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을 '순교자'로 만들지 마라"(4월 2일자 <조선일보> 칼럼)는 박정훈 <조선일보> 사회정책부장의 논리는 간명했다. 저널리즘의 기본에서 이탈한 <조선일보>가 여전히 1등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를 보여준다. 가하, 프로파간다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그는 광우병 논란 자체를 '가해'와 '피해'의 구도로 설명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김보슬은 가해자, 자신을 피해자란다. 그 간명한 구도 설정을 통해 그는 고발인이 되고, 그의 글은 졸지에 증언록이 됐다. 그의 대담함은 이 뿐만이 아니다. 글에는 배제와 배척의 극단적 이분법이 빽빽하다. 그의 따르면, <PD수첩>과 <조선일보>는 대립했다. <PD수첩>은 광기, 선동, 왜곡의 편에 섰고, <조선일보>는 진실, 보도, 팩트의 편이었다. 그는 <PD수첩>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스스로를 승자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그는 제법 여유를 찾은 듯 보인다. 1년 사이 자리도 옮긴 듯하다. 그는 쇠고기 문제를 담당했던, <조선일보>의 데스크(경제부장)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게임은 결국 판정이 난 것'이다. 하지만 한 때는 '절벽'같았던 상황에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었노라고 고백했다.
근 1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기본적으로 언론 이슈에 사법(司法)의 잣대가 끼어드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 사회성을 갖춘 기자로 돌아왔다. 물론, 아직 마음의 고름은 남아있다. 단, 이번의 경우만은 '예외'로 하잔다. 그는 'MBC와 <PD수첩>'이 '사법적 제재를 자초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곤, 검찰에게 <조선일보>스러운 훈수를 잊지 않는다. '<PD수첩>을 탄압받는 피해자로 만들어 주지 말라'고 했다. 한 마디로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지 말라는 게다.
승리를 만끽하는 그의 간명함에 가타부타 말을 보태고픈 생각은 없다. 그 간명함이 가탕키나 한 것이냐, 혹은 그 간명함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캐자면, 밑도 끝도 없을 테다. 아마, <조선일보>의 실존적 존재 양식부터 읊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주목코자 하는 것은 보무당당한 그의 문장이 아니다. 그 새에 언뜻언뜻 스며있는 '불안'이다. 마음의 고름 말이다. 주눅 든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 곤고함을 위장하기 위한 그의 딱한 글에 안녕을 기원한다.
안쓰럽고 가련한, 어느 젊은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공권력의 만행을 규탄하는 사진이 있다. 사진이 감성적인 매체임을 알고 있는 그는 수용자들이 헷갈릴 것이 우려스럽다. 그의 심사는 간단치 않다. 대중이 우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쩜, 헷갈린 것은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미지가 해석되는 과정은 단순한 인과적 논리가 아닌 복잡한 매트릭스적 과정임을 알면서도 그는 두렵다. 행여나 마음을 들킬까, 서둘러 덮는다. 그녀는 가해자라고 주문을 건다. '신변 스토리가 안타깝고, 흘리는 눈물이 가엾다 해도 그녀가 피해자일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스스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자위한다. 그는 피해자였다. 미래 독자가 될거라고 의심치 않았던 이들이 그의 직장에 쓰레기에 던졌었다. 일부 친북좌파들이나 하던 '안티조선' 운동이 광장의 함성이 되어 광고 불매가 일어났다. 당시 그는 경제부장 이었다. 위태로운 상황을 되돌리기 위한 회사의 노력은 처참한 것이었다. 시위대의 폭력 흔적을 찾아서 사태를 수습해가려 했지만, 날로 끔찍해졌다. '시위대=불법폭력'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할수록, 치욕과 조롱의 수렁에 잠겨갔다.
촛불이 정점을 치닫는 동안, 도무지 반전 될 것 같진 않던 상황을 기어코 뒤엎은 것은 일차적으로 경찰의 노력 덕분이었다. 시민들은 분노하며 낄낄댔지만, 명박산성이라고 하는 기괴한 조형물은 효과적인 심리적 방어선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PD수첩>의 논쟁적인 자막 몇 대목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PD저널리즘이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낮밤 가릴 것 없이 수십 년 동안 한국사회의 의제를 장악해온 <조선일보>가 순식간에 무참히 게토로 전락할 수 있다는 확인은 무참한 일이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낯이 많이 뜨겁긴 하지만 그나마 <PD수첩>을 향해 '사실'의 우위를 말할 건덕지가 발견된 일은.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적대, <PD수첩>에 대한 조선일보의 맹목적 집착은 지루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멈출수도 없고 멈춰지지도 않는다. 의견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적대가 아니다. 사실의 다름에 기초한 적대는 더더욱 아니다. 맞다. 이건, 실존의 전부를 건 생존게임의 양상이다. <PD수첩>에 당한 치욕을 씻어내지 않고선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조선일보>의 본능이다.
난 박정훈 부장과 생각이 다르다. '진실의 게임은 결국 판정이 났다'고 생각치도 않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현재진행형인 박정훈 부장의 소망과는 달리 <조선일보>엔 이미 패배의 기운이 역력하다. <PD수첩>은 <조선일보>에 관심을 두지 않는데, <조선일보>는 <PD수첩>을 할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이 모든 걸 말해준다. <조선일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제강공명과 같은 하늘을 두고 태어난 것을 원망한 주유의 운명을 닮아갈 것이다.
<조선일보>가 '순교자를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결국, 현상의 유지, '패배'를 유예시켜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박 부장의 표현을 빌면, 순교는 '탄압받는 피해자' 즉, '실체적 진실'과 상관없이 당대의 사회적 불의에 의해 희생되는 제물이다. 검찰의 응답이 남았다. <조선일보>의 권능을 유지해줄 것인가? 어쩜, <PD수첩> 수사는 조선일보의 패배를 미리 확정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나저나 조만간 다시,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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