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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촛불 공포', 민주당의 '정동영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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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촛불 공포', 민주당의 '정동영 공포'

[박동천의 집중탐구]<22>둘째 매듭

제6장 둘째 매듭

지금까지 제2부에서 나는 "지역주의"를 성토하는 담론이 기본적으로 마녀사냥 담론이라고 주장했다. 주장의 구조가 약간 복잡하고, 또 중간에 다른 가지들로 여러 번 뻗어나갔기 때문에 여기에 골자와 함의를 요약해본다.

두 사람이 있다고 치자. 굳이 따지자면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는 않다. 그래도 대충 참고 반감을 폭발시키지 않고 살아간다. 이때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면서 "숨은 의도"를 파고들어 반감을 발굴하고,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는 것이 문제"라고 30년 동안 떠들어댄다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없던 반감도 생겨날 것이다. "지역주의가 문제"라고 떠들어대는 소리는 바로 이런 종류의 어리석음에 해당한다.

이를 밝히기 위해 우선 나는 흔히 사람들이 지역주의 또는 지역감정 등으로 부르는 것이 가짜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 문구가 도대체 무엇을 겨냥하는지가 전혀 불분명하고 너무나 엉성해서 어떤 구체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현실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역방향에서부터 출발해서 과연 어떤 상태라면 지역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것인지를 따져 봐도 아무런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이것이 가짜문제임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이다.

지역주의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프레임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나타난 80% 내지 한때 97%까지 올라간 몰표 현상 때문에 한국사회에 유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몰표 현상은 '85년 국회의원 선거와 '87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시작된 일로,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극 때문임이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다. 그 때문에 전라도 유권자들은 군사정권 및 그 후예에 대해 아주 강한 경계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경상도의 몰표는 1971년에도 어느 정도 나타난 적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전라도의 몰표에 대한 반사작용이라고만 단정하기가 현 상태에서는 어렵다. 하지만 현재 특정 정당에 대한 거부감이 80% 이상의 유권자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것을 보면, 전라도 몰표에 대한 반사작용이라는 의미가 상당히 섞여 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몰표 현상을 이렇게 상식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특별히 탓할 문제도 아니고 이 때문에 무슨 피해가 발생할 까닭도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의 선택이 저렇게 나타나고 있는 만큼 인위적인 조치로써 사람들의 선호를 바꿀 방법도 없고, 당장 바꾸지 않는다고 어떤 폐해가 발생할 여지도 없다. 지난 20여년 동안 지독한 수준의 투표 편차가 나타났지만, 그 때문에 무슨 탈이 났다고 할 일은 사실 전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일은 단지 시간이 해결할 일이고, 왈가왈부 거론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두 지역 사이에 상호 반감 또는 경계심이 상당한 수준으로 분포하리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직접 꾸짖어서 해소될 리는 전혀 없다.

지역간에 반감의 수준이 어느 정도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중앙정부의 권력이 정의나 공평성 등, 모든 분파적인 경계를 초월하는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 행사된다는 믿음이 생기도록 노력하는 데에 있다. 정책에 관한 담론이 지역과는 상관없는 정의와 공정을 프레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빠른 길일 뿐 아니라, 사실 지역간 반감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물론 중앙정부의 정의나 공정성이 아무리 확고하게 자리를 잡더라도, 지역간 반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나타나고 있는 투표성향의 차이만을 가지고 그처럼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무작정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지는 고질적인 제노포비아(xenophobia)를 추론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다.

우리사회에서 "지역주의"를 성토하는 담론이 유행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차이를 관인(寬忍)하지 못하는 단결 이데올로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뻔한 일을 복잡한 도식으로 설명해야 좀더 학문적인 것처럼 여기는 지식인들의 현학 취미이다.

지식인이든 일반 유권자든,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나 행동이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표준과 다를 때 관인하기보다는 뭔가 잘못이라고 여기는 심성은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자주 나타난다. "이런 언어-게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곳에서 설명을 찾는 것이 우리의 잘못이다"(『철학탐구』, §654), 일상어로 풀면 설명하기 전에 이해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충고가 딱 들어맞는 지점이다. 이해한 후에 추가로 설명이 필요하다고 확인된 다음에나 설명을 시도하라는 얘기다. 우리사회 지식인 사이에는 정반대로 유권자들의 선호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대목에서 오히려 "문제"를 발견하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쉽게 설명되는 대목에서 자꾸만 더 깊은 (따라서 모호한) 이유를 찾아나서는 경향이 팽배하다.

