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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에게 합리성만을 강요하지 말라

[박동천의 집중탐구]<26>합리성과 관습

제3부 합리주의: 권력숭배 프레임
제4장 합리성과 관습


계몽주의 시대에는 합리성과 관습이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세르베투스 등의 "합리적"인 생각을 교회라고 하는 관습이 방해하고 억압했다고 보면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링컨은 흑인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정책을 위해서 노예제라고 하는 관습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여성운동, 노동운동, 식민지 해방운동, 기타 수없이 많은 사회적 쟁점들 가운데 합리성 대 관습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포착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합리성 자체가 관습과 무관할 수가 없다. 사실은 합리성도 관습의 일부에 속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지은 수학자 루이스 캐럴은 『거북이가 아킬레스에게 한 말』이라는 짧은 패러디를 통해 이 요지를 최고로 선명하게 드러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A, B, Z, 세 개의 명제를 가지고 토론했다. 이 셋은 서로 관련이 있어서, A와 B로부터 논리적으로 Z가 귀결된다. 거북이는 아킬레스에게 만약 자기가 A와 B를 참으로 받아들이기는 하면서 "A와 B가 참이면, Z도 틀림없이 참"이라는 명제(C)는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아킬레스에게 자기로 하여금 Z를 참으로 받아들이게끔 논리적으로 속박하여 보라고 도전한다. 아킬레스는 우선 거북이더러 C가 참임을 인정하라고 한다. 그리고 거북이가 그것을 인정하자 자신의 공책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A
B
C (A와 B가 참이면, Z도 틀림없이 참이다)
∴ Z."


아킬레스는 이제 거북이에게 "네가 A, B, 그리고 C를 받아들인다면, Z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 그러냐는 거북이의 반문에 아킬레스는 "왜냐하면 그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만약 A, B, C가 모두 참이라면 Z도 참일 수밖에 없다 (D). 내 생각에 너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거북이는 만약 아킬레스가 명제 D를 공책에 추가로 적어 넣는다면 D를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이후로 다음과 같은 대화가 계속된다.

아킬레스: "자 이제 너는 A, B, C, 그리고 D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당연히 Z도 받아들여야 한다."

거북이: (천연덕스럽게) "정말 그래? 그 점을 명확히 해보자. 나는 A, B, C, 그리고 D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직도 Z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래?"
아킬레스: (의기양양해서) "그러면 논리가 네 목을 졸라서 강제로 그렇게 하게끔 만들고 말거야! 논리는 '네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A, B, C, D를 모두 받아들인 한, Z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거야. 따라서 너에게는 보다시피 선택의 여지가 없어."
거북이: "논리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적어 둘 만한 가치가 있을 거야. 그러니 그것도 네 공책에 적어 넣어 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을 E라고 부르자 - (E) 만약 A, B, C, D가 참이면, Z 역시 틀림없이 참이다. 이제 내가 이것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Z를 받아들여야 하지는 않음이 분명하지? 그러므로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단계인 것 같아. 네 생각은 그렇지 않니?"
아킬레스: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런 것 같구나".


캐럴의 풍자는 여행객이 갈 길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곳을 다시 지나는 대목에서 끝난다. 거북이와 아킬레스는 여전히 토론 중인데, 다만 아킬레스의 공책에는 빈자리가 별로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어떤 전제에서 어떤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증명은 추론 자체로 끝이지 더 이상의 추가적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캐럴이 패러디를 통해서 전달하는 요지다. 실제로 행한 추론 바깥에 타당성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듯이 생각하면서 타당성의 내용을 밝혀내려는 당대 논리학자들을 아킬레스로 설정하고, 캐럴 자신이 일종의 악마의 변호인으로 거북이 역을 맡은 것이다.

이 패러디의 교훈은 합리성과 관습의 관계, 따라서 합리성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된다. 합리성이 관습과 별개라는 발상, 그러므로 합리적인 사회에서는 정치가 필요 없으리라는 발상은 논리의 규칙이 추론이라는 실천의 외부에서 조달되어 도입될 수 있다고 보는 발상과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정치의 예로 대한민국 1954년,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의 경우를 보자.
▲ 1953년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치훈련생들. ⓒ연합뉴스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한 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황당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헌법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하면 개헌이 되도록 정하고 있었다. 1954년 11월 27일 표결이 있었는데, 찬성이 135표 나왔다. 재적의원이 203이라서, 3분의 2라고 하면 135.333...이 된다. 사회를 맡은 국회부의장 최순주(자유당, 충북 영동)는 의결정족수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부결을 선포했다. 그날 밤 경무대에 보고하는 자리에서 사사오입하면 135가 의결정족수가 되는데 일처리를 잘못했다는 꾸지람을 들었다. 다음날 정부는 담화문을 통해 부결선포는 계산착오였다고 선언했고, 그 이튿날 11월 29일 최순주는 국회에서 사사오입으로 가결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이 사건은 보통 위헌적 개헌이라고 부른다. 이름이야 어떻게 지어 불러도 별 문제는 없는데, 이로써 개헌이 된 것인가를 묻게 되면 약간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 개헌 조항을 헌법에 명시하는 까닭은 그 조항을 따르지 않으면 개헌이 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재적의원 3분의 2라고 할 때 203명 중 136이 정족수라고 보면 저 개헌안은 부결된 것이 맞다. 그런데 실제로는 가결된 셈이고, 1954년 이후 우리 헌정사는 바로 그렇게 생긴 헌법으로부터 일정한 연속성을 가진다. 최순주의 가결 선포는 과연 위헌인가?

