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합리적 정당의 꿈
제1절 "진성당원"이라는 환상
2000년에 나는 <선거제도와 정치적 상상력>(책세상)이라는 작은 책자에서 우리나라 정당의 공천제도를 비평한 적이 있다. 의회개혁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후보에 대한 정당의 공천이 보스보다 평당원 또는 인민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일반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예비선거제를 당장 도입하기에는 선결요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중장기적인 의제로 고려할 수밖에 없겠다고 전망했다. 입당원서에 찍힌 도장으로 당원자격이 결정되는 한, 당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폐쇄형 예비선거는 경선용 당원을 양산할 뿐이고, 그렇다고 당원 자격을 가리지 않는 개방형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나는 봤다.
그랬는데 2002년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과정에서 새천년민주당이 이른바 국민경선제를 들고 나와 흥행에 성공했다. 민주당에서 누가 나와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상대가 안 되리라는 전망이 팽배하던 국면이 결국 노무현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날 수 있었던 계기의 시발점은 국민경선제라는 실험이 유권자들에게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주당은 폐쇄형과 개방형을 당원투표와 여론조사의 형태로 혼합했다.
▲ 지난 2002년 민주당 울산국민경선대회에서 1위를 한 노무현후보와 2위를 한 김중권(왼쪽)후보가 다른후보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2000년에 내가 "시기상조"라고 보았던 일이 불과 이년 만에 시행되어 성공을 거뒀으니, 예측으로서는 체면을 구겼다. 개인적인 자만심에는 약간이나마 손상이 갔지만, 정당개혁-의회개혁-정치개혁이라는 함수의 차원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2007년에는 국민경선제가 유권자의 기대를 모으기는커녕 정동영의 "조직표"에 대한 논란을 불러 본선 참패에 기여했다. 2002년에는 정몽준까지 매료시켰던 흥행력이 2007년에는 도무지 살아나지 않아, 문국현에게는 독자노선을 포기할 까닭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2009년 4·29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는, 전주 덕진구 공천문제로 민주당에서 샅바싸움이 벌어지다가 샅바가 끊어져버렸고, 울산 북구 연합공천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우여곡절 끝에 겨우 여론조사로 단일화하는 데까지 합의한 상태이다. 미국식 예비선거제가 뿌리를 내리기는커녕 썩은 종자를 뿌린 것은 아닌지, 아니면 씨앗과 토양이 애당초 어긋나지는 않은지마저 불확실한 상황이다.
이런 결과를 직시한다면, 당비납부라는 기준을 가지고 "진성" 당원과 가짜 당원을 구분하려한 시도가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실패했으니 다 갖다 버려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니까, 조급증이 나는 독자들은 잠시만 참아주시기 바란다. 뭘 버리고 뭘 지킬지, 또 뭘 빼고 뭘 더해서 보다 나은 절차를 만들지에 참고하려면, 실패를 뼈저리게 자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왜 어떤 부분이 실패했는지를 찾기 위한 끈질긴 탐사의 동력이 생긴다. 무엇보다 처음에 그럴듯해 보였던 발상 자체에서 엉성했던 지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당비납부라는 기준을 가지고 당원의 자격을 가름하려고 한 발상부터 살펴보자. 예비선거에서 투표권을 당원에게만 주기로 한다면 뭔가 가시적인 제한이 있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아무나 와서 당원이라고 주장하면 바로 투표권을 허용할 바에야 애초에 당원 여부를 따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수 있다. 민주당 후보를 뽑는데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와서 투표할 수 있다면 이상하다. 당비납부 여부로 당원자격을 감별한다는 발상은 여기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효과가 있을까?