차이를 관인하지 못하는 태도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정서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생소한 대상이나 관념을 만나면 익숙한 대상이나 관념을 만났을 때에 비해 좀더 긴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을 모두 나쁘게만 여기고 피한다면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제노포비아다.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진영에 속한 사람이라도, 오늘날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복고주의자는 별로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진영에서 오히려 더욱 심한 제노포비아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노포비아라고 하면 우선 외국, 외국인, 외국문화 등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한국 사회에 이런 차원의 제노포비아가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최근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상당히 자주 지적되어 와서, 이제는 이를 자각하고 반성하려는 시민의 수도 과거보다는 확실히 늘어나는 추세이다. 물론 이 차원의 제노포비아 역시 내가 보기에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해소되기에는 장차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이 연재를 통해서 내가 지적하려는 제노포비아는 이와 다른 차원이다. 생소한 생각,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미지의 영역이나 불확실성 자체를 수용하지 못하고 한사코 거부하려는 태도를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이 연재의 초점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의 고정관념 네 가지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곧 미지의 영역을 두려워한다는 말과 같다. 지금까지 제2부에서 나는 "지역주의"나 "지역감정"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면서 개탄해 마지 않는 현상이라는 것이, 사실은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생산적인 일반적인 주제에 초점을 모으다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질 일이라고 주장했다. "지역주의가 문제"라고만 보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와 같은 내 제안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지도 모르겠다 - 어떻게 문제를 그냥 둔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처럼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상태에서 빠져나와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이유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특히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렸다고 흔히 운위되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를 냉정하게 살펴보기 바란다. 나는 전체적으로 좋아졌지 나빠졌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나빠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전체적으로 좋아졌다고 보는 사람이라도, 지역주의가 아니었다면 더 좋아졌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이 지역주의 때문에 잘못 되었는지를 꼬집어서 말하는 경우는 나는 보지 못했다.

광주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 또는 여기저기서 실증적인 증거를 갖춰서 제기되는 차별적인 시책들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의 최대치다. 하지만 폭력과 차별은 지역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보편적인 문제다. 호남이 폭행을 당하고 호남이 차별을 받아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폭행과 차별이 문제인 것이다. 부산이나 대구, 정선이나 백령도에서도 무고한 시민이 폭행을 당하거나 차별을 받으면 문제로 인식하고 정의를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지역주의라고 보는 것은 지리적 경계를 벗어나는 어떤 범주도 지각하지 못하는 자폐증일 뿐이다.

"지역주의"란 한국정치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만들을 뭉뚱그려서 언어의 표피에다가 버무려 버린 마녀사냥이다. 있지도 않은 마녀에게 문제의 원인을 아무리 뒤집어 씌워 봤자 일시적인 분풀이는 될지 몰라도, 문제는 계속 반복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많은 지식인들이 이와 같은 마녀사냥에 동참함으로써, 풀어야 할 진짜문제들이 체계적으로 은폐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진보진영이 진짜문제를 발굴해내지 못하고, 오래 되었거나 너무나 모호하고 추상적이라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없는 구호들에 매달리게 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입구와 출구가 모호한 용어는 가짜문제이기가 쉽다. "지역주의"라는 용어는 입구 즉, 겨냥하는 과녁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고, 출구 즉, 해소된 상태가 어떤 상태일지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문제의식 중에는 이것 말고도 가짜가 여럿 있다. 그 모두가 새로운 발상이나 시각 자체를 두려워하는 제노포비아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제3부에서 다룰 합리주의와 제4부에서 다룰 선험주의도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미지의 세계, 불확실성의 영역을 마냥 두려워하기만 하는 불안감과 공포의 반영이다.

공포가 발생하는 경우는 두 가지, 상대 때문이거나 아니면 나 때문이다. 상대 때문에 공포가 발생한다는 말은, 첫째 상대의 힘이 나보다 워낙 세서 불가항력이고 둘째 상대가 나를 해칠 의사를 가진다는 것이다. 상대와 막상 붙었을 때 내 편에도 기회가 있다면 공포에 떨기보다는 싸움에 대비하는 편이 훨씬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상대가 정말로 불가항력이더라도 나를 반드시 해칠 마음은 아니라면 또한 그 틈새를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런 모든 기회나 틈새가 완전히 봉쇄되어서, 그리고 도망칠 길도 없어서,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면 공포가 엄습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공포는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다. 상대가 불가항력인지 아닌지부터가 사실은 정말 사생결단으로 한판 붙어보기 전에는 잘 모르는 일이다. 즉, 붙어보기도 전에 불가항력이라고 느낀다는 것은 상대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내 편에서 먼저 자포자기했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회에는 붙어보기도 전에 어렵다고 지레 걱정부터 하면서 겁을 내는 경향이 크게 번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몇 가지 사례를 후견지명(後見之明, hindsight)의 평면적인 관점에서 한번 바라보자.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성에 관해 2008년에 우리 사회에서 많은 구성원들이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미국 소고기가 수입되면 10년 안에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라는 수준 이하의 괴담마저 번졌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겁을 낸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전국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촛불이 켜졌지만, 결국은 몇 달 후 사그라졌다. 나는 촛불이 저절로 사그라졌다고 보며, 그러므로 촛불은 실질적 의제를 담고 있었다기보다는 만들어진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이었다고 본다. 즉, 불명확한 대상에 대한 공포가 주된 동력이었는데, 정부에 대한 분풀이로써 대리 보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가라앉았다고 본다. 물론 불만과 불안과 좌절과 원한의 앙금은 잠복상태다. 이에 관해서는 물론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겠지만, 실질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제3부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정부가 이 때문에 느낀 공포와 대조하기 위해서다.
▲ 촛불은 일단 꺼졌지만 집권세력,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촛불은 일단 꺼졌지만 집권세력,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찰력으로써 촛불을 진압했다고 보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집회와 시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고 국회를 압박해서 이른바 "입법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위에서 어떤 암시가 있었는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2008년 10월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이 재판에 관여하게 된 것도 다시는 촛불이 다시 타오르지 않게 만들려는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제2의 촛불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용산참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도 짜맞추기에 가까웠고, 그 점을 항의하는 촛불 시위도 원천봉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다보니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관한 의제가 점점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두 가지 공포가 작용했다.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공포와 시민의 저항에 대한 공포다. 두 가지 공포 모두 제노포비아, 즉 새로운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우선시하기보다 겁부터 집어 먹고 그냥 거부함으로써 일축하려는 유치한 무별주의적 태도를 담고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말한 애통의 5단계 즉,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 가운데 부인(否認)에 해당하는 태도이다. 하지만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시민들의 공포는 정부에게 분풀이를 어느 정도 한 다음에는 일단 겉으로나마 진정되었다.

