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합리성의 언어적 구조와 한계
합리적이란 이치에 맞는다는 뜻의 서양말 형용사를 번역한 한자말이다. 이 명사형은 영어로 reason이고, 우리말로 말하자면 이치, 이성, 이법, 이유 등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합리적과 운을 맞춰서 명사형을 만들자면 합리성이 되고, 굳이 한자어 뜻을 푼다면 이치에 맞는 성질이라는 뜻이다. 두 음절이나 세 음절로 한 단어를 구성하는 관행이 서세동점기 이후에 생겼을 뿐이지, 이(理)라는 개념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전통사회에도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이치가 무엇인지는 서양에서든 동양에서든, 옛날부터 지금까지 철학자들 사이에 수많은 갈래의 논쟁이 벌어지는 영역이지 합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아니다.
대북정책의 예를 가지고 합리성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북한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 하나다. 미국 CIA의 2008년도 추계에 따르면, 구매력 기준 일인당 소득으로 전체 229개 나라 중 192위에 위치한다 (남한은 52위). 주민들이 이런 실정임에도 북한 정권은 여전히 "강성대국"을 꿈꾸면서 권력을 3대째 세습할 요량인 것으로 관측된다. 국가 차원에서 마약 밀매나 달러 위조를 시도했다는 혐의를 받은 적도 있고, 미국과 협상을 원한다는 신호로 인공위성(기술적으로 미사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을 발사하겠다는 정권이다.
이런 체제를 자체로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무슨 일을 해야 합리적인가? 무력 침공과 같은 극단적인 길을 합리적이라고 볼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결국 고려할 만한 길은 크게 두 갈래뿐이다. 압박과 봉쇄를 통해서 북한 정권이 무너지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정권이 중간에 아무리 가로채더라도 인민을 위한 지원을 계속할 것인가? 후자의 노선은 식량, 의약품, 비료 등 필수품은 직접 지원하는 동시에, 공단 설립이나 기술 이전을 통해서 북한의 산업생산력을 높이도록 지원함으로써, 인민에게 자유사회와 접촉할 통로를 서서히 열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 현재와 같은 폐쇄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얘기다.
반면에 전자는 모든 지원을 명확한 조건을 걸어서 이행한 만큼 급부로 제공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물론 조건이란 핵시설 폐기, 북한 사회 내부 사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사찰 허용 등을 의미한다. 예컨대 식량을 지원한다면, 그것이 군대로 가지 않고 일반 인민에게 돌아가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도 조건에 들어갈 수 있다. 가능한 한 국내 실태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동시에 외부 세계의 사정을 인민에게 알려주지 않으려는 북한 정권에게는 실질적으로 대단한 양보에 해당한다. 이런 부류의 권력일수록 위신을 중요시한다는 각도에서 바라보면, 이와 같은 조건부 지원이란 곧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와 같다.
실제 정책은 지원 일변도일 수도 없고 봉쇄 일변도일 수도 없기 때문에 양자를 적절하게 배합하게 되겠지만, 일단 논의의 편의를 위해 지원 아니면 봉쇄를 택해야 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어떤 길이 합리적일지를 자문해보자.
▲ 압박과 봉쇄를 통해서 북한 정권이 무너지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정권이 중간에 아무리 가로채더라도 인민을 위한 지원을 계속할 것인가? ⓒ연합뉴스 |
이런 경우 어떤 길이 합리적인지는 전형적으로 각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통일 또는 국지전 같은 급격한 정치변화를 바라지 않고,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되는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원정책이 합리적이라고 볼 것이다. 한반도 정세가 안정되면 남한 시장의 대외 신인도도 높아지므로 투자여건이 호전된다는 이익도 있다. 반면에 북한 정권의 붕괴가 시간문제라고 보고, 붕괴가 빠를수록 좋다고 보는 사람이라면 봉쇄정책을 합리적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예컨대 1946년 이전에 가지고 있던 토지소유권을 하루라도 빨리 되찾으려는 사람들, 또는 한국전쟁 등 숱한 좌우의 폭력대결에서 당한 만큼을 복수해 주려는 사람들은 봉쇄정책 말고 다른 대안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합리성이란 이처럼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합리성의 기준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줄 것 같은 산수의 경우에도, 목표가 정해졌다는 전제를 제거하면 합리성이 통일되지 못한다. 합리성과 관련해서, 2 더하기 2는 얼마인지 물어본다면 당연히 4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2 더하기 2를 묻는다면 4라고 대답할 사람도 있고, 대답하지 않고 그냥 갈 사람도 있으며, 화를 낼 사람도 있을 테고, 5나 3같은 오답을 일부러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충분히 많은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질문을 잘못 들어서 오답을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말 산수를 못해서 오답을 말할 사람도 나올지 모른다.