당비납부가 적극적인 당성의 표지가 되려면 장기간에 걸쳐 꼬박꼬박 납부한 실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유권자들이 일반적으로 당파성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공천을 따서 출마할 요량이 아니라면 당비는 고사하고 애당초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도 공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법규의 조문과 적용조차 예컨대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운동을 벌인 사람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을 선거법위반으로 판시한 데서 잘 드러나듯이, "중립성"이라는 기계적인 잣대를 마구 휘두름으로써 일반적으로 정치적 의사의 공표에 부담을 주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조선시대 당쟁을 비난하던 정치의식의 연장으로 당파성 자체를 일반적으로 경원하는 풍조가 여전히 대단히 두껍게 분포하는 것이다. 낙선운동 자체가 위법이 아니라 어깨띠, 현수막 등 방법이 문제였다든지, 노무현은 공무원이라서 중립의 의무가 있었지만 일반 시민은 괜찮다는 식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억압의 분위기에 관해서는 변명이 될 수 없다. 이런 세부사항들을 따질 사람이라면 대단히 적극적인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차피 부담감을 별로 느끼지 않을 사람들이고, 이보다 소극적인 유권자들이라면 세부사항을 따지지 않고 유죄판결이니 위법이니 하는 얘기만 가지고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비납부라는 기준이 의도한 변별력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기간과 액수를 높여 잡으면, 당원수가 너무나 줄어서 예비선거의 의미가 없어져 버리게 된다. 월회비 2000원 6개월 납부라는 기준은 그러한 현실여건의 반영인 셈인데, 그러고 나니 일인당 1만2000원이라는 금액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낼 변별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막말로 10만 명을 당원으로 만드는데 12억 원이면 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금권정치 또는 금권정치에 대한 상호 의심과 불신을 조장하고 만 것이다.
예비선거제도가 우리사회 진보파들에게 우호적인 대접을 받는 이유는 주로 상향식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예비선거제도가 채택되고 정착된 과정 자체가 정치 엘리트들이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합리적인 최선의 방책을 고안해서 시행한 덕분이 아니고, 평당원 유권자들이 보스들이 독점하던 공천권의 일부를 요구해서 쟁취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가진 유권자들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예비선거가 채택된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나름대로 괜찮은 제도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정착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엘리트들이 도입해서 하향식으로 이식하려는 꼴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놓치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이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고, 자생과 이식의 차이를 무시하면 이식이 실패하기 쉽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 선거법은 주정부가 관장하는 사항으로, 예비선거는 정당 내부의 경선과정이지만 주법에 의해 규율된다. 보통 주의 국무장관이 선거관리의 최고책임을 맡는다. 폐쇄형인 경우 투표할 수 있는 당원의 자격도 주법에 의해 정해지므로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당원이라고 공표하면 당원으로 인정받는다. 예컨대 캘리포니아는 선거법 안에 민주당과 공화당의 (그리고 제3당과 제4당의) 예비선거 절차를 구분해서 세세하게 규정하면서, 유권자 등록시 스스로 당원이라고 선서한 정당의 예비선거에 투표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미네소타는 당헌에 규정된 원칙에 동조하고 지난번 선거 때 지지했거나 다음번 선거 때 지지하겠다고 공표한 정당 또는 지난번 선거 때 당원이라고 공표했거나 다음번 선거 때 당원이라고 공표할 정당에 가서 투표하도록 정하고 있다. 누구라도 아무개가 당원대회에서 투표할 자격이 없다는 시비를 제기할 수 있고, 그 때에는 바로 그 당원대회에서 그 사람의 자격 여부를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폐쇄형이든 개방형이든 각주가 시시콜콜 또는 대략적으로 예비선거 방식을 정하고 시행한다. 조문과 적용이 역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를 이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논외로 접어두면, 한국과 미국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정당지지를 우세스런 일로 여기느냐 아니면 자랑스러워하느냐는 데에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정당지지 여부를 밝히지 않는 사람들, 즉 독자층 또는 부동층은 많다. 하지만 대개 유권자 가운데 적어도 60% 정도는 떳떳이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공표한다. 예비선거제도가 취지대로 효과를 내려면 유권자들로 하여금 특정정당의 예비선거에 가서 투표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유도해야 한다. 충분히 많은 수의 유권자가 자기 의사로 예비선거에 참여한다면, 인위적 동원을 의심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당비납부 따위 쫀쫀한 꼬투리도 자연스럽게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유시민이나 최장집 등, 정당개혁 담론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명분을 세우는 데 급급해서, 기성 정당체계 자체를 싹쓸이 매도하는 풍조를 아울러 이끌었다. 