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벌써 1년이다.
지난 1년 간 별의 별일이 다 있었다. 하지만 별일 없이 살고 있다. 때론 가혹해지는 주머니 사정에 지치기도 하고, 때때론 해도 너무 '많이' 하는 정부에 질리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상식과 같은 삶의 일상적 지배가치와 이를 배반하는 지배체제에 대한 괴리감이 깊어지던 시간이었다. 아예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마주하지 조차 않으려는 골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면, 보통 언론은 허덕이게 마련이다. 가혹해지는 정부와 가렴해지는 시민들 사이에서, 설명되지 않는 세상을 설명해야 하는 역할을 언론이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주는 언론이 처해있는 딱한 사정의 구체성이 절개된 한 주였다. 돼지 인플루엔자, 재보선, 노무현 전 대통령 소환, 촛불 1주년이 겹치고 또 나란히 연결되어 배치되었다. 한국사회의 복잡성과 동시대의 난망함이 촛불 이후 1년 내내 허덕여 왔던 언론의 딱한 사정을 압축한 듯 펼쳐졌다.
지난 한 주 세상에 던져진 소식들은 언론 입장에선 하나 같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뉴스들이었다. 촛불 이후 계속 그래왔다. 뉴스는 점점 많아지고 또 깊어져야 했다. 그러면서 뉴스에 압력을 가하는 외부적 요인들과도 싸워야 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폭발하는 뉴스들에 지치고 질려 모든 것을 그냥 흘기며 지나쳐 버리는 것 말고는 도저히 어쩔 방법이 없는 '귀차니즘'에 빠지고 말았다.
뉴스는 매일 새로운 소식이어야 한다는 당위와 매일 새로워지는 이야기를 그냥 매가리 없는 다채로움이라고 느낄 뿐인 실존적 조건의 충돌은 그 자체로 황량한 시절의 반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웬만한 것들엔 깜짝 놀라지도 않고 별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눈 뜨고 코 베어간대도 모를 정신없는 뉴스가 공존하는 '동시대의 비동시성'이 지난 촛불 1년간의 풍경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촛불 1년을 맞이하여, 야박하더라도 다시 언론 탓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고, 이해도 된다. 기본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기엔 사건이 너무 많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할 지를 냉정히 따지고 다질 시간의 공백이 생기지 않고 있는 사정도 말이다.
하지만 그건 핑계가 될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돌이켜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한국 사회의 상황은 언제나 그렇게 압축적이고 스펙터클했다. 작동되지 않고 있는 저널리즘의 본래적 기능을 다시 돌려야 한다. 뉴스가 사회적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선제적 장치여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다시 환기해야 한다.
지난 주 언론은 한-EU FTA를 놓쳤다.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를 잊은 지는 한참 됐다. 덩달아 슈퍼 추경도 단신 처리됐다. 황우석 방식의 연구 재게 역시 스쳐 지나갔다. 오로지 노무현만 쫒다가 난데없이 돼지독감을 만나서 정신을 못 차렸다. 언론의 안일함은 그 자체로 사회적 불안요소이자 불신의 근원이다.
아예 잃어버린 것은 그래도 좀 낫다. 저널리즘의 문법상 잃어버렸던 것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스트레이트는 놓쳤지만, 해설과 분석의 여지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 발휘되어 놓치지 않은 보도의 경우이다. 바로, 지난 주 일련의 정치적 일정에 불쑥 끼어든 돼지 인플루엔자(SI)의 경우이다. 언론의 고질적 문제를 보여준다.
돼지 인플루엔자(SI)는 '세계적 대유행병(pandemic)'의 단계에 들어섰다. 하루 이틀 사이의 상황이다. 지난 27일까지만 해도 질병관리본부는 '까딱'없다고 했었다. 언론에 보도된 전병율 질병관리본부 전염병대응센터장의 정확한 코멘트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인플루엔자 환자들이 조기에 감지가 되고 또 감지된 환자들은 적절하게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가 없습니다"였다.
언론은 정부의 입장을 전할 뿐 판단을 못했다. 지난 1년 사이 부쩍 보도 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언론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언론이 권고하는 위험을 줄이는 방법에는 손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개인위생에 대한 일반적 권고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국내에서 첫 추정 환자가 발생했다. 정부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때늦은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자, 돼지인플루엔자를 먼 나라의 그런가보다 싶은 소식으로 전하던 뉴스도 퍼뜩 정신이 차렸다. 집중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위험이 경고되는 매우 낯익은 풍경의 재현이자, 지난 1년 전에도 있었던 익숙한 보도 방식의 답습이었다. 그리고 그 뒤늦은 호들갑과 쏟아진 위험 경고 사이로 앞서 읊은 많은 것들이 묻혔다.
심각한 문제이다. 상황이 별로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경고이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론은 호들갑을 떨지만 기본적으로 구경꾼이라는 점에서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돼지 인플루엔자를 '사스'에 비교하고, 멕시코의 풍경을 스케치하며, 뉴욕 경제를 염려하는 저잣거리의 구경꾼들이 해야 할 몫을 언론이 대신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한국 언론만의 독특한 위험 구경 놀이이다.
이 위험 구경 놀이의 몇몇의 단어를 바꾸면, 촛불을 '87년'에 비교하고, 광장의 풍경을 스케치하며, 광화문 주면 상인들을 염려했던 지난 1년 전의 방식과 완전히 같아진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언론은 집회 보도에선 집회의 의미와 내용보다는 경찰과 시위대의 파열음을 기다리고, 국회 보도에선 법안의 의미와 내용보다는 여야간의 충돌을 기다리고, 재개발 보도에선 철거민의 삶 보다는 투쟁에만 주목해 왔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위험에 대처하는 언론의 시선과 관점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돼지인플루엔자 보도처럼, 위험을 대하는 언론의 방식은 늘 이러하니 항상 고전하는 것이다. 위험을 경고한다거나 위험을 맞을 불확실성을 줄이기보다는 언제나 위험의 스펙터클을 전달하는 사후 약방문의 방식 말이다.
촛불 1년을 맞은 오늘, 언론은 '진부'한 정권과 '진보'한 시민 사이를 잇는 유일한 장치이다.
5월 1일부터 3일까지, 1년 전에도 그랬듯 사회적 위험에 맞서는 시민들이 다시 광장으로 나올 것이다. 시민과 정권의 골이 깊어진 만큼 언론의 처지도 위태롭고 곤혹스러워 보인다. 1년 전과 같다.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카메라와 노트북을 챙기는 짧은 시간이나마 지난 1년간 언론은 무얼 했던 것일까 돌아보길 바란다. 또 다시 광장에 선 사람들을 위해서 무얼 말해야 하는가 말이다. 햇빛 눈이 부신 날 취재를 해야 한다고, 모든 것을 서럽고 시리게 생각하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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