 옛 동네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신도시로 탈바꿈하면서 옛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적어도 600년, 많게는 15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고장이, 지금은 30년이 채 못 된 신도시가 된 것이다. 그 시간도 길어서 20년이 넘은 아파트들은 차례로 재건축에 들어간다고 한다.

내가 과천에서 모은스 씨 부부를 안내한 곳은 결국 굴다리 시장으로 해서 중앙공원을 지나 양재천을 건너서 관악산 입구 향교 앞까지 한 바퀴 산책하는 길이었다. 이만해도 다른 지역보다는 나은 셈인지도 모른다. 재래시장 비슷한 굴다리 시장도 보고, 공원도 걷고, 도서관도 잠시 구경하고, 새로 복원된 양재천도 지나고, 바깥에서나마 옛 향교라는 곳을 쳐다보기라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 백 년의 역사를 지닌 고장에서 보여줄 것이 이 정도라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산책길 도중 그나마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향교였다. 그러나 향교는 계단을 올라가 문틈을 기웃거려보았자 닫혀있었고 바로 옆은 골프 연습장에, 그 위쪽으로 잇대어 있는 것은 등산로 입구에 흔히 있는 밥집들이었다.

산책을 끝내면서 늘 품고 있던 의문이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과천에 그나마 남아있는 온온사와 향교를 왜 굳게 닫아만 둘까. 아무리 보존을 잘 한다 해도 건물은 쓰지 않으면 쇠락한다. 써야만 건물을 더 잘 보존을 할 수 있다. 온온사와 향교도 살아 숨 쉬는 열린 공간이 되어 현대에서도 나름의 새로운 기능을 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외국인이 한국에서 보기를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 시멘트로 지은 거대한 아파트 군이나 새로 올라간 고층빌딩은 아닐 것이다. 매연으로 뿌연 하늘도 아니고 자동차의 홍수도 아닐 것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한국을 찾아 올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독특한 문화와 아름다움을 우리 일상 어디에서 찾아야 할는지. 어려운 일이다.
○ "한국에서 살아보니"

<1> 고생도 훈장
<2> 피곤한 사람들
<3> 불우 이웃을 도웁시다?
<4> 청계산이여, 안녕
<5> "석유 안 나는 나라에서 기차를 홀대해서야…"

<6> "기억 속 푸른 하늘, 다시 볼 날은 언제쯤?"
<7> "침 뱉을 일 많아도, 길에서는 참읍시다"
<8> "아빠, 빨리 들어오세요"
<9> 메뉴판을 하나만 주는 식당
<10> 어른도 교복 입는 나라?

<11> "여자라서 못한다고요?"
<12> "단체행동, 꼭 따라해야 하나요?"
<13> 윗사람, 아랫사람
<14> 축 합격 ○○○?
<15> "'○○과장' 대신 '○○님' 어때요?"

<16> "사교육 광풍 대책, 정말 모르시나요?"
<17> "'1등 과천'이 아니라 '보통 과천'이 좋아요"
<18> "그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19> 현수막 공화국
<20> "광장이 그립다"
○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 직업과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

"명문대? 우리 애가 대학에 갈까봐 걱정"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
"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
모두가 승리자 되는 복지제도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 임금보다 더 많은 나라

- '암기가 아닌 창의, 통제가 아닌 자율'을 장려하는 교육

"아이들은 숲 속에서 뛰노는 게 원칙"
"노는 게 공부다"
"충분히 놀아야 다부진 어른으로 자란다"
1등도, 꼴찌도 없는 교실
"왜?"라는 물음에 익숙한 사회
"19살 넘으면, 부모가 간섭할 수 없다"

- "아기 돌보기, 사회가 책임진다"

"출산율? 왜 떨어집니까"
"직장인의 육아? 걱정 없어요"

- "덜 소비하는 풍요"

"에너지 덜 쓰니, 삶의 질은 더 높아져"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공동체 생활"
'빚과 쓰레기'로부터의 자유
"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
"우리는 언제 '덴마크의 1979년'에 도달하려나"

- "낡고 초라한 아름다움"

"수도 한 복판에 있는 300년 전 해군 병영"
인기 높은 헌 집
"코펜하겐에 가면, 감자줄 주택에 들르세요"
도서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 덴마크 사회, 이모저모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 사람들
"크리스마스' 대신 '율'이라고 불러요"
아이와 노인이 함께 즐기는 놀이공원, 티볼리
"저 아름다운 건물을 보세요"
구름과 바람과 비의 왕국
"체면 안 따져서 행복해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이 만나면
잘난 체하지 마라, "옌틀로운"
"긴 겨울 밤, '휘계'로 버텨요"

- 덴마크 사회의 그늘

"덴마크는 천국이 아니다"
"덴마크 사회의 '관용'은 유럽인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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