최장집 교수는 대의정치가 작동하려면 정당이 제대로 기능해야 하는데, 현재 한국 정당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지역주의가 만악의 근원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그러면서도 지역당 구도는 비판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들부터 솔선수범해서 기존 정당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더러운 정치를 두고 볼 수 없어서 고상한 가르침을 내릴 뿐, 자기들을 진흙탕 안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지는 말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런 자가당착적인 결벽증이야말로 정당의 기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만 봐도 60% 이상의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가서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권영길을 찍었다. 미국의 기준으로 치면 이들이 곧 한나라당, 민주당, 선진당,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폐쇄형 예비선거에 투표권을 가진다는 뜻이다. 자기가 그렇게 투표했다는 사실을 떳떳이 공표하고, 지지정당의 예비선거에 참여하는 일을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여기는 분위기만 조성되어 있다면 미국식 예비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까닭이 없다. 왜 그렇게 안 될까? 지금 우리 정당들을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매도하는 소외된 정치담론 때문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심한 소외는 바로 정당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유권자들로 하여금 당원이라고 하면 뭔가 더러운 오점이 묻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오도한다는 점이다.
정당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혐오는 사실 더욱 근본적으로 정치에 대한 혐오를 함축한다. 정치의 현장에서 정치를 혐오하고, 정당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정당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떨치지 못하는 현상은 유권자뿐만 아니라 진보를 자칭하는 정치인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도착된 결벽증은 도덕적 교조주의의 소산임을 나는 제4부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도덕적 교조주의와 결벽증 때문에 현실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단일안건정치를 추구하는 선동가와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은 바로 다음 장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여기서는 합리성에 관한 어설픈 기대 때문에 자기가 몸담고 있는 정당을 저주하고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매도하는 언어적 소외가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장황하게 논의했듯이, 비판이나 냉소나 회의는 어디까지나 소모적 논란과 생산적 논란을 분별할 수 있는 암시가 내포된 상태에만 사회개선과 접점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 한국의 정당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생산적인 논의가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고치면 어떤 개선이 이루어질지를 제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막연하게 "유럽형 정당제", "선진국형 정당체계", "합리적 정당제도" 등을 되뇐다는 것은, 문제를 구체화해서 해결을 모색하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지역주의"라는 마녀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짓과 정확하게 똑같다. "지역주의가 문제"라는 표어에서 "정당이 문제"라는 표어로 바꾼 데 불과한 것이다. 지역주의 성토가 프레임의 지역화를 조장해서 시민들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을 뿐이듯이, 정당체계 성토 역시 정치의식의 소외를 불러서 정당개혁의 불씨 자체를 짓밟아버린다. 구체적인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매도는 기성 정당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죽이는 방향으로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합리성을 증진함으로써 사회생활이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여지를 찾아 개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의제의 형태로 문제가 제기되어야지 뜬구름잡기 식으로 그림이 그려지면 안 된다는 얘기다. 수학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 해당하는 합리성의 기준을 막연하게 다른 영역에까지 무작정 잡아 늘인 다음에, 그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을 도매금으로 싸잡아서 소탕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치기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 모든 전횡의 씨앗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 한국 정당에게 가장 필요한 사항은 내부 현안을 결정하는 제도적 절차의 확립이다. 확립되어야 할 결정절차에서는 항상 반대의견이 자유롭게 표명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관인의 풍토와 함께 어느 편도 독단적으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핵심요소로 담고 있어야 한다. 