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의 영화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세계를 향해 제기된 연방의 모델인 소비에트와 영원의 러시아 간의 충돌을 겪었다. 1940년대 이래로 구소련의 영화들은 애국주의적 테마로 영원의 러시아를 찬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하일 롬의 <러시아식 질문>은 이를 우회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러시아인의 시선으로 냉전시기의 미국을 바라보는 작품으로, 미국 저널리스트 해리가 겪는 곤경을 다룬다. 그는 러시아를 방문하고 나서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러시아에서 경험한 일들을 근거로 러시아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당시 평범한 미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이 '부인을 공유한다'고 생각할 만큼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지하고 편협했기 때문이다. 신문사의 편집장 또한 그의 기획을 흥미롭게 받아들이지만 그가 해리의 책이 러시아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돈을 벌려고 진실을 숨겨야 할지 해리는 고민에 빠진다.
▲ 미하일 롬 감독의 <러시아식 질문> 중 한 장면. |
영화의 첫 장면은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의 화려한 마천루, 소비사회의 풍요로운 이미지들에 이어 미국사회의 이면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빈곤한 풍경들, 거리에서의 경찰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화면이다. 이는 러시아인들이 할리우드 영화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미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작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효과다. 미국사회에 대한 러시아식 질문은 반대로 당시 구소련에 대한 바깥의 시선이라는 부메랑 효과를 불러온다. 동일한 진실, 즉 당시 구소련의 현실을 제대로 영화가 보여줄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1953년의 스탈린의 죽음과 1956년의 후르시쵸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에 이르러서야 온전하게 제기될 수 있었다.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학이 난다>(1957)와 더불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1962)이 나온 1960년대는 실로, 러시아 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학이 난다>와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런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제에서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게오르기 다넬리야의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1963)이다. 이 영화는 해빙기의 러시아에서 나온 가장 감미롭고 아름다운 작품 중의 하나다. 모스크바의 평범한 젊은이들의 일상을 그린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젊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든 이도 젊고, 영화의 스타일 또한 발랄하고 활기차다. <위선의 태양>, <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유명한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로프가 젊은 주인공 콜랴 역을 맡아 열연을 보여준다. 그는 광산 노동자로 우연히 시베리아에서 온 볼로야에게 모스크바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콜랴는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는 알레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데, 작가가 되려는 볼로야가 그녀에게 애정을 드러내면서 내심 초조해 한다. 한편 콜랴는 결혼 때문에 입영을 연기하려는 친구 사샤를 도와주려 한다.
▲ 해빙기 러시아에서 나온 가장 감미롭고 '젊은' 작품,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에서는 <위선의 태양>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이 주인공 콜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기도 했다. |
대략적인 줄거리는 사실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영화의 주된 사건이 극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며, 산발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릭 로메르, 혹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처럼 인물들은 모스크바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데, 그들이 보고 경험하는 일들이 사건으로 구성되어 일종의 '발라드 형식' 혹은 '산책 형식'을 이룬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한 남자는 공항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추듯 걷는 한 여인에게 매료되어 '뭐가 그렇게 행복하나요'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마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젊은이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듯하다. 영화가 끝날 때 탄식이 절로 나올 만큼 탁월한 걸작이다.
또 다른 사례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라리사 셰피트코의 <고양>이란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와 파라쟈노프의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비견할 만한 이 작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벨로루시를 배경으로 독일군에 대항하는 소비에트 빨치산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명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이들은 마을에 보급투쟁을 나섰다가 독일군에게 포획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한다. 대독협력자인 러시아인 고문기술자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이들은 배신을 강요당한다. 배신과 명예, 생존과 희생 사이에서 갈등을 벌이던 이들은 각자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한 명은 영웅적이고 종교적인 희생을 선택하지만 다른 이는 살아남으려 불가피한 배신을 한다.
▲ 라리사 세피트코 감독의 <고양>은 인간의 죄를 대속한 예수의 알레고리와 함께 정치적 알레고리를 품고 있다. |
물론, 60년대 이후 러시아 영화의 최고의 수확은 단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일 것이다. 러시아국립영화학교 최우수 졸업 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소년병의 이야기를 그린 <이반의 어린 시절>, 성화상 작가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이야기를 그린 <안드레이 류블로프>, 미지의 혹성에서 과거의 기억과 만나는 철학적인 SF영화인 <솔라리스>, 문명의 위기와 정신성의 문제를 표현한 <스토커>와 같은 작품이 이번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다. 그의 출현은 사실 러시아 영화계뿐만 아니라 세계영화사의 전환의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그는 오손 웰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이 영화의 신세계를 창조하던 1950년대에 홀연 등장했다. 이제 막 알랭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 시간을 정복하던 때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레네와 더불어 영화가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탐색하는 가장 탁월한 매체임을 보여주었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초기작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추구해온 '유년시절'이라는 테마가 압축적으로 제시돼 있는 영화다. |
비교적 잘 알려진 중-후기작 대신에 초기작 두 편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다. <이반의 어린 시절>과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은 아이의 시선을 빌어 그의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지향을 분명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에서 아스팔트를 깔고 있는 노동자에게 아이가 순진하게 열심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에는 노동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 혹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접촉이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일관된 테마가 압축되어 있다. 그는 거리의 삶과 예술을 연결하면서 예술의 진지함과 책임을 근본적으로 사유했다. 여기에는 또한 그의 일생의 테마인 '유년기의 테마'가 담겨 있다. <이반의 어린시절>은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아동영화와 전쟁영화의 외관을 띠고 있지만 그가 추구한 '시적인 영화'라는 스타일적인 실험을 이뤄낸 작품이다. 이 영화가 196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는 이탈리아 공산당으로부터 '쁘띠 부르주아적인 영화'로 비판을 받았다. 러시아에서도 이 영화가 전통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을 보여준다며 격심한 찬반양론에 휘말린다. 역설적으로 당시 장 폴 사르트르가 이 영화를 '사회주의적인 초현실주의의 걸작'이라 변호했다. 그는 이 영화가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중의 한 편이라 말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일종의 '정신적 로드무비'에 가깝다. 무엇보다 내면에의 여행을 다룬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는데(<솔라리스>에서는 심지어 우주 저편의 세계를 여행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 도달해도 찾고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이다. 이러한 영혼의 탐색에서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다. 그는 현대인이 신념이 부족하고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보았다.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의 발전이 영적인 모든 흔적을 파괴하고 있는 것에 위기에 본질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삶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 영적인 본질을 재확인하는 것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다.
생애 8편의 영화를 남겼을 뿐이지만 그의 영화적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겼다. 평론가인 제임스 콴트가 지적하듯이 그의 영화를 모방한 이들은 이후에 많았다. 물, 배회하는 개, 문명의 폐허, 황폐한 풍경, 구원의 제스처, 롱 테이크, 퇴색되고 탈색된 컬러 등이 카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영혼이 가득한 시심, 신비로운 움직임, 탐구와 고투의 감각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하고, 이상하고, 강력해서 설명 불가능한 아름다움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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