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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진보, '선거연합'이라도 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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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진보, '선거연합'이라도 해야 산다

[박동천의 집중탐구]<31> 사회변혁의 두 모형: 영국과 프랑스

제3부 합리주의: 권력숭배 모형
제6장 합리적 정당의 꿈
제2절 사회변혁의 두 모형: 영국과 프랑스


영국, 엄밀하게 말하면 잉글랜드는 이른바 점진적 정치발전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하면 프랑스는 1789년의 대혁명에서부터 1871년 제3공화정이 등장할 때까지, 공화정-제정-왕정-입헌군주정-공화정-제정-공화정으로 이어지는 격변을 겪었다. 그 사이에 두 번이나 큰 전쟁에서 패했고, 제3공화정 역시 극좌와 극우에서 흔들어대는 바람에 위기를 견뎌내야만 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 지금 겪고 있는 진통들은 이념적 정체성과 관련되는 만큼이나 내부의 의사를 통합할 수 있는 절차적 합의를 생성하려는 산고라고 나는 본다.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발전과정을 간략하게 비교해 봄으로써 상당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은 17세기 내전과 혁명, 그리고 1714년의 왕위계승을 통해 의회주권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참정권이 재산을 기준으로 상위 10%의 계급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17세기 혁명의 의미는 종전에 1%가 독점하던 귀족정을 10%의 귀족정으로 확대한 데에 그친다. 물론 이 와중에도 10% 내부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헌정주의의 원칙은 자리를 잡았다. 이런 형태의 의회주의적 귀족정이 시행되던 18세기가 지나는 동안, 나머지 인민들이 정치적으로 자각하면서, 자유주의의 원리에 따라서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나폴레옹을 상대로 한 전쟁이 끝나면서 바로 민주화가 영국정치의 최대 의제로 등장하는데, 그 결과 참정권이 확대되었다. 영국의 참정권확대는 1832년부터 1928년까지 다섯 차례로 나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할부식 민주화"라고 불린다. 정치적 민주화와 더불어 경제적 민주화, 즉 사회주의적 의제들도 자연히 등장해서 20세기 초에는 종래 보수/자유 양당체제가 보수/노동 양당체제로 대체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유혈사태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중 최악의 경우는 1819년 맨체스터 성 베드로 광장(St. Peter's Field)에서 시위군중을 기마경찰이 공격한 일이다. 열다섯 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한 일로, 워털루 전투에 비유해서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고 부른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정치적 격변에 해당하는 것만 대충 꼽아도, 1792년 국민공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 1802년 황제체제, 1815년 부르봉 왕조 부활,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 1852년 루이 나폴레옹 황제등극, 1870년 제2제정 붕괴, 1871년 파리코뮌, 등등, 80여 년 동안 내부 정변과 대외 전쟁을 겪어야 했다. 이 와중에 자유주의, 입헌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공화주의, 왕당파 애국주의, 보나파르트 애국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주의, 등등, 온갖 색깔과 지향의 이념과 몽상들이 터져 나와 뒤죽박죽으로 서로 엉켜 싸웠다. 바람직한 정치체제의 모습을 둘러싸고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싸운 셈이다. 하지만 결국은 1871년 제3공화국으로 정리되었다. 영국식 이익정치의 모형, 다시 말해 의회와 선거와 법치와 같은 절차에다가 소수 세력에게는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폭넓게 허용함으로써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는 체제로 정착된 셈이다. 이런 체제에서 사회주의적 요구는 폭력수단에 의존하지만 않는다면 당연히 정상적인 이익표출로 간주되고 법률적으로 보호된다. 제3공화국의 원리는 그 후 몇 차례의 시련을 겪었지만 이겨내고, 현대 프랑스 정치체제의 원형으로 존중되고 있다.

