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웃기지도 않은 얘기다. 지금 이런 농담은 <개그 콘서트>의 아이스맨도 할까 말까 다. 하지만 <쟈니윤 쇼>가 한창 잘 나갔던 1990년대 초반까진 좀 달랐다. 데이빗 레터맨이나 제이 레노나 전설적인 자니 카슨이 진행하던 미국식 토크쇼를 한국식으로 재현한다고 해서 기대도 컸다. 토크쇼에서는 누구도 희화화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중은 TV에 비춰진 초대 손님과 진행자의 모습을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저 사람들이 영화 홍보를 위해 나온 건지 자기 변명을 위해 나온 건지 알지도 못했지만 상관도 안 했다. 순진하고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 <박중훈 쇼>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
지난 20년 동안 토크쇼는 세 가지 갈래로 분화됐다. 진행자와 보조 진행자가 초대 손님과 신변잡기를 얘기하는 토크쇼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건 아침 토크쇼다. 그러나 초대 손님과 화제 거리가 주부지와 닮아버렸다. <개그 콘서트>와 <웃찾사> 같은 속전속결형 개그 프로그램도 말장난을 주무기로 한다는 점에선 토크쇼의 한 갈래랄 수 있다. 버라이어티 쇼야말로 토크쇼의 직계 후손이다. <무릎팍 도사>나 <라디오 스타>처럼 토크를 주무기로 하는 경우도 있고, <무한도전>이나 <1박2일>처럼 상황 개그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공통점이 있다. 오직 토크만으로 대중을 요리하진 않는다. 토크라는 본질에 양념을 첨가한다. 인터넷이라는 양방향 미디어에 익숙한 지금의 대중은 잠자코 남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댓글을 달고 싶어한다. 채널이 분화되면서 리모콘 재핑(zapping)이 TV 시청 문화를 바꿔놓았다. TV의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는다. 당연히 흥미롭게 듣지도 않는다. 데이빗 레터맨이나 제이 레노같은 토크쇼가 다시 뿌리 내리기엔 한국의 방송 문화는 20년 전과는 너무 다르게 진화해버렸다.
젊은 시청자들은 몰라도 <쟈니윤 쇼>의 썰렁 개그에 배꼽을 잡았던 중장년층조차 <박중훈 쇼>를 외면한 건 뼈아팠다. 하지만 진짜 아쉬운 건 따로 있다. <박중훈 쇼>가 실패하면서 박중훈 씨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옛날 사람이 돼 버렸다. 그의 기대와 믿음이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분사형이란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미 아무도 쟈니윤을 보고 웃지 않는다. 이젠 박중훈을 보고도 웃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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