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현재까지 노동계의 뜨거운 감자로 자리매김한 '기간제·단시간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과 '파견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안들이 노동계와 경영계의 극심한 반대 속에 표류하고 있다.
비정규 문제의 심각성은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갈렸기 때문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2000년 이후 비정규 노동자의 삶, 투쟁, 사회적 의미를 매달 전하는 <월간 비정규노동>을 발행하며 비정규직 문제의 공론화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단체다.
2000년에 설립된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13일 오후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는 창립 5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계기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김성희 소장을 만나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걸어온 5년을 짚어봤다.편집자 주
다음은 김 소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비정규직 문제 관심 없던 2000년"**
-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창립된 지 벌써 5년이다. 비정규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낮을 때인데, 센터를 만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어땠나?
"당시에는 연구 영역을 '노동시장'에만 한정한 연구소도 없었다. 노동시장 영역 중 '비정규노동'을 특화해서 연구소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이었다. 그만큼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주로 얼마나 갈 수 있겠냐는 걱정이었다. 센터를 만드는 사람들도 특별한 확신은 없었다. 다만 IMF 관리체제에서 급증한 비정규노동자를 보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은 분명했다"
- 당시 노동 진영에서 비정규문제에 대한 인식은 어떤 수준이었나?
"전체 노동진영 차원에서 비정규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매우 초보적이었다고 본다. 대부분 '구조조정', '고용조정', '인원삭감' 문제에 이목이 쏠려있었고, 이를 저지하는 투쟁에 집중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부정적 산물이 비정규직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확산되기도 했다. 특히 산발적으로 개별 사업장에서 계약직이나 임시직 노동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현장에서는 '정말 큰 일 이구나'란 인식이 강하게 부각됐다"
- 정부도 비정규 노동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이 된 이후부터지 않나?
"정부도 2002년 이전에는 비정규직 문제를 별도의 사안으로 독립해 생각하지 않았다. 개별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발생하면 개별 사업장 문제로만 한정해서 접근했던 것 같다. 1999년 최초로 특수고용직인 재능교육 교사들의 노조가 설립되고, 2000년 KT계약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정부는 비정규 노동의 '특수성'을 인식하기보다 일반적인 개별 사업장의 문제로 파악했다"
- 그런 상황에서 센터의 역할은 가히 독보적이었는데...
"센터는 창립 때부터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하기로 한 만큼 다른 단위보다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센터가 다른 조직의 부설기관이 아닌 독립기관이었던 점도 센터만의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주요한 배경이다. 예컨대 센터가 민주노총 산하 연구소였거나 민주노동당 소속 연구소였다면 비정규직 문제에만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고, 다른 연구소보다 한 발 빠르게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고 이론적 접근을 할 수 있었다.
***"비정규직 문제, 공론화에는 성공했다"**
- 지난 5년을 평가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나?
"센터는 매월 발행하는 <비정규노동>과 웹사이트 <워킹보이스>를 통해 비정규 문제 공론화하는데 주력해 왔다. 때에 따라서 현상을 분석하고, 대안도 나름대로 제안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시간이 지날수록 폭발적으로 터져나오자 센터가 할 일도 급증했다. 물론 대중의 기대도 높아졌다.
지난 5년 동안 숨가쁘게 달려오면서 사회적 공론화는 성공했다고 본다. 불과 1년 전만해도 비정규법안에 대해 일반 국민들은 법안 존재조차 잘 몰랐지만, 최근에는 법안의 세부적 내용까지 인식할 정도에 이르렀다.
- 공론화 이후 센터의 갈 길은 어디인가?
앞으로는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비정규 관련 투쟁을 집약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아직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은 산발적이다. 전국단위 조직도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러 가지 부정적 모습도 나타난다. 예컨대 정규직 노조에 의존이라든지, 산별노조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품는다든지...
센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오류들, 정규직 중심의 양대노총이 비정규 사업을 하면서 발생하는 잘못된 경향을 바로잡는 일에 주력할 생각이다"
***"비정규법안, 정부의 지나친 확신이 파행 불렀다"**
- 지난해 9월 입법예고 된 이후 노동계에서 가장 들끓었던 주제가 정부의 비정규관련 법안이었다. 노사정 논의 기간 중 가장 분명한 목소리를 내왔는데...우선 노사정 실무회담을 평가한다면?