영국의 점진적 정치발전과정을 프랑스의 방황형 과정에 대조해보면 몇 가지 후견지명을 얻을 수 있다.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이 구체적인 의제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7세기의 주제는 왕이 의회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 뜻을 밀어붙일 수 없다는 원칙이었고, 18세기는 그와 같은 의회주권의 원칙을 인구 10%까지로 확대된 귀족정 내부의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로 번역하는 과정이었다. 귀족정 내부에서 다듬어진 자유주의와 법치주의의 원리는 19세기에 일반 민중에게도 적용되도록 확산되었는데, 한꺼번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할부금 갚듯이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단 정치적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하고 나서, 사회주의의 요구는 그때까지 확립된 정치적 경쟁의 규칙에 따라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흥정되고 조정된 것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추상적인 구호를 보편주의적이고 완벽주의적인 방식으로 추구하다보니, 누구든 자기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모형을 바로 정답이라고 여기고 일체의 흥정이나 타협을 곧 죄악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사고방식의 이러한 경향은 현실정치에 원심력을 가중시켜 사회세력들 간에 극심한 분열을 낳았다. 사회세력들이 작은 차이의 경계를 넘지 못해 다양한 갈래로 찢어져 버린다면, 선동가들이 쉽사리 발호할 무대가 넓어진다. 상대적으로 소수에게 호응만 얻더라도 여타 어떤 세력보다 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세력들이 합해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소수 선동적인 독재세력이 다수의 분열에서 가장 큰 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선동가는 바로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과도하게 합리주의를 추구하면서 갈기갈기 찢어진 덕분에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비유는 1970년대 미국 행정학계에서 점증주의(incrementalism)이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일례로 풍력발전이라는 프로젝트를 미국, 독일, 영국 등에서도 시도하고 덴마크에서도 시도했는데, 소국 덴마크는 성공하고 대국에서는 실패로 끝났다. 덴마크 풍력발전산업은 대단한 이론은 없어도 농촌 현지의 세세한 경험에서 출발하는 점증주의로 접근한 데 비해, 다른 나라들은 대학연구소의 하이테크 기술을 현실에 응용하는 하향식 합리주의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점증주의 접근이 반드시 풀뿌리 상향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일부터 꾸준히 처리하다보면 장기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지, 장기적인 성과를 목표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데에 요체가 있다. 흔히 "그럭저럭 운으로 해내다"는 뜻을 가진 영어 구어체 표현 muddling through로 일컬어질 때가 많다.

점증주의라는 이름은 1970년대에 생겼지만, 이런 발상 자체는 동서양 공히 옛날부터 있던 것이다. 인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미래를 다 완벽하게 설계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설계를 아무리 완벽하게 해도 시행하는 도중에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무수히 작용한다는 사실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해본 장인급 기술자라면 대개 사무치게 깨닫는 일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새옹지마(塞翁之馬), 지장보다 덕장이 낫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등의 동양 격언들이 모두 그와 같은 방향의 발상을 표시한다.

서양의 경우에도 이런 생각이 대단히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히브리 경전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자연과학의 예측력에 관한 맹신이 과도하게 자라나면서, 그에 대해 적확한 비판을 제기하는 역할은 주로 영국 지성계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예컨대 인과관계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관습에 뿌리를 둔다는 흄의 성찰, 보편적 인권을 표방하는 와중에 야만과 탐욕만을 조장해서 사회연대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프랑스 혁명에 대한 버크의 비판 등이 그렇다. 이런 생각들은 역사에 관한 법칙이라는 것은, 법칙이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찾아내는 순간 인간이 그 법칙에 대해 반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법칙일 수가 없다는 관찰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에서도 예컨대 재즈 음악가 험프리 리틀턴은 재즈가 장차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걸 알면 내가 이미 거기 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시 한 편이 어떻게 작성될지를 예측하려면 곧 그 시를 직접 써야한다고 한 모리스 크랜스턴의 말도 정확히 같은 뜻이다.

계획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점증주의가 보수적이라고 비칠 수 있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든지 목전의 과제에 먼저 주의한다는 말만 들으면, 역사적인 거보를 뗄 수도 없고 백년대계에 입각해서 어떤 획기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없을 것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점증주의적인 접근이 반드시 획기적인 전환이나 개혁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초점은 획기적인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패가 인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계획대로 될지 안 될지, 계획에 없었던 결과들이 얼마나 발생할지, 등을 사전에 알아서 통제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의에 따라서는 획기적인 조치나 전환이 시도될 수 있다. 단, 그러한 획기적인 조치나 전환의 경우에도 일단 착수한 다음에는 결과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더듬어 가면서 되는 대로 해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연재를 예로 다시 한번 점증주의의 요지를 정리해보자.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얼개 수준의 계획이 있었다. 예컨대 네 가지 고정관념을 고발하고 비판한다는 계획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어떻게 논의를 전개할지까지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부분들은 한 글자 한 글자 집필하는 과정에서 모양이 잡힌 것이고, 또 수많은 수정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 세부사항에 대해 사전에 계획을 가진다는 것은 곧 그 부분에 관해 실제로 문장을 (종이 위, 컴퓨터 메모리 안, 또는 머리 속에) 지어둔다는 것과 같다. 네 가지 고정관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변경해야 할 만한 사정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어떤 때든 처음에 구상했던 바가 치명적으로 잘못되었음이 밝혀진다면 그만 두든지 아니면 획기적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방향을 바꾸는 경우, 역시 그렇게 바뀐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려면 한 글자 한 글자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런 모든 고려들이 점증주의에 속한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가 80년 간 방황했다는 사실은 자기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한 젊은이가 방황하는 것과 비슷하다. 혁명의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다는 것은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도 유형의 길을 떠나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제3공화국의 자유주의적 질서로 프랑스 혁명정국이 일단 안정되었다는 것은 유형의 길을 가면서 라스콜니코프가 증오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심리적 평화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일을 사전에 계획해야 맘이 놓인다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다는 징조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만 수용하고,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은 단순히 부인하고 배척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에서도 도덕에서도 중요한 일은 항상 한 사람의 구상만으로 통제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발생한다.

