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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의 민주주의적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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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의 민주주의적 해법

[박동천의 집중탐구]<34>실질적 민주주의의 이상 또는 몽상

제3부 합리주의: 권력숭배 프레임
제7장 민주주의의 이상
제3절 실질적 민주주의의 이상 또는 몽상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4월 22일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에서 "이거 기본적으로 없애버려야 해"(☞ 유명환 장관 막말 파문)라고 말한 것이 국회 영상회의록에 녹음이 되어 구설수에 올랐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날지 말지는 접어두고, 그가 없애기를 바라는 "이거"가 무엇일까? 물의가 일자 그는 "장관이 국회를 없애겠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며 "몸싸움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유명환 외교, "나도 열받아서... 고의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몸싸움"을 말한다면 거의 모두 자동사로 "없어져야 해"라고 말하지 "없애버려야 해"로는 말하지 않으리라는 데에 내 언어감각으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타동사로 "없애버려야 해"라고 말했다면 목적어는 "몸싸움"일 수는 없기 때문에, 국회를 가리킨 말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니 그는 1946년생으로 1973년에 외무부에 들어가 전두환 시절인 1985년에 청와대비서실에 파견된 경력이 있다. 박정희 시절에 외무고시에 합격했거나 전두환 시절에 청와대비서실에 파견된 공무원이 한둘일 리 없고, 그들이 모두 박정희나 전두환을 숭배할 리도 없겠지만, 그들 중에 국회를 없애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내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국회를 싫어해서 장식용으로 전락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당시나 지금이나 그런 식의 전횡을 지도력과 동일시하는 풍조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직도 강력한 주류에 해당한다고 나는 본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논급하고 논의했듯이 당파 자체를 불온시하면서 정치적 논쟁 자체를 짜증스러워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기본 풍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명환 장관의 사고방식에 치를 떠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과연 당파 자체를 불온시하면서 정치적 논쟁 자체를 짜증스러워 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당장 그날 국회에서만 해도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한미 FTA 비준안의 외통위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육탄방어에 나섰다.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표결로 가면 곧 통과가 뻔하기 때문에, 반대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몸싸움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과연 한미 FTA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하는 것일까? 저지를 해서 무슨 소용은 있을까?

▲ ⓒ프레시안

나는 한미 FTA의 세부조항들을 읽어보지 않았고, 설령 읽어봤다고 해도 그 조문들이 한국이나 미국의 해당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선명하게 꿰뚫어볼 능력은 도저히 없다. 나보다 더 잘 알 사람들은 대단히 많겠지만, 나는 사실 그 누구도 이런 정책의 장래의 결과를 선명하게 꿰뚫어볼 수는 없다고 보는 불가지론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장래의 결과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보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져 있다. 국익에 틀림없이 도움이 된다고 보는 사람들과 틀림없이 손해가 된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는 어떤 정책의 장래 결과에 관한 예상을 둘러싼 논쟁이므로, 실제 시행해보기 전에 논쟁을 하기로 들면 무한한 논쟁이 가능하게 된다. 다시 말해 논쟁만으로는 절대로 논쟁이 종식될 수가 없는 성격을 가진다. 이는 마치 올해 프로야구에서 어떤 팀이 우승할지, 또는 한일 축구 시합에서 어떤 팀이 이길지 등을 입씨름으로 결정하려는 태도와 비슷하다. 더구나 운동경기와는 달리 정책이란 사실 시행해본 다음에도 잘 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가 양단간에 분명하게 판명되지는 않을 때가 많다. "더 잘할 수가 있었다"거나, "더 적은 비용으로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거나, "지금은 성공인 듯 (또는 실패인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실패 (또는 성공)"이라는 등의 논란이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처럼 논란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거나 장차 예상된다는 점을 뒤집어보면 일촉즉발의 위기는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 논란이 발생하는 문제일수록, 당장 하지 않는다고 큰 일 날 것도 없고 또 당장 한다고 나라가 망할 일도 아니라는 함의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자는 안건도 아니고 단지 정부간에 쌍무적으로 합의된 교역조건을 비준하는 일이란 어떻게 보더라도 국회에서 정당 간에 드잡이 질을 거쳐야 할 만큼 핍절하고 급박한 사안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미 FTA안은 미국 의회에서 언제 논의가 시작될지조차 아직 정해지지가 않았다. 현재 미국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모든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한다. 다시 말해 오바마 행정부가 전임 부시 행정부처럼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더라도, 원안대로 의회를 통과할지는 대단히 불투명했다. 그런데 지금 오바마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취임후까지 한미 FTA를 재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무엇보다 자동차 부문을 문제 삼는데, 지금 미국의 자동차업계는 크라이슬러가 파산신청을 하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국회가 기존 협정안을 비준한다고, 미국의 대통령이나 연방의원들이 "압박"을 받겠는가?