이런 바탕이 마련되어 있는 상태라면 노선투쟁에서 패배하고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세력은 보따리를 싸고 나가더라도 판이 깨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주관적으로 포착된 제일층위의 합리성만을 고집하지 말고 제이층위의 합리성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제일층위, 즉 산술적 합리성이란 본디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을 제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당 내부에서든 정당 사이에서든 목적의 차이라는 쟁점을 합리적으로 해소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서로 합리성을 고집하게 되면 충돌을 격화시킬 뿐이다.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왔다가 불과 4년만에 다시 합해진 결과를 보면, 어떻게 보더라도 당시의 분당은 전략적으로 미숙한 행태였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서로 차이를 곧 악으로 간주한 조급함 때문에 양쪽 모두 서로를 용납하지 못해서 갈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격렬했던 적대감은 다분히 유치하고 말초적인 감정이었음이 드러난다. 합리주의가 평면적인 산술적 모형에 집착하면서 목적과 가치의 차이로 봐야 할 일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이해한 결과다. 그런 어설픈 합리성은 상대를 내 맘대로 주무르기만을 원하는 전제적인 성향을 기르고, 그 때문에 조급한 성정을 잉태해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바로 판을 깨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길도 찾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국회의 폭력사태, 촛불 시위 도중에 분을 못 참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행위, 촛불 시위를 관인하지 못하고 진압해야 한다고 안달을 부리는 경찰총수, 반대의견의 존재 자체를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면서 공포에 떠는 건설회사 사장출신 대통령, 광우병의 위험을 좀 과장해서 보도한 방송 프로그램의 피디들을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믿는 국무총리, 미국발 금융위기에 공황에 가깝게 반응하느라 널뛰기로 춤을 추는 환율시장의 행위자들, 습관성 집착성 공황증에 빠진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참을성 없고 무책임한 행태들은 끝없이 목록을 이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경박함이 다 나름대로는 합리성에 따른 행동일 뿐만 아니라, 합리성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행동이다. 제일층위의 평면적 합리성만을 합리성이라고 생각하고, 제이층위의 입체적인 합리성을 체득하지 못한 탓이다.
평면적 합리성을 과학적 합리성이라고 한다면 입체적 합리성은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대조할 수 있다. 과학적 합리성은 주어진 문제를 객체화해서 풀어내는 데 특장이 있는 반면에, 그러한 문제가 주어지고 풀이가 수용되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역량은 갖추지 못한 단순성이 있다. 정치적 합리성은 때로 산술적으로 간단히 풀리는 문제마저도 쓸데없이 맥락을 고려하는 우를 범함으로써 스스로 공정성을 훼손할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합리성을 없애야 이상사회가 도래한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유치한 단견이다.
과학적 합리성이 목적의 차이 때문에 서로 부딪치는 경우, 갈등을 개명된 방식으로 평화롭게 풀어낼 수 있으려면 오로지 입체적 정치적 합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합하는 대안들을 일단 평면적 합리성이라는 의미에서는 대등하다고 간주하고, 단순히 결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인위적 절차를 고안해서 교착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런 경우에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서로 다른 합리성끼리의 대립에 적용될 수 있는 정치적 합리성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대립, 그리고 비합리성과 비합리성의 대립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비합리적이라는 형용사는 거의 모든 경우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위를 가리켜 일컫는 말로서,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해당 개인이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만약 그 자신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는다면 대립이 발생할 까닭은 없다.
즉,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대립이라는 명칭으로 분류되는 경우들도 사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각자 자기 생각이 합리적이라도 믿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인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러므로 시간, 자원, 소통의 기반 등이 허용하는 최대한까지 상호설득의 노력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대립이 계속되고, 한편 정책이나 진로의 결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서로 대립하는 쌍방의 입장을 내용상으로 대등하다고 간주하고 내용의 우열과는 상관이 없는 타이브레이크의 절차를 고안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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