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런 박찬욱스러운 것들은 <3인조>에서 이미 본색을 드러냈다. <3인조>는 절치부심 5년 만에 작정하고 자기 색깔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3인조>는 대중적으론 실패했다. 저널로부턴 재기는 있지만 자의식 과잉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3인조>엔 오늘날 박찬욱스럽다고 추앙 받는 주제와 형식이 모두 있다. 단지 대중과 평단이 박찬욱의 형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박찬욱 감독도 자신의 주제와 형식을 끝까지 밀어붙일만한 내공이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 박쥐 |
이제 다르다. 자신의 형식을 관철시키는 게 예술가와 대중이 벌이는 게임이라면 그 주도권은 이미 박찬욱 감독한테 있다. 대중과 평단은 그의 형식과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골몰한다. 뜻 없는 장면 하나 안에서도 무리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애쓴다. 설사 자신들이 익숙한 형식이 아니더라도 그 형식을 납득하고자 애쓴다. <게르니카> 앞에 선 초등학생이다. 평단은 <박쥐>로 박찬욱 감독을 거장으로 추켜 세웠다. <박쥐> 뒤엔 칸느의 권능까지 버티고 섰다. 박찬욱 감독은, 거장일 수 있다. 그는 오랜 시간 공들여 자신의 형식을 창조했다. 이제 그 형식을 세상에 관철시키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진정 대가만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다. 일찍이 피카소와 고다르가 그런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박쥐>는 걸작은 못 된다. 장르적으론 <올드보이>보다 지루하고 형식미에선 <친절한 금자씨>보다 헐거우며 파격에선 <복수는 나의 것>보다 약하다. 대중적으론 <공동경비구역JSA>만 못하다. 차라리 <박쥐>는 새로운 거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면류관이다.
거장이 자신의 창조적 형식을 세상에 관철시키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권위와 인정과 이해다. 권위는 소수 엘리트들이 인정하고 제공한 권능에 기대는 방식이다. 칸느는 권능의 공장이다. 인정은 적잖은 수의 평론가들과 대중이 그 형식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감독의 형식은 동료 감독들의 교본이 된다. 이해는 보편적으로 납득되는 형식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면 예술사의 조류를 바꾼다. 그렇게 베토벤은 낭만파의 효시가 됐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만 놓고 보면 그는 권위와 인정 사이 어디쯤에 있다. 모호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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