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산산이 부서져갔을 그녀의 삶을 몇 마디 말로 환원해내는 말의 악한이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평가와 반성도 사후적이라면, 부족할 수밖엔 없다. 장자연, 어느 무명 연예인의 죽음. 아니 우리 모두의 천박한 욕망을 대리해서 극한적 마초들의 가파른 탐욕에서 절규하다 끝내 목울대에 맺히는 구토를 참지 못했던 어느 여성의 죽음. 이 보편적 죽음과 마주한 개별적 우리들은 또 얼마나 정확하게 기록하고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장담하지 못하겠다. 자신이 없다. 풍경이 그 자체로 상처로 각인되는 메마른 시간이다. 글이 너무 비감하다고. 맞다. 요새 기분이 통 그렇다.
비감함은 단지 그것 둘, 익히 알려진 리스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드시 역사로 기록돼야 할 한 주였다. 10년 만에 기자가 구속되고, PD가 공권력의 추격에 의해 긴급체포 됐다. 표현의 권리는 퇴행성 언어 장애에 걸릴 지경이고, 지구에서 가장 앞선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갖춘 선도적 미디어 국가라는 위상은 곤두박질했다. 차올랐다고 여겨졌던 보편타당한 권리가 돌이킬 수 없이 깊게 도려진 한 주였다. 정권과 민주주의의 골육상잔 비극은 정점의 도륙에 도달했다. 살생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양심, 종교, 사상, 학문, 예술, 표현의 자유와 같은 정신적 가치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권리가 된다.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체제의 존립을 위한 필수 불가결 기반이다. 따라서 그 밖의 기본권, 예컨대 재산권 같은 것들에 비해 고도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다.
개인적, 주관적 견해가 아니다. 이 정권이 신주단지 받들 듯 하는, 온갖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통용되는 원칙이다. 소위, '정신적 자유의 우월론'이라고 불리는, 미국 법률의 이중성 원칙이다. 즉, 다른 자유보다는 정신적 자유에 우월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제의 가치지향 혹은 완결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배자로서의 권력은 언제나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자유'에 부당한 간섭과 강요를 행하고자 하는 값싼 감상에 젖는다. 또한 권력은 자신만의 특정한 세계관이나 올바름을 강제하며 그렇지 않은 이들을 핍박할 욕망을 갖는다.
그래서 언론은 다양한 층위, 상대적 지위를 갖고, 끊임없이 권력과 불화하며 권력의 변질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기초적 이론, 기본적 원리이다. 그런데, 끝끝내 권력이 언론의 경고와 견제를 무시하고, 통제와 지배의 일방적 회로, 추잡한 욕망에 빠져버린다면. 정권은 어떻게 될까, 뭐부터 할까? 맞다. 우선, 비판적 언론부터 제거한다.
비판적 언론이 제거되면 체제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의 억압이 될 수 있다. 권력이 파시즘으로 변질되는 주객관적 요소가 충족되는 것이다. 노종면 기자를 구속하고, 이춘근 PD를 긴급 체포한 상황은 어떠한가? 정당한 파업에 부당히 간섭하고, 정권에 친화적인 방송만을 강요하고, 정부의 세계관으로 인권위를 강제하려는 상황 말이다. 두렵지만 맞다. 정확하게 파시즘의 징후이다.
민주주의는 언론 자유에 기반 한다. 언론 자유의 핵심은 '자율적 편집권'에서 출발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편집은 조작이고, 개입이고, 의견이다. 다소간의 실수도 있을 수 있고 과장과 오해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신문과 방송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언론으로서 속성은 기본적으로 같다. 자율적 편집권이 억압당하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
단적으로 난, <조선일보> 사설의 대개가 사실을 왜곡하고, 주관적으로 조작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 논설위원들이 긴급체포 되어야 한다고는 상상 조차 하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스스로 언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론으로서 갖아야 하는 기본적 권리는 끝까지 지켜져야 민주주의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변태적 정부다. 오랫동안 살생부의 풍문이 있었다. 때가 오면, 골치 아픈 언론인들을 잡아넣을 거라는 소문이었다. 때가 온 것일까? 우리가 '리스트'에 빠지자 마자, 구전 속의 '데스노트'가 현실이 됐다.
다행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이춘근 PD는 풀려났다. 덕분에(!) 상당 부분을 들어내고, 고쳤다. 가뜩이나 진이 빠지는데, 맥이 풀린다. 영장을 청구할 자신도, 배짱도 없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고를 친단 말인가.
무엇보다 진한 아쉬움은, 48시간 동안 이춘근 PD의 긴급체포를 다뤘던 언론의 비중과 방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다음은 바로 당신이다. 마르틴 니묄로의 시를 빌자면, 나치는 우선 정연주를 숙청했다. 당신은 사장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김연세를 숙청했다. 당신은 엠바고를 지켰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기자, PD을 숙청했다. 당신은 다른 회사 사람이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당신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면,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보도만 가능하도록 강제되는 사회의 문턱에 서있다. 권력의 입장과 정치적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회라면 '무엇이든 스스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다음 주에도 '리스트'는 계속 재밌을 테다. 그 재미 사이로 파업 중인 YTN의 405명의 노종면은, 5명의 긴급체포 대기자들을 지키기 위한 MBC의 사수대는 황량한 역사에 맞서 싸울 것이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계속, 리스트를 관음 하는 재미를 즐길 것인가? 나는 그 '리스트'가 무섭다.
▲ 지난 26일 YTN 사옥 앞에서 열린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가면을 쓴 채 YTN 노종면 노조위원장 석방을 주장했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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