한국에 "합리적 정당"이 필요하다는 말은 "자유, 평등, 박애"를 원한다는 말처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 수준의 말에서 그치면 바로 방황밖에 남지 않는다. "합리적 정당"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전혀 정형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한다고 하면서 서로 싸웠던 프랑스 혁명의 역사처럼 대한민국의 진보진영은 "합리적 정당"을 위해 세포분열을 계속하고 있다.

프랑스의 정당들은 제3공화국 이후로도 분열을 계속해서, 프랑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다당제 국가로 위상을 확립했다. 하지만 정당이 이처럼 이익을 집약하는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구심력을 위한 기제가 어디엔가는 필요하게 된다. 정치세력들이 각자 자신의 합리성만을 고수하는 지평, 다시 말해 평면적, 산술적, 과학적 합리성으로 이루어지는 제일층위에서는 그런 기제가 생길 리 없다. 그것은 오직 입체적, 성찰적, 정치적 합리성으로 이루어지는 제이층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프랑스는 원심적인 정당체제를 뜯어고칠 수는 없음을 자각한 다음, 선거제도를 통해 구심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789년의 혁명 이래 여러 가지 방식을 바꿔가면서 실험했다. 제3공화국부터는 주로 결선투표제와 비례대표제를 번갈아가면서 시도하다가, 1958년 드골 헌법 이후로는 1986-88년간을 빼고는 결선투표제를 통해 인위적으로 다수의사를 조성해낸다. 이런 와중에 정당간 연합을 통한 연립정부의 경험, 그리고 선거 전에 연합공천으로써 독식은 포기하더라도 일부 지분을 확보하는 흥정과 타협이 정치행위의 중요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평면적인 합리주의의 시각에서는 아주 쉽게 배척되는 행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뜻, 다시 말하면 영국식 세속적 이익정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때 기회주의적이라고 매도되던 행태들이 정치에서 오히려 정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수용된 것이다.

세속화라는 주제는 제4부에서도 계속 논의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지금까지 다룬 내용이 한국의 정당제 발전에 대해 시사하는 요지를 정리함으로써 절을 마무리해야겠다. 한국에서 고정보수층이 30%, 무관심층을 30%로 잡으면, 40%가 남는다. 여기서 부동층을 20%로 잡으면 고정진보층은 20%라는 계산이 나온다. 무관심층은 2002년 대통령 선거 기권자 비율을 대략 기준으로 잡은 것이다. 부동층은 2002년과 2007년 선거 투표율 차이에다가,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2007년에는 보수로 이동한 약 400만 명을 합한 결과다.

이렇게 보면 투표율 70%를 전제할 때, 진보후보는 부동층 가운데 15%p, 즉 부동층 가운데 4분의 3을 끌어와야 35대 35로 보수후보와 박빙승부를 펼친다는 말이 된다. 골수보수 30%과 골수진보 20%는 열심히 투표장에 나간다고 보면, 투표율이 60%라면 부동층 10%를 다 끌어와야 진보와 보수가 동점이 된다. 정책경쟁이나 담론정치에서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은 접어두고, 단순히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수치만을 가지고 주먹구구를 해봐도 진보진영의 정치적 활로는 연합이 아니면 무망하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진보진영에서 연합이 잘 안 이뤄지는 가장 큰 이유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평면적일 수밖에 없는 합리성을 각자가 고집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진보파를 자처하는 인물들 가운데 정치, 즉 현실정치, 즉 세속적 기회주의 정치를 혐오하는 성향이 두텁게 분포한다는 사실도 이를 곧바로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다. 소위 시민단체를 "이익단체"라고 부르면 역정을 내고, 시민운동가가 선거에 출마하면 뭔가 갑자기 타락이라도 한 듯이 실망하고 매도하는 풍토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생각이 없다면 시민운동은 왜 하며, 정치에 영향을 미칠 생각이라면 정치판 안에 뛰어들어 싸우는 이상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는가? 물론 취향에 따라서는 출마보다는 시민운동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나 출마를 하면 기회주의자고 출마를 안 해야 "순수성"을 지킨다는 발상은 단지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춘기 정서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지표에 불과하다.
▲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울산북구에서 조승수 진보신당 후보로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 ⓒ뉴시스

