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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어떻게 윤리를 구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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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어떻게 윤리를 구현하는가

[이택광의 영화읽기]<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리뷰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한국 사회에 낯선 주제를 말하고 있다. 바로 '수치심'(shame)이다. 이 영화는 수치심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의미심장한 영화이다. 지난 수 년간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수치심은, 초월적 범주를 부정한 조건에서 윤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제로 받아들여졌다. <더 리더>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는 "노동계급은 왜 파시즘을 지지하는가"라는 그람시적인 질문을 감추고 있다. 마이클과 한나의 애욕은 이 궁금증에 대한 해명이다. 케이트 윈슬렛은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투박한 독일 여성노동자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해냈다. 중산층 여인과 노동계급 남성의 사랑이라는 애정영화의 진부한 구도는 <더 리더>에서 뒤집혀서 나타난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성숙한 여인을 만나서 '사랑'에 눈을 뜬다는 식으로 영화를 요약하는 건 너무 단순하다.

▲ 애욕으로 시작한 에로스의 연인은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시각적인 차이에서 발생하는 혼란이 여기에 드리워져 있다. 먼저, 영화에서 그려지는 마이클과 한나의 관계는 고전적인 로맨스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애정이라기보다 애욕(lust)에 가깝다. 마이클의 '순수성'은 한나의 욕망을 날것 그대로 인준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마이클이 한나의 집으로 다시 찾아갔을 때, 한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그를 안으면서 "네가 원했던 게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관계는 이렇게 아무런 장애나 금지 없이 욕망의 질주를 감행한다.

처음에 애욕으로 출발한 에로스의 연인은 점차 다른 차원을 획득하기 시작한다. 한나가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이 관계는 다른 방식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전은 완벽한 지적인 결합을 전제한 낭만주의적 이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나는 글을 모르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게 이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건 대체로 중산층 여성과 노동계급 남성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을 다루는 영화에서 전자가 후자에 비해 훨씬 금지를 많이 가진 존재로 그려지는 것과 반대의 설정이 <더 리더>에서 보인다는 점이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하고 육체적 노동이라는 '직접성'을 체현한 존재이지만 '야성'이나 '자연'에 더 가까운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나는 문자의 인공성을 동경하는 '욕망의 존재'이다. 문자의 계몽을 거치지 않은 노동자는 중산층보다 더 자유롭지 못하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숨어 있다. 이런 주제의식은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한나가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간수로 자원해서 가는 설정에서 강렬하게 드러난다. 물론 영화는 한나의 선택을 비난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다만 담담하게 어떻게 한나의 운명이 역사적 필연성과 조우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한나가 자신의 문맹을 밝히지 않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마이클에게 숨긴 것은 수치심 때문이다. 마이클이 한나의 문맹을 알고도 그에게 유리한 양심적인 증언을 해주지 않은 것도 수치심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모종의 복수심도 여기에 드리워져 있었겠지만, 법대 세미나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나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사적인 관계를 밝힌다는 것은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그 여인이 역사적 죄인으로 호명당해서 법정에 앉아 있는 경우라면 상황은 더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마이클은 수치심 때문에 한나를 법정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한나와의 달리 그의 수치심은 자기 보전의 욕망 차원에 머물러 있다.

달드리 감독은 단순하게 기구한 연인의 운명을 다루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 같다. 어차피 원작이 있는 영화는 감독의 취사선택을 필수적인 것으로 봐야할 텐데,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원작이 있어서 도리어 방해를 받는 측면도 있겠지만, 원작과 비교해보면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 영화는 개인의 운명을 넘어서서, 자유주의적 도덕에서 중요하게 제기하는 양심의 문제를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것처럼 수치심의 문제이다.

한나가 나치에 대한 부역 사실을 시인하고 자신이 모든 혐의를 덮어쓰는 이유는 오직 자신의 문맹을 감추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이 욕망은 수치심을 통해 추동 받는다. 한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죄를 범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처럼 한나에 대한 유죄 판결은 전후 독일 사회의 '정의'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다. 한나를 희생양 삼아서 전후 독일 사회는 나치즘과 공모한 역사적 경험을 과거 속에 봉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한나의 수치심과 마이클의 수치심은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나의 수치심이 책임과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었다면, 마이클의 수치심은 자기 보전의 욕망에 지나지 않다. 마이클에게 부족했던 건 자신의 수치심을 직시할 용기였던 셈이다.

주제의식만을 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노동계급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노동계급이 역사적 실수를 범했다고 해도, 그리고 그들이 지금 이기적이고 깨어있지 않다고 해도, 이들의 선택은 최종적으로 '순수할 것'이라는 전망이 영화 속에 드리워져 있다. 물론 이 순수성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것'이라고 달드리는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 자신의 수치심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노동계급의 '유물론적 속성'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과 한나의 정사는 그래서 결코 로맨틱하지도 에로틱하지도 않다. 마이클이 지켜보는 와중에 수영하던 한나가,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파니처럼 물 위로 솟구쳤을 때, 그 모습은 '원조교제'도 서슴지 않는 '노동계급의 육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랑에 빠진 마이클은 한나를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사실에서 마이클은 중산층 특유의 소유욕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내 것'이니까 지켜줘야 한다는 의식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그를 '꼬마'라고 부르는 한나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성숙한 여인은 결코 그의 소유물로 머물러 있을 존재일 수 없다. 이 지점에서 한나는 마이클의 팜므 파탈로서 정체를 드러내지만, 다른 애정영화와 다르게 <더 리더>는 사랑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더 리더>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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