위헌이라고 하면 어떻게 위헌적인 방식으로 개헌이 될 수 있는지 이상하다. 더욱 발본적인 물음은 지켜지지 않는 헌법이 헌법인지, 다시 말해 헌법전이라는 인쇄물은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지켜지지 않는 사회를 헌정체제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헌법전이라는 문서가 있었고,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은 취임할 때 그것을 지키겠다고 선서도 했고, 무슨 "개헌"이니 뭐니 하면서 논쟁과 몸싸움과 날치기를 대단히 심각하게 벌이는 나라에 헌법이 없다고 말해야 맞는다고만 우기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우리말 문구에 거의 항상 첨가되는 포폄의 의미를 솎아내 버리고 순전히 서술적인 차원으로만 "지킨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경우에는 "3분의 2라는 의결정족수를 사사오입으로 해석해서 지켰다"는 서술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방금 포폄의 의미를 솎아낸다고 했기 때문에, "지켰다"는 말에 "잘했다"는 뜻이 전혀 섞이지 않음을 음미해주기 바란다. 실제로 당시에 야당의원을 비롯한 지식인층에서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개헌 자체를 취소할 정도로 강력한 인민의 압박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 헌법에 따라 치러진 1956년의 선거에서 이승만은, 신익희 후보의 급서, 그리고 진보당 조봉암 후보에 대한 민주당의 질투심 때문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504만 대 216만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어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네 번째 임기 도중에 4월 혁명으로 물러났지만, 제2공화국도 1954년에 개헌된 헌법이 그때까지 헌법이었음을 부정하지 않았고, 거기 적힌 개헌절차를 근거로 새 헌법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는 말을 만들어서 부르자면 "위헌적 개헌"이라고 할 만한 사건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위헌적 개헌"이란 "네모난 동그라미"와 똑같이 의미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시에서 쓰일 상징 또는 두루뭉수리 정치적 수사로는 물론 가능하다. "평화를 위한 전쟁", "녹색 토건", "서민을 위한 강부자 정권", "민주적 집중", "기아에 허덕이는 강성 대국", 실제 정치판에서 사용되는 수사 가운데에는 단어의 조합만으로는 무의미한 형용모순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문구들도 분명하든 모호하든 모종의 이미지를 전달하면서 나름대로 목적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문구가 나름대로 수사학적 목적에 봉사할 수는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목적은 대개 전쟁을 통해서 어떻게 평화가 이루어지느냐는 심각한 질문을 회피하고서야 달성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위헌적 개헌"이라는 문구는 이처럼 학자들이 헌법이 당시에 있었다고 봐야 하느냐 아니면 없었다고 봐야 하느냐는 까다로운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반영한다. 그리고 나는 당시에 헌법이 있었고, 지켜졌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단 당시에 있었던 헌법을 나라면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최순주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의 실력자들이 개헌 절차를 "해석해서 지킨" 방식 역시 나는 승인하지 않는다. 그래도 다수 국민의 묵인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개정된 헌법은 1960년에 폐지될 때까지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 헌법이었다. 이렇게 서술하는 것이 실제 벌어진 사실에도 부합하면서 내가 믿는 가치를 양보하지도 않는 가장 균형 잡힌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전히 사사오입 개헌을 위헌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위헌적인 방법으로 헌법이 개정되어 6년 동안 행세했다고 말하게 되면, 오히려 장차 "위헌적 개헌"이 또 일어날 수 있는 전례를 제공하게 된다. 죽은 지 오랜 이승만을 조금이라도 더 비난하기 위해서 "위헌적 개헌"이라는 헌법모독적인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악질적인 선례가 후세로 전승되는 것이다. 반면에 헌법 조문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석한 내용에만 집착하지 않고, 당시 알고 그랬든지 몰라서 그랬든지 인민이 좌우지간 그 헌법을 묵인하고 수용했음을 생각하면 절차적 하자가 설령 있었더라도 충분히 엄중하지는 않다고 간주되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헌법에는 "재적 3분의 2"가 규정되어 있었고, 합리적으로 해석할 때 203석의 3분의 2는 136 이상이어야 한다. 이 점을 부인하자는 것이 전혀 아니다. 당시 자유당 정권도 136을 넘기려고 기를 썼다는 사실은 그들도 이것이 합리적인 해석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문제는 머리 속에 있는 "합리성"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그런 꼴을 본 인민 다수도 머리 속의 "합리성"을 추상같이 추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데에 있다. 캐럴의 패러디에서 악마의 변호인으로 등장하는 거북이가 1954년 대한민국에서는 현실 속의 다수 인민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런 경우 인민에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논리로 이기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실제 상황에서는 이런 일이 사실 대단히 자주 벌어진다. 머리 속의 합리성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때 누구나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어렵다"는 정형화된 문장도 준비되어 있다. 이런 변명조차 없이 말과 행동에서 발생하는 명백한 괴리도 많다. 일례로 1918년 여름 영국 의회는 여성 참정권을 도입하면서 남성보다 10살을 높여 30세 이상에게만 허용했다. 여성의 정신연령이 남성보다 열 살이 어리다는 소리냐고 원성이 자자해졌는데, 그 때문에 그해 겨울에 통과된 피선거권 조항에서는 남녀 공히 25세 이상으로 했다. 그 결과 25세 이상 30세 미만 여성은 투표할 수는 없지만 의원으로 당선될 수는 있는 일이 벌어졌다. 일반 선거에서 어리기 때문에 투표권이 없는 사람이 의원으로서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투표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명백한 괴리조차도 무려 10년을 지속하다가 1928년에야 시정되었다.