정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자세라면, 선거에서 진보의 연합이 언제나 최고의 전략적, 즉 기회주의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정당이라는 조직의 울타리는 내부사정과 노선차이, 그리고 인간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때문에 밖에서 합하라 말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서류상으로 합했다가 이권이 걸릴 때마다 금세 찢어진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기도 하다. 문제는 선거 연합인데, 그렇다면 선거 때에 연합공천을 할 수 있는 표준적인 규칙을 정해서 관행으로 정착시켜 놓으면 될 일이다. 프랑스의 결선투표제는 스스로 연합공천을 하지 못하는 좌파와 우파에게 후보 단일화를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제도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문제는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니까 접어둔다면, 사회의 개선을 원하는 정당이 상습적 분열증을 극복할 내부절차로 내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라면 합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기본적으로 타이 브레이크를 인위적으로 강제할 필요에 충실한 합리성, 즉 정치적 합리성을 반영한다.

a. 정당이든, 정당내 파벌이든, 각 정파는 우선 예비 선거를 원칙으로 자기파 후보를 결정한다.
b. 연합후보 선출을 위한 방식은 해당 정파들이 시한을 두고 협상한다.
c. 시한까지 합의가 안 될 때에는, 그 시점에서 각자 제시한 최종안을 가지고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뽑힌 선출방식으로 연합공천을 실시한다.
d. 각 정파 안에서도 예비선거 방식에 관해 조정이 안 된다면 마찬가지 절차를 따른다.

이 규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평면적 주관적 합리성에 몰두하여 입체적 정치적 합리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회의 실제적 개선을 위한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욕구를 "진보"로 포장하는 셈으로서, 자기 뜻대로 세상을 주물려보려는 권력숭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규칙을 말로만 받아들였다가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불복하는 사람은 정치지도자로서는 물론이고 평범한 시민으로서도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정을 내릴 정도로 한국사회가 개명되어 있다는 믿음은 가져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경우 제비뽑기는 과학적 평면적 시각에서 보면 합리성과는 정반대인 맹목적인 우연으로 비치겠지만, 정치적 입체적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공정성을 확보하면서 교착을 깰 수 있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다. 아울러 정치행위자들 및 일반 유권자들에게도 정치라는 것은 항상 상대가 있는 게임이기 때문에, 제일층위의 평면적 합리성으로만 접근하면 독선과 전횡과 분열과 갈등이 필연적임을 깨닫도록 유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과 상대 사이의 입장 차이를 부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의 대전제로 삼음으로써, 대립적인 상황 자체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고양된 안목을 얻을 수 있다. 일차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그 충격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는 않을 여유, 일차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서 욕구 자체를 조절하는 여유, 한번에 만족을 얻지 못했을 때 다음번을 기약할 수 있는 여유, 등등의 여유는 외부 사정이 극한적이지만 않는다면 보통 사람들이라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는 심리적 성숙이다.

고전적인 덕목의 용어로는 이를 절제와 인내라고 부르며, 근대의 정치용어로는 타인의 인권과 인격에 대한 존중이라고 부른다. 홍세화 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주장한 관용, 또는 내가 앞에서 구분한 어법에 따르면 관인이라는 것이 또한 이러한 심리적인 여유를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기독교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얘기고, 불교로 말하면 자비가 되는 것이며, 공자 말씀을 빌리자면 충서(忠恕)에 해당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자비로 대하자는 말이 아니니까, 아니꼽게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어떤 넓고 느슨한 의미, 즉 현실정치의 순서척도에 의해 진보에 속한다고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 일시적이고 기회주의적으로 연합하는 일이 사회의 개선에 기여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고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결과가 될 수 있으니 평면적이므로 편협한 합리성만 고집하지 말고 마음을 좀 풀자는 얘기일 뿐이다. 합리적인 정당을 추구하기 전에 일시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선거 연합부터 시도하면서 나와 생각이 똑같을 수 없는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연습을 해보자는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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