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교과서 정치와 소외 - 2008년 촛불의 반성
제2절 불확실성에 대한 제노포비아
한신대학교의 윤평중 교수는 「사실과 합리성의 관점에서 본 '촛불'」(『철학과 현실』, 2008년 겨울호)에서 촛불시위는 주관적 진실성에 입각한 진정성(眞情性)은 인정되지만, 공공적 합리성을 갖춘 진정성(眞正性)은 없었다고 판정을 내렸다. 나는 촛불 시위가 정서적인 동기에서 일차적으로 비롯되었다는 데까지는 동의할 수 있지만,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합리적이지 못했다는 판정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시민들이 생각한 사실과 윤평중이 생각하는 사실이 달랐다고 말해야 하며, 따라서 시민들의 합리성과 윤평중의 합리성이 달랐다고 말해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이런 논쟁 상황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대립이 아니라 두 갈래 평면적 합리성이 대립하는 상황으로서, 윤평중은 그 점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자기가 믿는 평면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상대방의 실천을 인도한 평면적 합리성을 "비합리"라고 부르고 있다.
객관적 사실에 관한 한, 광우병 또는 인간광우병에 관해서는 과학적으로 확정된 것이 전혀 없다. 위험하다고만도 할 수 없지만 위험하지 않다고만도 할 수 없는 불확정의 상태인 것이다. 윤평중은 예컨대 "인간광우병인 변형 크로이트펠츠-야콥 병과, 치매인 알츠하이머병이 전혀 다른 질환이라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확고히 입증된 사실"이라고 자신 있게 선포하는데, 이 문장은 정치적 수사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사실을 진술하는 명제로서는 아무 의미도 가질 수가 없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실도 입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명제로써 윤평중은 콤 켈러허의 『얼굴없는 공포, 광우병 그리고 숨겨진 치매』(고려원북스, 2007)를 비판하려는 것인데, 켈러허가 제기하는 문제는 알츠하이머 병과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 병이 연관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현대 의학이 정확한 변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프리온 질환인데 알츠하이머로 오진되고 있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다. 이런 의혹은 과학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절대로 틀렸다는 확증을 획득할 수 없는 유형이다. 바로 그 때문에 켈러허의 주장이 의혹 수준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여전히 해당 분야 연구자 몇 사람이 파고들어 볼 만한 주제로는 충분하다. 적극적인 정책의 근거가 될 만한 의혹으로서는 까마득히 미흡하지만, 개인 연구자들이 지적 호기심을 느낄 정도의 의혹으로서는 충분한 것이다.
천동설이나 지동설, 뉴턴 물리학과 하이젠베르크 물리학 사이의 경합은 세계관의 변화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사실을 검증한 결과로 옳고 그름이 확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관점의 닻을 어디에 내리느냐에 따라 답도 달라지는 문제인데, 지동설과 불확정성 이론이 천동설과 뉴턴 물리학에 비해 응용력이 풍부하다는 시대적 판정을 받아 득세하게 된 것뿐이다. 이와 같은 세계관의 차원과는 별도로, 주어진 세계관 내부에서 구체적인 세부 가설들을 검증하는 과정들은 모두가 확정적인 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론적인 저울질에 따라 실천적 경계를 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사실을 진술하기로 하면, 알츠하이머 병과 크로이트펠츠-야콥 병 사이에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합당하다고 보는 사람이 의학과 생리학 분야에서 극소수라고 말해야지, 양자 사이에 관계가 없음이 최종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은 경험적 검증으로써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과학의 본질, 과학적 지식의 본질, 과학적 탐구의 본질 등이 무엇인지는 물론 과학철학과 인식론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소위 "영원한 문제" 중 하나다. 