만약 목표가 2 더하기 2라는 산수 문제에 정답을 구하는 데에 있다면 4라고 답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바쁜 일로 서둘러야 하는 행인을 가로막고 그처럼 간단한 질문을 했을 때, "귀찮게 하지 말라"는 항의의 표시로 엉뚱한 답을 말하는 행동이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반응이 나름대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행동을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합리성"의 서로 다른 용례가 부딪칠 때, 그 차이를 없애고 용례를 통일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은 없다.
합리성에 의해 정치사회의 문제가 잘 풀리고, 정치사회의 갈등이나 분쟁이 좀더 쉽게 해소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은 산수문제의 정답을 찾는 맥락에서 나타나는 합리성을 준거로 삼고 있다. 이 관점에서는 합리성이라는 것이 행위자들의 기질, 가치, 목적, 성격, 심사(心思), 관계 등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규정되고, 그만큼 주어진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는 과정이 정치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합리성은 가장 기초적인 만큼 가장 단순한 종류일 뿐이지, 인간의 행동 전체는 고사하고 인간의 행동 중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합 전체조차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예시했듯이 행위자가 어떤 목적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합리성은 산수 문제의 정답구하기에 적용되는 부류의 합리성과는 완연히 종류가 다르다. 산수 문제의 경우 합리성이란 누가 답하느냐에 상관이 없이 확정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지만, 어떤 목적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합리성은 행위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북정책을 지원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봉쇄로 해야 할지와 관련되는 합리성도 목적에 따라서 달라지는 종류의 합리성이다.
한국의 교과서에서 합리성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분으로 막스 베버의 것이 유명하다. 베버는 합리성을 합목적이성(Zweckrationalität) 합가치이성(Wertrationalität)으로 구분해서 생각했다. 합목적이성이란 목적이 주어졌다고 할 때, 그 목적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달성할 수단을 찾아내는 이성으로서 흔히 도구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합가치이성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가지는 행동으로써 표현되는 합리성인데,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과 같은 것을 합리성의 영역에 포섭해서 이해하려고 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베버의 구분은 두 가지 점에서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궁극적인 의미, 다른 말로 하면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관대, 그것이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느냐는 문제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절대적 가치"가 표현된 사례에 가장 가까운 후보로는 어떤 명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행위가 있을 것이다. 예수, 소크라테스, 온갖 종파에서 기념하는 수많은 순교자들, 그리고 전쟁영웅들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목록을 이어나가다 보면 정치적인 이유로 목숨을 바쳐야 했던 혁명가들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목숨까지 걸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박해를 받아서 죽임을 당한 후 "열사"로 불리는 사람들도 있고, 개인적인 결단으로 분신자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미가제처럼 명령에 복종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고,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죽을 때까지 세상과 자신을 기만한 불쌍한 영혼까지 만나게 된다.
이 사례들이 모두 궁극적인 의미와 절대적인 가치를 표상하는 것일까?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가미가제 특공대와 같은 사례에서 뭔가 비상한 전율을 느끼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의 사례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제5부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안중근이나 윤봉길의 경우도 민족주의 중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범주로 편입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인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순교 또는 헌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들 중에 절대적인 가치를 표상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면, 표상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는 경우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아주 까다롭고 곤란한 문제가 남아버린다. 결국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정면에서 대답하지 않는 한,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에 기대어 슬그머니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베버도 칸트도, 사실 그밖에 어떤 철학자나 현자도 "절대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인간적으로 이해가능한 언어로 해명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 나름대로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서 일생 동안 경이로울 정도로 극기와 희생의 역량을 발휘한 사례들은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들이 똑같은 가치를 추구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서로 만났더라면 입장이 서로 부딪쳤을지조차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모르겠으니까 혹시 아는 사람이 있거든 가르쳐달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은, 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과 관련해서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설정하고 추구할 수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관통해서 "절대적"이라고 여겨져야 할 어떤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사자들에게 물어본 다음에나 가타부타 얘기할 수 있으리라는 데까지다. 이는 곧 이 근처에 "절대적인 가치" 비슷한 것이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이 합리성에 의해서 계산된다고 말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뜻과 같다. 왜냐하면 당사자에게 물어본 다음에나 가타부타 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곧 각 개인의 기질이나 심사, 가치나 목적 등이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말이므로, 선택이나 결단과 같은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는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기 때문이다. 의지의 영역이라고 해서 계산이 반드시 배제되어야 할 필요는 물론 없다. 그러나 합리성이라는 말을 의지나 성정과 융합되는 권능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반드시 합리성이라고 불러야 할 필요가 없다는 셈과 같다. 그러므로 베버가 말하는 합가치이성이란 가치라는 말과 합리성이라는 말을 단순히 자구상으로만 합해놓은 데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합목적이성을 베버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어떤 때는 주어진 목적을 위해 최선의 수단을 구하는 권능을 가리키고, 다른 때는 절대적이지 않은 상대적인 가치들 사이에서 더 우월한 가치를 찾아내는 권능을 가리키기도 한다.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의미인 것 같지만, 다음과 같은 예를 생각해보면 베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데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 것인가? 시간이 가장 귀중한 사람이라면 비행기를 이용할 것이고, 시간이나 비용에 제약은 없고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걸어가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는 형태의 여행이 바람직할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에 간다는 목표 이외에, 시간을 중시할 것인가 경험을 중시할 것인가에 관한 답이 상황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보면, 이는 주어진 목적에 최선의 수단을 구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시간을 중시할 것인가 경험을 중시할 것인가를 행위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고 보면 이는 상대적 가치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구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같은 상황을 다르게 서술하는 데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고려를 종합하면 합리성에 관해서 베버가 구분한 방식보다 약간이나마 선명한 형태의 개념적 지도를 하나 얻어낼 수 있다.
