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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탐정극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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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탐정극의 가능성

[이택광의 영화읽기]<6> 영화 <그림자살인> 리뷰

영화 <그림자살인>이 말하고 있는 건 '역사'가 아니다. 이걸 '역사극'으로 본다는 건 너무 순진한 판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다소 구태의연한 느낌을 주는 다른 '유사역사극'에 비해 <그림자살인>은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단순하게 역사를 비틀거나 가공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역사 자체를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SF적 상상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SF라면 미래를 다룬다는 상식이 이 영화에서 무너진다. 과거를 다루어도 훌륭한 SF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림자살인>이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 <그림자살인>은 역사극이 아닌 유사역사극이되, 역사 자체를 낯설게 만드는 SF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원래 SF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대'를 보여주는 장르이다. 이런 맥락에서 SF의 경우 다루는 시대가 미래인가 과거인가 하는 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바로 '시간성'의 경험을 어떻게 전달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제로 미래나 과거의 경험을 '번역'하는 것, 이게 SF장르의 성패를 좌우한다. 잘못하면 황당하기 그지없을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주는 건 SF가 다루는 기술과 과학의 지식 때문이다. 물론 SF에서 다루는 지식은 반드시 정확한 것일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지식은 상상력을 위한 토대 노릇을 할 뿐이다. 이 말은 정확한 과학 지식이 SF에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게 반드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이버 펑크 문학의 비조라고 불리는 윌리엄 깁슨이 컴맹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게 이것이다.

<그림자살인>이 보여주려는 건 그래서 19세기 조선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이 모든 건 '탐정극'을 만들어내기 위한 배경일 뿐이다. <그림자살인>은 누가 봐도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이야기를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홈즈처럼 고도의 추리력과 직관을 가진 홍진호나, 의사 왓슨을 닮은 광수의 모습은 이 영화가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게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코난 도일만 이 영화를 위해 호명 당하고 있는 건 아니다. 제임스 본드 영화도 이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는 걸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순덕의 역할은 본드에게 신무기를 제공하는 Q의 역할이고 그가 실험실로 사용하는 곳은 MI6 벙커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고종황제가 M처럼 보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 <그림자살인>이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홍진호와 광수는 홈즈와 왓슨을 연상시키게 하는 인물들이다.

더불어 이 영화는 창조적 모방에 대한 새로운 원리들을 제시하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말하자면 내용을 베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장르의 법칙들을 반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복의 지점은 바로 원작과 모작의 차이 자체에서 발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원작과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장르의 반복은 가능한 것이다. 셜록 홈즈와 홍진호의 차이가 이것이다. 홈즈가 19세기 빅토리아 영국의 합리주의를 철저하게 구현하고 있다면, 홍진호는 21세기 한국의 실용주의를 체현하고 있다. 홍진호에게 중요한 것은 '돈'처럼 보이지만, 그 돈은 '재미'를 위한 것일 뿐이다. 홍진호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이 돈이라기보다 쾌락주의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즐거우면 그만이지, 다른 걸 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돈은 이 쾌락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쾌락보다 우선하는 건 아니다.

처음에 홍진호는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큰돈을 주겠다는 광수의 말에 솔깃해서 사건을 떠맡는다. 홍진호는 그냥 저냥 바람 난 '자유부인들'의 행각을 파는 일이나 하면서 조선을 떠날 궁리만 하는 '낙심한 자'였다. 그러나 사건이 흘러가면서 돈은 홍진호에게 점점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홍진호가 미국행을 포기하는 건 이 사건을 통해 얻은 계몽주의적 각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무의식적으로 홍진호가 쾌락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인식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영화는 21세기 한국에서 중요한 이슈이기도 했던 '어린이 성범죄'라는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영화의 비밀이기도 한 쌍둥이 형제는 이 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이중성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범죄의 주범이 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라는 가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런 장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 영화는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한국 영화에 새로운 장르 탄생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자살인>으로 인해 이제 민족주의적 윤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의 19세기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접근이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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