여기서 그런 주제에 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가식할 의도는 전혀 없고, 이 연재는 그런 주제들에 관해 깊게 파고들 자리도 아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 어떤 논란이 있든지 상관없이, 매우 상식적인 수준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학은 경험주의 검증절차 위에서 진행하며, 따라서 최종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동설, 만유인력, 진화론, 상대성이론, 생명복제, 등등, 전에 모르던 분야들이 과학적 탐구에 의해서 개척되어 과거의 오류가 일부 대체되었다면, 지금 "확정적 진리"라고 윤평중 교수 같은 사람이 믿고 있는 그 어떤 과학적 지식도 장차 새로운 발견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믿는 과학적 지식이란 입증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믿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 편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정책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윤평중과 일치한다. 하지만 나는 실천적인 선택으로서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는 반면에, 윤평중은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지 않다"를 사실 명제로 보고 있는 데서 크게 달라진다.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고 본 촛불 시위대의 입장도 내가 보기에는 실천적인 선택이며 반대로 보는 윤평중의 입장도 실천적인 선택이다. 실천적인 선택에는 "그 정도면 괜찮다" 또는 "그 정도도 싫다"는 정서적 반응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주관성 안에서는 이런 정서적 반응이 사실적인 근거로 뒷받침된다는 믿음이 수반되는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정서를 가진 사람들 본인은 거기에 정서만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착각이라기보다는 정서와 주관적 합리성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나는 앞에서 평면적인 합리성은 목적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영역으로 갈수록 수렴하기보다는 다양한 갈래로 발산한다고 말했다.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자연에 위배되는 행위" 때문에 광우병이라는 "천형"이 내렸다는 인식은 자연의 질서에 관한 한 가지 입장에서 나름대로 사실에 근거를 두고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물론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구분 사이에 까다로운 경계문제가 있다는 측면을 무시하는 정서, 초식/육식의 구분조차도 검토대상으로 삼겠다는 과학자들의 탐구정신에 기막혀 하는 정서 등, 이 합리성에는 여러 가지 정서들이 구성요소로 혼입되어 있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동시에 "미국산 소고기가 걱정할 정도로 위험하지 않다"고 보는 윤평중의 입장에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입장에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근거가 나름대로 있는 만큼 정서적 판단이 섞여 있음을 인정해야 일관적이다.
이 점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합리성만을 보고 시위대의 입장에서는 정서만을 본다는 점에서 윤평중의 판정은 전형적으로 평면적인 합리성에 빠져 있다. 따라서 시위대의 입장을 정서적이라고 본다면 윤평중의 입장도 정서적이라고 볼 수 있고, 윤평중의 입장을 합리적이라고 봐야 한다면 시위대의 입장도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서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듯이 합리성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정서와 합리성은 다양한 의미와 각도로 서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정서에 대고 자신의 정서를 들이대면서 우월성을 주장하는 형국을 피하고자 했다면, 윤평중은 합리성 대 정서라는 평면적 이분법을 벗어나면서 쌍방의 처지를 공정하게 서술할 수 있는 문법을 찾았어야 했다. 그러한 문법의 실마리는 바로 자연/인위의 평면적 이분법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만난 때문에 한국인들이 느낀 충격에 주목해서 찾아야 한다. 자연/인위의 원초적 구분에 기초한 평면적 합리주의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충격이 촛불 시위로 표출된 경로에 주목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대체로 미국 소고기를 먹고 살면서, 광우병,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 병, 산발성 크로이츠펠트-야콥 병 등등, 어디서 끝날지 모를 이상한 병명의 목록에서 나오는 불안과 의혹의 연쇄고리를 대체로 무덤덤하게 견디고 산다는 사실이 촛불시위대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은 그렇다치고, 소 사육두수가 훨씬 적은데도 광우병 발생건수는 대여섯배 많은 캐나다, 그리고 심지어 이 모든 소동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까지 보수세력은 접어두더라도 진보세력마저도 자국산 소고기를 먹고 산다는 사실 말이다.