구조조정을 당하는 자동차업계 내부에서는 정부가 자기들을 대표적인 부실 케이스로 몰아 붙인데 불만이 없을 수 없다. 이런 사정에서 오바마와 의원들로서는 한미 FTA가 아니라도, 한국이나 일본 같은 외국 경쟁사들에게 "불공정거래"를 시비하는 것이 미국내 업계의 불만을 다독거리는 한 가지 좋은 통로가 된다. 원래 협정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양보를 원하든지 않든지, 의회 비준 자체를 지연하거나 의회 내에서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민주당 정부가 미국 자동차업계의 편임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너무나 많다. 자동차업계의 구조조정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미국 경제가 전체적으로 안정되지 않는 한, 오바마 대통령의 현 임기가 끝나는 2013년, 즉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도 미국 의회는 한미 FTA를 비준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한국의 입장에서 FTA를 서둘러 비준하고 나면 결국 미국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 다시 말하면 미국의회가 선처해주기를 고대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물론 상대방이 고대하거나 갈망한다는 사실도 어떤 정도의 압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고려 사항들을 젖혀놓고 미국의회가 우리의 갈망을 (사실 전국민이 별로 그렇게 갈망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먼저 고려해서 한미 FTA 비준을 서둘게 될 확률은 내가 보기에 단순히 영일 뿐이다.

미국의 의회는 상정된 안건에 관해 자기들이 충분히 따져봤다고 여기기 전에, 자국 행정부 또는 외국정부의 요청 때문에 논의를 생략해서 결의를 서두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자유무역협정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시한이 있어서 그때를 넘기면 무슨 큰일이 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의회가 비준을 할지 말지, 하더라도 언제 하게 될지는 철저하게 의원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수가 움직이느냐에 달려있는 문제다. 그런데 민주당뿐 아니라 자유무역협정에 일반적으로 호의적인 공화당 의원들도, 기존 협정안은 자동차뿐만 아니라 소고기 부문에서도 한국측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자동차와 소고기 수입에서 한국이 문호를 더 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회의 결정을 고대해야 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이와 같은 미국의 묵시적인 요구사항은 재협상을 하지 않더라도 부대조건이나 이면합의 등, 추가적인 형태로 협정에 반영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모든 협상에서 자신의 최종 카드를 먼저 보이고 상대의 태도를 기다려야 한다면, 오래 기다릴수록 원래 내민 최종 카드에서 어떤 식으로든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미국 무역대표부에서 한국 국회가 비준하면 미국 의회에게 압력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얘기로서, 미국 무역대표들이 미국 의회에 가서 자신들의 활약을 변명할 거리를 만드는 의미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미 FTA 비준을 서두를 필요가 없고, 서둘러도 소용도 없으며, 서두를수록 장차 미국에게 더 내어줘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민주당 등의 판단은 내가 보기에 전적으로 옳다. 그런데 문제는 한나라당은 정부의 입장에 순응해서 이런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확고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자기들이 보기에 명백히 잘못인 정책을 다수가 추진하는데 표결로 가면 통과가 뻔하다. 육탄방어가 불가피하지 않은가?

이런 경우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육탄방어를 생각하기 전에 다른 길들을 고려할 것이다. 가령 표결에 임해서 소수당이기 때문에 패배할 수 없음을 국민들에게 그대로 보임으로써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찍었지만 한미 FTA의 조기 비준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에게 차기 선거에서 심사숙고하도록 촉구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장차 자신들이 다수당이 되었을 때, 반대당이 육탄방어를 할 수 있는 명분을 빼앗는 효과도 가진다. 또는 이런 기회에 한미 FTA의 표결처리를 용인하는 대신에, 소수파의 의사진행방해를 제도화하는 방안에 관해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장기적인 의회제도의 발전을 도모할 수도 있다.

아니면 토론과정에서 협정문이 전혀 수정 없이 미국의회를 통과하리라는 공개적인 장담을 행정부와 한나라당으로부터 받아낸다든지, 협정문 바깥에서 미국에 대해 양보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에 관한 분명한 한계를 공론화할 수도 있다. 협정문 바깥에서 미국에게 양보할 수 있는 여지를 이처럼 명료하게 공개적으로 좁혀놓는다면, 미국 의회가 시간의 칼자루를 쥐더라도 한국에게 요구할 양보의 폭이 줄어들든지, 아니면 미국 의회가 아예 비준을 무한정 지연할 가능성도 없지 않게 된다. 즉, 한미 FTA를 반대하는 정당으로서, 다만 소수이기 때문에 한국 국회의 비준을 절차적으로 막을 길은 없다손 치더라도, 미국 의회로 하여금 비준을 껄끄럽게 여기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적어도 한국의 입장에서 추가 양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협정이 이루어지게 유도할 길은 남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반박할 때 동원될 수 있는 용어가 "실질적 민주주의"이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진리가 다수결로 정해질 수 있느냐"는 반론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또 "선거 때만 인민이 주인인 것처럼 보이고 선거가 지나는 순간 정치인들이 상전이 된다"는 비판에도 항상 노출되어 있다. 표를 얻기 위해 정치인들이 아양을 떠는 모습을 시몬 베유는 매매춘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한미 FTA처럼 협정 자체의 손익을 접어두고 한국 국회가 비준을 서둘러야 하느냐고 물을 때, 현 단계에서 야당과 국민의 기를 꺾고 대통령과 관료들의 위신을 세운다는 의미 말고는 서둘러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도무지 없는 사안에 관해, 절차주의적 결정에 승복한다는 것은 뭔가 진리와 양심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 때 절차적으로 형성된 다수의사에 한미 FTA 조기 비준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아닐 테고, 설사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민 다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잘 몰라서 그렇게 된 것이니,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진정한 민의와 국익을 위해 기술적인 절차문제는 건너 뛰고 육탄방어를 해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시 무엇이 "진정한" 민의인지를 둘러싼 무한 논쟁 또는 무한 투쟁으로 접어들게 된다. 위에서 나는 한미 FTA 비준을 서둘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단지 내가 가진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그것이 진정한 "국익"이라거나 진정으로 "합리적"인 노선이라고 내 맘 속에 아무리 강한 확신이 있더라도, 내가 그렇게 확신한다는 점만으로 그것이 "진정한" 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수결이라고 오류가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다수가 때때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는 일반적 통계적 사실 때문에 목전의 사안에 관해 다수의견이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맘 속에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FTA 조기비준을 원하는 국회의 다수가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확정적인 판명은 내 확신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고 장차 사태의 진전에 따라서 이루어질 일이다.

