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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주 칼럼] 박찬욱 감독은 천재다. 그러나 <박쥐>는 걸작은 못 된다

철학자 칸트는 대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자야 말로 예술에 있어서 진정한 천재라고 정의했다. 내용이 예술이 아니라 형식이 곧 예술이란 얘기였다. 칸트미학에서 본다면, 박찬욱 감독은 천재다. 적어도 그는 예술가로서 천재를 추구하고 있다. <박쥐>가 가장 가까운 증거다. <박쥐>는 욕망과 복수와 증오와 살인과 광기와 종교에 대한 불신, 근친상간, 사회적 금기, 용서와 사랑 같은 박찬욱스러운 주제를 다룬다. 그걸 해괴한 웃음과 잔혹한 폭력성과 뭐든지 무조건 예쁜 미장센과 기승전결을 일부러 뒤튼 듯한 이야기 전개라는 박찬욱스러운 형식 안에 갈아 넣는다. 복수3부작에서 내내 천착했던 주제와 형식을 집대성해서 이게 바로 박찬욱스러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자기 형식 창조에 골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찬욱은 분명 천재거나 천재이고자 하는 예술가다.

사실 이런 박찬욱스러운 것들은 <3인조>에서 이미 본색을 드러냈다. <3인조>는 절치부심 5년 만에 작정하고 자기 색깔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3인조>는 대중적으론 실패했다. 저널로부턴 재기는 있지만 자의식 과잉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3인조>엔 오늘날 박찬욱스럽다고 추앙 받는 주제와 형식이 모두 있다. 단지 대중과 평단이 박찬욱의 형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박찬욱 감독도 자신의 주제와 형식을 끝까지 밀어붙일만한 내공이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 박쥐

이제 다르다. 자신의 형식을 관철시키는 게 예술가와 대중이 벌이는 게임이라면 그 주도권은 이미 박찬욱 감독한테 있다. 대중과 평단은 그의 형식과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골몰한다. 뜻 없는 장면 하나 안에서도 무리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애쓴다. 설사 자신들이 익숙한 형식이 아니더라도 그 형식을 납득하고자 애쓴다. <게르니카> 앞에 선 초등학생이다. 평단은 <박쥐>로 박찬욱 감독을 거장으로 추켜 세웠다. <박쥐> 뒤엔 칸느의 권능까지 버티고 섰다. 박찬욱 감독은, 거장일 수 있다. 그는 오랜 시간 공들여 자신의 형식을 창조했다. 이제 그 형식을 세상에 관철시키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진정 대가만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다. 일찍이 피카소와 고다르가 그런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박쥐>는 걸작은 못 된다. 장르적으론 <올드보이>보다 지루하고 형식미에선 <친절한 금자씨>보다 헐거우며 파격에선 <복수는 나의 것>보다 약하다. 대중적으론 <공동경비구역JSA>만 못하다. 차라리 <박쥐>는 새로운 거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면류관이다.

거장이 자신의 창조적 형식을 세상에 관철시키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권위와 인정과 이해다. 권위는 소수 엘리트들이 인정하고 제공한 권능에 기대는 방식이다. 칸느는 권능의 공장이다. 인정은 적잖은 수의 평론가들과 대중이 그 형식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감독의 형식은 동료 감독들의 교본이 된다. 이해는 보편적으로 납득되는 형식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면 예술사의 조류를 바꾼다. 그렇게 베토벤은 낭만파의 효시가 됐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만 놓고 보면 그는 권위와 인정 사이 어디쯤에 있다. 모호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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