촛불이 불붙었다가 가라앉기까지 전체 과정도 대체로 평화적이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이렇게 수그러든 정부에 대한 반감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지만, 장차 실제로 인간광우병 환자가 발생하기 전까지 이 공포가 다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면에서 발생한 공포가 진정되면서 내면의 일로 끝나고 외부로 전이되지 않은 경우다.

반면에 집권세력을 사로잡은 공포는 끊임없이 외생적 갈등요인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좌우지간 촛불이 꺼졌다는 사실, 한때 일부에서는 "명박타도"라는 구호까지 나왔지만 그 때문에 정권이 물러나는 일 없이 끝났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보다는, "큰 일 날 뻔했다"는 불안감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어난 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일, 즉 "정권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는 우려가 사고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발언 때문에 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발상, 용산의 농성자들이 천만 서울 시민의 안전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었다는 발상,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벌이는 북한정권의 여러 가지 줄다리기를 직접적으로 남한 사회에 대한 공격이나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발상, 일제고사를 시행하고 학교와 지역의 점수 등급을 공개해서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발상, 등등이 모두 이와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행태들이다. 두려움의 근원이 본질적으로 자신감 부족에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자꾸만 외부원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셈이다. 문제가 주어졌을 때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성종양으로 만들어서 전이시키는 꼴이다.

보수 세력에게는 이럴 만한 정치적 이유가 항상 있다. 물론 보수 세력에 속한 사람이라고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기득권 유지만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들이 보기에 세상은 결국 약육강식이고, 인간은 그저 생존본능만을 가진 동물일 뿐이다. 사회의 질적 개선이란 허망한 소리고, 유리한 입장에 있을 때 최대한 챙겨두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따라서 정치사회의 의제를 빙빙 전이시킴으로써 체제의 변화를 늦출 수 있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전혀 불만일 리가 없다.

반면에 진보라는 말을 개인적인 사업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진보세력은 공포와는 담을 쌓아야 한다. 생소한 대상이나 관념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기 전에 상황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우선시해야 하고, 불확실한 대목에서는 위험보다 기회를 찾아야 한다. "지역주의"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마녀사냥은 정확히 정반대로, 정밀한 사태파악보다 두려움을 우선시하고, 불확실한 대목에서 기회보다 위험을 찾은 꼴이다.

현재 정동영 씨의 출마를 둘러싸고 민주당에서 벌어지는 샅바싸움도 전형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벌이는 행태에 해당한다. 정동영 씨가 덕진구에 출마했을 때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개혁성"을 팔면서 다른 선거구에서 점수를 딸 여지가 조금은 줄어드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줄어들지는 당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반면에 정동영 씨에게는 출마하고 싶을 때 출마하는 것이 개인의 권리다. 기어이 민주당에서 출마를 막는다면, 그는 언제든 무소속으로 출마할 권리도 있다. 물론 손익에 관한 저울질은 심각하게 해봐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자기가 판단할 일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출마 여부는 기본적으로 개인적 선택에 맡기는 것이 맞다. 당은 사전에 그의 선택을 놓고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승복할 수 있는 공천의 절차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진인사대천명에 맡겨야 한다. 미지의 영역을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선택이나 의지에 따라 달라지는 사항이 아니고 인간의 기본조건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거취에 대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소모적일 뿐인 말다툼이 계속된다. 일어나지 않은 사태에 대해 비관적으로만 전망을 하면서, 자기의 전망이 틀릴 리가 없다고 고집하는 아집 때문이다.
▲ 정동영 씨의 출마를 둘러싸고 민주당에서 벌어지는 샅바싸움도 전형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벌이는 행태에 해당한다. ⓒ연합뉴스

이런 아집이야말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공포가 자기 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원인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라는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 프레임 중에서도 지독하게 편협한 형태로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밖에 달리 형언할 길이 없다.

한국사회의 여론이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고 착각하면서 언표 차원의 분풀이에 매달리는 행태는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지식인들이 합리성의 본질과 한계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피상적으로 포착된 합리성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주제를 나는 합리주의와 선험주의라는 두 양상으로 나눠서 제3부와 제4부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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