"논의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정부는 정부 법안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법안이라는 지나친 확신이 논의를 어렵게 했다. 노동계 또한 정부 법안의 문제점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안에 대해 준비가 부족했다는 논의 진행을 더디게 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법이 명확히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큰 장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노사정 실무회담은 정부·여당의 강행처리를 저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노동계는 노사정 회담을 통해 비정규법안의 문제점을 사회적 공론화에 성공하는 성과도 얻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진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권리입법을 쟁취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계의 현재 실력을 절감하는 계기도 됐다"
- 센터는 법안 논의 과정에서 기간제 근로와 관련 '초입 사용사유제한'(기간제 근로 계약 당시부터 사용사유제한을 해야 한다는 의미)을 강하게 주장했다. 양대노총도 '초입 사용사유제한'에서 한 발 물러선 상태였는데...
"초입 사용사유제한은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판단했다. 정부가 당시 초입사용사유제한 주장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여 비정규직 보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동의의 대가는 쓰다"**
- 4월 논의에서 노동계가 지나치게 명분을 의식해 최종 합의가 불발에 그쳤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노동계 일각에서는 그 대목을 매우 아쉽게 여기고 있다.
"4월 논의에서 상당부분 노·사·정 합의가 이뤄졌다는 말이 있었다. 만약 노동계가 합의했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을 것이다. 항의 수준은 과거 1998년 민주노총이 정리해고제 합법화를 받아들였던 당시 그 이상이 됐을 것이다.
논의에서 누락된 부분이 너무 많았다. 특수고용문제는 그 중 일부일 뿐이다. 정부가 처음부터 논의 의제를 기간제 근로와 파견 근로에 한정했다는 근본적 한계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노동계가 합의했다면 역풍은 만만치 않았을 거다"
-법안 논의가 일단 9월 정기국회로 넘어갔다. 합의 가능성 어떻게 보나?
"조금이라도 진전된 부분을 노동계가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서 합의여부가 결정 날 것이다. 생각해 볼 일은 미흡한 부분을 인정하고 합의 즉 동의했을 때 발생하는 정치적 의미다. 일단 노동계가 조금이라도 진전됐다는 점을 높게 평가해 동의를 했을 경우 이후 노동계는 부족한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하는 것 자체가 봉쇄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부는 노동계의 문제제기를 '너희가 동의를 해놓고 왜 딴 소리냐'란 식으로 나올 것이다.
현재 논의 구도로 보면 노동계가 인정할 만한 수준까지 논의는 불가능해 보인다. 의제 설정부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와 사용자가 논의 의제 자체를 확대시키는 등 정책 방향을 수정한다면 합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최근 노·정 관계가 최악 그 자체다. 어떻게 보나?
"정부의 정국관리능력이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계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는데 매우 경직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경기 회복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선을 미리 설정하고 노동계와 대화하자는 태도로는 노동계를 끌어들일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노·정 관계에서도 현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귀족노조 논란, 심각한 사회 양극화가 배경**
- 귀족노조 논란에 대해서도 한 마디 묻겠다. 억대 연봉을 받는 조종사 노조가 무슨 파업이냐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보수 언론의 문제로만 돌리기에는 문제가 복잡해 보인다.
"억대 연봉을 받든, 최저임금을 받든지 간에 노동자라면 자신의 생활의 질 향상을 위해 파업을 할 수 있다. 이론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상식이 일반 대중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심각한 사회 양극화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월 100만원 받는 노동자가 억대 연봉 받는 노동자의 파업을 곱게 보기란 힘들다.
하지만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이해한다. 비록 자기 자신은 저임금을 받고, 열악한 생활은 하지만 억대 연봉 받는 노동자에 대해 '귀족'이라고 힐난하지 않는다. 같은 노동자라는 의식이 강하다. 다만 이들은 억대 연봉 노동자에게 파업 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고 '연대'하자고 요구할 뿐이다.
당분간 귀족노조 비난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정부가 앞으로도 사회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노동 내부의 분열만 즐긴다면 귀족노조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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