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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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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튤립

[신기주 칼럼] 시장가치는 실질가치와 다르다

1637년 2월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남루한 한 사내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몹시 배가 고팠다. 술집엔 튤립 한 송이가 있었다. 그는 럼주를 한 잔 시킨 다음 안주삼아 튤립을 씹어먹어 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경악했다. 네덜란드는 튤립 투기 광풍에 휩싸여 있었다. 튤립 한 뿌리 가격이 집 한 채 값이었다. 남루한 사내는 오랫동안 네덜란드를 떠나있었다. 그에게 튤립은 그저 한 송이 튤립일 뿐이었다. 그날부터, 네덜란드의 튤립 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며칠만에 튤립 가격은 1/100까지 떨어졌다. 튤립에 묻지마 투자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파산했다. 급기야 자살하는 자까지 생겨났다.

1637년에 네덜란드에서 튤립 공황이 있었던 건 맞다. 경제사에서 최초의 경제 공황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튤립 공황의 진짜 시작이 어느 남루한 사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건 알 수 없는 이유로 튤립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단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은 손에 든 튤립이 한낱 튤립일 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날부턴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너도나도 튤립에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언제나 가격을 적정하게 결정한다고 했다. 이제 와서 시장은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애덤 스미스나 하이에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시장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너무나 많은 실수를 해왔다. 시장은 너무나 비이성적이고 언제나 욕망에 눈이 멀어 있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칼럼리스트 마틴 울프는 그의 책 <금융공황의 시대>에서 지난 세기 동안 200번의 크고 작은 경제 위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시장은 애초부터 이성적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시장 가치는 실질 가치와는 항상 다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그래서, 미술이야말로 손쉽게 주변에 휩쓸리고 극단으로 치닫곤 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더 없이 잘 어울린다. 미술 작품의 가치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고흐의 그림은 고흐가 살아생전엔 똥값이었다. 애초에 그림에 가치를 부여한 건 물론 고흐 자신이었겠지만, 시장 가치를 부여한 건 남들이 고흐에 열광하는 걸 보면서 따라 움직인 소비자들이었고 미사여구로 가치를 가공한 평론가들이었고 이쪽 저쪽으로 흥정을 붙이면서 가치를 부풀린 장사치들이었다. 딱 자본주의스럽다. 현대 사회에서 미술이 부동산 못지 않은 재테크 수단이 되는 것도 그래서다. 거품은 미술 시장의 튤립이다. 지난 19일 막을 내린 서울오픈아트페어에서 어느 배우의 작품이 500만 원에 팔린 모양이다. 다른 배우의 작품은 5천만 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다른 연예인들의 작품에도 구매 제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정말 미적 가치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예인의 이름값 덕분인지도 모른다. 미술만큼이나 대중문화도 거품의 동네다. 거품과 거품이 만나면 튤립이 피어난다. 그러다 누군가 튤립을 씹어먹어 버리면? 세계와 한국 경제 뿐만 아니라, 미술도, 연예계도 모두 너무 많은 튤립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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