우선 내가 앞 절에 꼬치꼬치 열거한 전염성 해면뇌증(TSE)은 내용은 다 접어두고 목록만 봐도 기분이 나쁘다는 사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소고기 한 점 먹기 위해서 무슨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들이 장례식 때 죽은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풍습을 들여다봐야 한다면, 이야기 자체도 불쾌한데다가 애당초 목적과 투자가 비례에 맞지를 않는다. 스크래피에 걸려 죽은 양이 18세기부터 보고 된 바 있다든지, 켄터키에서 1997년 집단 발병한 크로이츠펠트-야콥 병 환자들은 다람쥐 뇌를 즐겨먹은 공통점이 있었다는 등의 해괴망측한 이야기들이 "프리온의 정체를 아직 전혀 모른다"는 과학적 현실과 맞물리면 불쾌 정도에 그치지 않고 공포로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감수성에 굳은살이 박이고 심리적 면역력이 생기면 견딜 수도 있는 일이 된다. 미국, 유럽, 일본, 등등, 약 10억의 인구가 이런저런 경로로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에 직접 노출은 안 되었더라도 가까이 접근은 되었는데, 13년이 지나는 동안 168명의 환자만이 발생했다면, 그런 정도의 확률을 무시하고 산다는 것은 실제로 그다지 겁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촛불은 그래서 저절로 사그라졌다. 이제 미국이 앉은뱅이 소의 도축을 금지한다니, 더더구나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촛불이 다시 불붙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렇게 보면, 윤평중의 사후적 성찰은 꺼진 불에 대고 물을 더 끼얹은 꼴밖에 되지 못한다. 촛불을 이해하기 전에 설명부터 시도한 결과인 것이다.
▲ "명박퇴진"이라는 구호도 과격하고 무책임하지만, 군중의 시위에서는 그보다 더한 선동적 수사가 출현하더라도 놀랍지 않다. 문제는 지식인에 속한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사가 아니라 실제 목표로 설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데에 있다. ⓒ프레시안 |
나는 위에서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촛불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불쾌하게 느낄" 권리는 절대적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불쾌한 느낌"을 표현할 권리도 무제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촛불 시위는 끝날 만한 시점에서 저절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분풀이가 어느 정도 되면서, 생소한 발상에 굳은살이 조금이나마 생겨서 미국산 소고기가 한국땅에 정식으로 들어오는 푸닥거리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 전체 과정은 내가 보기에 민주사회가 쟁점을 처리해 나가는 방식으로서 지극히 건강하고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이 상황을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에게 있다.
집권세력이 이를 "불복의 카르텔" 운운하면서 공안 정국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는 이미 내가 <프레시안>의 [박동천 칼럼]을 통해서 기고한 다른 글들을 통해서 충분히 비판했기 때문에 여기서 반복하지 않는다. 그런 시도는 머지않아 부메랑이 되어 자기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결과가 뻔할 뿐만 아니라, 이 연재의 목적은 보수파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데 있지 않고 진보진영에게 마음을 열라고 충고하는 데에도 있지 않으며, 다만 사회의 개선을 진심으로 바라는 시민계급에게 현 국면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야를 제공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겨냥하려는 과녁은 생소함에 불안해하는 시민들의 제노포비아를 밝은 빛 아래에서 조명해서 소통의 계기로 삼지 않고, 도리어 더욱 더 어두운 구석으로 숨겨놓고서 공포를 조장하려고 한 지식인들에게 집중된다. <피디수첩>이 방영한 내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 그 정도 "과장"'은 사회적 의제에서 묻혀버릴 뻔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고발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명박퇴진"이라는 구호도 과격하고 무책임하지만, 군중의 시위에서는 그보다 더한 선동적 수사가 출현하더라도 놀랍지 않다. 문제는 지식인에 속한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사가 아니라 실제 목표로 설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데에 있다. 촛불의 근본에 모든 불확실성에 대한 제노포비아라고 하는 지독하게 폐쇄적인 권력숭배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단지 소고기 정책을 둘러싸고 정부와 대립했다는 한 가지만 보고, 아무런 매개 없이 바로 자기편의 촛불이었다고 착각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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