산술적 합리성이 현실에 당연히 실현되어야 한다는 시각은 결코 잘못이 아니고 무리도 아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산술적 합리성이 실생활에 적용되고 실현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인데, 그럴 때 평면적 합리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정치적 판단의 전부를 구성하면 곤란하다. 다른 사람들이 그 평면적 합리성을 말로만 떠들다가 막상 행동에서는 엉뚱한 모습을 보일 때, 그 자체만으로 세상이 끝난 듯 좌절할 필요는 없다. 평면적 합리성이 지켜지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진지하게 고려해서 정치적 합리성에 의해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 할 주제다. 가능하면 다양한 선택지를 앞에 두고 고려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보다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사오입 개헌의 사례를 5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각에서 되돌아본다면, 의결정족수 계산에서 203의 3분의 2는 136이라는 합리성은 외부적 합리성에 해당한다. 외부적이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 확고한 절차적 원리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실 당시에는 입헌주의나 법치주의, 의회주의의 원칙들도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빈틈을 찾아 착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적 합리성은 이승만의 개헌을 위헌이므로 무효라고 봤겠지만, 현실에서 작동한 관습적 합리성은 대충 넘어가는 편을 지지한 셈이다. 실제로 당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IRK)은 그 해 말 보고서에서 의결정족수는 136이어야 맞는다고 명시했지만, 개헌의 효과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우리사회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계몽주의 이래 많은 진보개혁성향의 인물들이 이와 같은 외부적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표준 쪽에 현실을 끌어 맞추려는 시도를 보일 때가 많다. 그런 시도는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처럼 인민 개개인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갈 권력이 없다면 전혀 성공할 수가 없고, 그런 권력이 있어도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후자의 경우는 사회를 합리화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인류의 역사 이래 식상할 정도로 자주 발생한 전형적인 권력정치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행동한다. 관찰자의 시각, 즉 외부적인 시각에서 이유가 없어 보이는 행동에도 행위자의 시각에서는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행위자의 시각에서 이유가 있다고 해서 다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 때 합당함이라는 것 역시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가 매우 본질적이다. 진보정치의 이상은 계몽주의 이래 몇 사람의 설계자들이 도화지 위에 사회의 조감도를 그리는 방향에서 설정된 경우가 많다. 이때 설계자들은 전형적으로 도화지 바깥에 위치한다. 그들이 지향하는 합리성이 사회 안으로 들어가려면, 기존의 관습적 합리성과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해서 매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매개는 토론일 수도 있지만, 더불어 함께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외부적 합리성의 시각에서만 보면 정치가 없어질수록 편리하겠다고 보이겠지만, 더불어 부대끼면서 매개의 통로를 찾으려한다면 정치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요건이 된다. 매개된 합리성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전제로부터 결론이 추론되는 모습만을 보여주면 그만이고, 추가적 정당화는 필요 없다. 합리성의 차원에서 소외되어 서로를 외부자로 인식하는 상대끼리도 추가적인 정당화는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부자들끼리도 추론되는 모습만 보고 합리성의 매개가 발생하는 일이 반드시 불가능하다고만 할 일은 아니겠지만, 대개는 영화 <ET>에서 형상화되듯이 실천의 공유가 바탕으로 깔린 다음의 일이다.

즉, 실천을 공유한다면 이미 서로에 대해 외부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실천의 공유가 합리성의 매개에 충분하지 못한 상태라면, 언어를 통한 추가적 정당화는 아무리 길게 이어가도 도움이 될 수 없다. 논리(logos)가 매개되지 않은 상태라는 말 자체가 언어(logos)를 통한 소통의 통로가 막혀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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