<그림1> 합리성의 구조와 한계
산술적 합리성이란 명확한 정답이 가능한 단순명쾌한 수학문제를 풀 수 있는 합리성을 뜻한다. 추론의 합리성이란 목표가 주어지고, 목표를 달성하는 대안들이 비교적 상호 비교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보일 때, 그 중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는 수단을 찾는 합리성을 말한다. 선택의 합리성이란 현재와 같은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해야 할 정책 수단을 찾는 것처럼,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층구조의 장애물들을 뚫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가면서 진로를 개척하는 합리성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의지와 결단은 합리적 계산을 다한 다음에도 남는 불확실한 대목에 관해서 "천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결단을 가리킨다.
우선 이 네 부류의 합리성 각각은 다분히 서로 겹쳐지면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점진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 가운데에는 이 네 부류에 속하지 않는 영역, 즉 어떻게 보더라도 비합리적 또는 불합리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단히 많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합리성 및 의지와 결단을 합리성의 영역에 포섭해야 하는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의 두 층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일층위의 합리성이란 기본적으로 산술적 합리성이 가지고 있는 성격 중 일부를 연장하고 일부를 제거한 결과이다. 위 그림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추론의 합리성을 지나 선택의 합리성 쪽으로 이동할수록 중립적 객관적 보편성이라는 성격이 쇠퇴하고,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서 합리성의 내용도 또한 상당히 달라지는 의미가 진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계산이라는 권능에 의해서 선택이 인도된다는 의미가 남아 있는 한, 제일층위의 합리성에 속한다. 이는 산술적, 평면적, 과학적 합리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제이층위의 합리성은 의지와 결단의 경우를 합리성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이는 계산만으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독특한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과 같은 것을 일종의 합리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인간의 이기심을 무작정 탓해서는 결코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깨달음, 불확실한 상황에서 공포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어떻게든 먹구름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보는 것이 최선이라는 깨달음, 남들의 행동이 내 맘에 안 들 때마다 흥분해서 설쳐대면서 비난하기보다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참고 견디는 편이 성숙한 사람의 자세라는 깨달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는 성찰적, 입체적,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은 하되 그들의 권리를 관인하는 태도, 내 주장을 관철하는 것보다 반대 의견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개명된 사회를 위해 더욱 중요하다는 태도도 제일층위에서 보면 합리성에 포함될 수 없지만 제이층위에서 바라보면 가장 필수적인 합리성의 요소가 된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깨달음, 따라서 서로 다른 합리성끼리 경쟁이 벌어질 때에는 경쟁의 당사자에 해당하는 합리성이 심판노릇을 할 수 없다는 깨달음, 그런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제일층위의 합리성에 집착할 일이 아니라 제이층위에서 타이브레이크의 규칙을 정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성찰적, 입체적, 정치적 합리성에 해당한다. 이 층위의 합리성이 정치가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까닭이다. 나아가 정치사회 안에 널리 분포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도 제일층위의 합리성보다는 제이층위의 합리성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결코 산술적 논리적 추론만으로 직접 도출되는 결론은 아니다. 단,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일반적인 언어의 의미에 따라 개명이라고는 부를 수가 있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복수심이나 허영심에서 나오는 의지나 결단은 비합리 또는 불합리라고 분류해야 하지만, 불확실성 안에서 결단해야만 할 시점임을 절제된 상태에서 확인하고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내리는 결단은 분명히 개명된 자세를 포함하는 만큼 합리성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이를 나는 제이층위의 합리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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