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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마왕

[신기주 칼럼]<22> 하노이 제인과 미사일 마왕

1972년 7월 제인 폰다는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을 방문했다. 북베트남군의 대공포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제인 폰다는 미군 병사들의 섹스 우상이었다. 1968년 출연한 <바바렐라>에서 헐벗은 우주 전사로 나왔다. 그 뒤론, 아니었다. 많은 미군 병사들이 대공포에 목숨을 잃었다. 미국인들과 미군 병사들은 제인 폰다가 조국을 배신했다고 여겼다. 그들은 제인 폰다를 하노이 제인이라고 불렀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에 끝이 났다. 그러나 하노이 제인의 전쟁은 1970년대 내내 계속됐다. 할리우드 사교계는 그녀를 제명시켜버렸다.

가수 신해철 씨는 지난 8일 <신해철 닷컴>에 이렇게 썼다. "조선인민 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해 적법한 국제 절차에 따라 로켓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 국가와 민족이라면 핏발부터 세우는 네티즌들과 언론들은 침을 튀기고 있다. 1970년대 하노이 제인을 둘러싼 논란과 흡사하다. 제인 폰다는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만이 아니라 모든 전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제인 폰다의 선의는 교묘하게 이용당했다. 북베트남은 제인 폰다가 미국의 부도덕함을 양심고백한 셈이라고 선전했다. 미국은 그녀를 본보기 삼아서 반전운동을 싸잡아 매국노 취급했다. 미국인들은 둘로 갈라졌다. 참전과 반전, 제인 폰다를 지지하는 쪽과 하노이 제인을 저주하는 쪽으로 나뉘어졌다. 양쪽은 지지 세력을 모았다.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 하노이 제인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희생시켰지만 세상을 바꿔놓지도 못했다.

신해철 씨도 마찬가지다. 신해철 씨가 더 유명해지고 싶었다거나 평양에서 살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그의 발언은 한국사회의 작은 균형추 역할을 해준 셈일 수도 있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는 분명 여러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다른 목소리는 늘 필요하다. 때론 과격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노이 제인이 그랬듯이 신해철 씨도 이용만 당할지도 모른다. 이미 신해철 씨는 가수론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시대의 양심으로도 보이진 않는다. 시끄러운 정치 논객일 뿐이다. 그가 자기 주장을 드러내는 방식이 과격하고 선정적인 탓이다. 신해철 씨의 발언은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공론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생산적인 논쟁보단 감정적인 배설이 더 많다. 대중은 매국노와 애국자로 갈라져서 서로를 헐뜯고 있다. 1970년대 미국엔 하노이 제인이 있었다. 이 시대엔 미사일 마왕이 있다.

한 가지 슬픈 진실이 있다. 베트남 전쟁을 끝낸 건 하노이 제인이나 반전 운동가들이 아니었다. 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어서 일어났고 끝날 수 밖에 없어서 끝이 났다. 더 비극적인 진실도 있다. 그 뒤로도 전쟁은 계속 일어났다. 제인 폰다는 2005년 CBS의 <60분>에 출연했다. 그녀는 북베트남에 갔던 일이나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일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였다. "적국의 대공포 위에 걸터앉았던 모습은 미군은 물론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하노이의 제인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 그 일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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