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 나잇 앤 굿 럭>에서 에드워드 먼로 역을 맡아 열연을 보여준 데이빗 스트래튼. 언론이 진실의 언어로 대중을 설득해 정의를 구현할 수 있었던 때는 이제 낭만의 과거가 돼버렸다. |
하지만 사회의 이해 관계가 더 복잡하게 얽히면서 언론이 언어로 대중을 설득하고 정의를 구현하던 낭만은 중세의 전설이 되고 만다.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에서 알 파치노는 역시 CBS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 <60분>의 프로듀서로 나온다. 그는 담배 회사의 간부였던 러셀 크로우를 설득한다. 러셀 크로우는 미국 담배 회사가 중독성을 높이려고 담배에 발암 물질인 암모니아를 섞어 넣었다는 증언을 하지만 CBS는 방송을 보류한다. 돈 때문이었다. TV안에선 정의를 외치는 언론도 현실에선 온갖 지분 관계와 주주 이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알 파치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CBS의 인사이더가 돼야 했다.
이젠 언론을 영웅으로 삼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언론이 양심과 취재력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부터가 한편으론 희극적이고 한편으론 유아적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이 그런 영화다. 프로스트는 누가 봐도 진지한 언론인이 아니다. 프로스트는 닉슨한테 천문학적인 인터뷰 비용을 지불한다. 사실 그가 돈을 대가로 닉슨한테서 얻어낸 건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보잘 것 없다면 보잘 것 없는 결과였다. 닉슨은 워터게이트에 대해 후회하냐는 프로스트의 질문에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 때 TV카메라는 닉슨의 낙심한 표정을 전리품으로 노획한다. 프로스트가 얻은 건 닉슨의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워터게이트에 대한 어떤 보도보다도 진실에 다가간 듯 보였지만 또 어떤 보도보다도 추상적이고 모호했다.
▲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프로스트가 제공한 것은 언론인으로서 진실의 폭로라기보다는 찰나의 위안에 불과하다. |
론 하워드 감독은 미국식 신파를 잘 만든다. <신데렐라맨>이나 <아폴로13>이나 <뷰티풀 마인드>는 주인공과 상황을 각기 달랐지만 한 가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다 잘 될 거다. 이 역경은 이겨낼 수 있을 거다. 우리가 성취한 성과는 언제나 가치가 있다. 진실은, 진심은, 정의는 실현된다.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보여주는 언론의 모습도 같다. 프로스트는 닉슨의 염세적 표정을 이끌어낸 공로로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대접 받지만 대중이 프로스트의 방송을 통해 얻은 건 찰나적인 위로였다. 그걸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론 하워드는 방송 한 자락이 세상을 바꿨다는 듯 군다.
앵커의 말 한 마디가 세상을 달라지게 하진 못한다. 그런 기사도의 시대는 지나갔다. 진실을 밝히던 언어는 신전에서 내려와 권능을 잃은 채 유희로 전락했다. 지금 저널보다 더 막강한 건 막말이다. 마찬가지다. 앵커의 말문을 막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지금은 에드워드 먼로의 시대도 <60분>의 시대도 프로스트의 시대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