더구나 이런 경우 나름대로 합리적인 확신을 가진 소수파가 취할 수 있는 길이 표결에서 지는 일 말고는 마냥 속수무책인 것도 아니다. 위에 열거했듯이, 미국 의회에서 토론이 벌어지지 않을 리가 없고, 토론이 벌어지면 당연히 미국 자동차와 소고기가 한국으로 들어갈 문이 "너무 좁다"는 미국의 입장이 표출될 것이며, 그랬을 때 한국 행정부가 그런 불만을 달래려면 뭘 얼마나 내놓아야 할지, 등을 공론화하면서 표결에 참여할 수가 있다. 외교통상부의 협상실무진과 한나라당이 저런 가능성에 대해서 어떤 대비책을 가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또는 포괄적으로 공언하게 만듦으로써, 현재 그들이 서두는 일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이었는지가 차후에라도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만든다면 적어도 정책결정에 관해 후세가 참고할 수 있는 명백한 이정표 하나를 확립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물론 서둘러 비준한 결과 행정부의 시나리오대로 무리 없이 일이 진행된다면, 반대했던 소수파의 체면은 조금 깎일지 몰라도 국익이라는 관점에서는 큰 손상이 없을 테니 국회의원의 직무수행으로는 육탄방어에 나서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 된다.

모든 절차나 제도는 그 자체로 어떤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더구나 인간사회에서는 항상 기성 절차나 제도를 악용하려는 세력이 발호하기 쉽다. 따라서 서로 다른 정파들이 서로 다르게 정의되는 공익을 위해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한 쪽 정파의 관점에서만 보면 상대 정파가 하는 짓들이 기성 제도의 "악용"이라고 비치기가 쉽다. 이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확대해서 말하면 기성의 모든 관습과 제도와 사법체계와 정치질서에 대해서, 불만이 끊어질 수가 없다. 이런 불만들을 뭉뚱그려서 포섭하는 데에 "실질적 민주주의"와 같은 문구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뭉뚱그림은 앞에서(제5장 제3절) 비판한 "저항적 연대"의 또 다른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 일제가 싫어서, 또는 이승만이나 전두환이 싫어서 형성된 연대가 1945-48년, 1960-61년, 그리고 1987년에 구체적인 체제의 기본질서에 관한 적극적인 합의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처럼, 단순히 이명박이 싫다거나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싫다는 이유만으로는 어떤 연대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사회의 개선으로 이어지기가 어렵다.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다양한 가치나 목표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불만 역시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양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사회적 약자를 좀더 배려하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인권을 누리는 세상, 그러므로 대학입시와 같은 일차적인 생존경쟁에서 얼핏 보기에 패배했거나 낙오한 편에 속하더라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생의 기회가 널리 열려있는 세상, 등을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부르면서 추구하는 것은 이상의 추구로서 탓하기는커녕 장려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구체화된 이상은 결코 절차적 민주주의와 대척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권의 고양, 약자에 대한 배려, 다원적인 가치, 등은 모두 제도와 절차의 개선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고, 사실 제도와 절차의 개선을 통하지 않고는 체계적으로 실현하기가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제6부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그런 과제들은 단적으로 사법기능의 작동방향을 개선해야 해결될 수 있는 일이고, 사법기능의 개선을 통해서만 실효를 볼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실질적 민주주의에 조금이라도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정의하게 되면,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나아가 법률을 적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위해 최선의 방법이 된다. 즉, 실질적 민주주의가 구체적인 목표라고 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형상화된다면, 절차적 민주주의를 최소한의 바탕으로 삼은 위에서, 구체적인 절차들을 점증주의적으로 고쳐나가는 것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최선이자 유일한 길이 된다. 반면에 절차적 민주주의 자체를 부인하고 대체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상정되는 실질적 민주주의는 단지 어떤 특정 문제에 대한 불만을 무한정 잡아 늘여 과장하는 무절제 또는 어리광과 같다.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구호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몽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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