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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이 앞장선 '얼버무리기'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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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이 앞장선 '얼버무리기' 공화국

[박동천의 집중탐구]<18>무별주의의 문제

제3절 무별주의의 문제

영어 단어 obscurantism을 번역할 때 나는 때로는 '얼버무리기'라고도 하고, 때로는 '무별주의'라고도 한다. 그리고 obscurantism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한국에서 나타날 때 얼버무리기라고 부를 때도 있고 무별주의라고 부를 때도 있다. 좀더 일상적인 어감이 필요할 때는 얼버무리기라고 하고, 좀더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때에는 무별주의라고 부른다. 무별주의라는 단어 자체는 한국어사전에 없는데, 내가 만든 말은 아니고 이어령 교수의 저서에 관한 신문기사에서 본 기억을 되살려 차용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러해 전에 어떤 저서(아마 <축소지향의 일본인>이었지 싶다)에 관한 신문기사였다.

이어령 교수가 무별주의라는 말을 obscurantism과 연관을 짓고 사용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별것을 별것 아니라고 넘기는 태도를 그는 무별주의라고 불렀던 것 같다. 따라서 뜻으로는 obscurantism과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어쨌든 나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을 번역하면서, obscurantism을 이렇게 무별주의라 옮기고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았다.

"무별주의(無別主義, obscuratism): 세세히 밝히어 가려내야 할 사안에 관하여 두루뭉수리 얼버무림으로써 쟁점 자체의 표출을 봉쇄하는 태도. 이는 철학적으로 진리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이며, 사회학적으로는 현상의 유지에 공헌한다는 점에서 일부 영한사전에서는 '반계몽주의' 등으로 풀어놓고 있다."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 2006), 91쪽.

지금 2009년 3월 현재 한국사회에는 정치사회적으로 수많은 쟁점들이 있다 - 용산참사, 집시법 위헌 여부, 신영철 대법관의 권력남용과 위증 문제, 인권위 축소, 현인택 통일부장관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비리 문제, 기타 등등. 이런 문제들에 관한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에 이쪽 또는 저쪽으로 결론이 나버리는 사회풍토를 나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칼럼 "거짓말 공화국"을 통해 고발한 바 있다.

시선을 한국현대정치사로 확장하면 은폐의 냄새가 풍기는 사례의 수는 단위가 달라진다. 우리는 아직 김구 암살에 배후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도 모르고 있다. 장준하를 비롯한 수많은 의문사가 있고, 간첩조작사건은 인혁당재건위 사건만이 아니었다. 공화당 창당과정의 4대의혹에서부터 삼성의 검찰에 대한 떡값 의혹까지 정경유착의 의혹은 불거질 때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불신풍조와 위화감만을 증폭시킬 뿐, 단 하나 시원하게 진상이 밝혀진 것이 없다. 심지어 1997년에는 경제부총리가 대통령에게 외환위기 상황을 보고했는지 안 했는지에 관해서조차 관련자들의 증언이 엇갈렸지만 법원은 진상을 명쾌하게 가려내지 못한 채, "정책실패는 처벌할 수 없다"는 얼버무리기로 넘어갔다.

▲ 공화당 창당과정의 4대의혹에서부터 삼성의 검찰에 대한 떡값 의혹까지 정경유착의 의혹은 불거질 때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불신풍조와 위화감만을 증폭시킬 뿐, 단 하나 시원하게 진상이 밝혀진 것이 없다. ⓒ연합뉴스

이런 문제들에 관한 진상발굴의 요구는 당연히 진보적 관심에서 중시하게 되는 아젠다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진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런 문제들을 덮고자 하는 무별주의는 반계몽주의가 되고, 반이성주의가 되며, 정파의 상대적인 스펙트럼에서 보수라는 의미를 지나 사회의 발전 자체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반동과 퇴행의 세력이 된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진보진영 역시 나름대로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관해서는 진상발굴의 노력을 너무나 쉽게 일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지역주의에 관한 무분별한 성토가 바로 그렇다. 뒤에서 비판하게 될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나 "공교육붕괴"에 대한 우려, 또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 따위의 문제의식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방향의 불만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울분을 터뜨려서 일시적으로 분풀이를 할 수 있는 배설구 역할은 약간이나마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회를 바로 그 문제영역과 관련해서 조금이라도 개선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는 그런 구호들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자의식적 되새김질이 진보진영에서 특별히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 같지도 않다. 자파에서 쉽게 써먹을 수 있는 유행성 구호가 공허하지 않은지 보수진영이 자의식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보수의 한 특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진보진영에서도 자체 반성이 문제의식의 심화로 이어지는 정도가 특별히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보나 보수나 진실에 대해서, 특히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차원의 진실에 대해 대단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사법의 현황과 가장 큰 인과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경란의 장편 <혀>가 자신의 신춘문예 응모작 <혀>를 표절한 결과라는 주이란의 제소에 대해, 실체적 진실을 위한 노력을 사실상 전혀 기울이지 않고 조경란의 출석거부를 핑계로 조정결렬 결정을 내린 저작권위원회의 처사를 생각해보라.

두 작품 사이에 명확히 중복된 문장이 없어서, 단지 아이디어만이 유사할 뿐 표절의 물증이랄 게 별로 없으니 본인이 입을 다물면 위원회인들 뭘 밝힐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증언만 청취하더라도, 상당한 정도까지 실체적 진실의 알맹이에 가까이 다가설 수가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조경란이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만큼, 어떻게 해서 자신의 장편 <혀>의 모티브가 구상되었고, 집필되었는지를 기억나는 대로 답변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수 백 페이지짜리 장편을 쓰고서 구상과 집필 과정에 관해 아무 기억도 안 난다면 이상한 일이고, 답변을 거부한다면 곧 자기변호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연재의 제6부에서 우리사회가 진실 발굴을 통해서 갈등을 해소하고 연대의 끈을 강화할 방안을 제안할 것이다. 거기서 나는 영미 사회에서 의회제도와 사법제도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핌으로써, 법치와 대의제 그리고 인민주권 사이의 관계를 해명할 것이다. 조경란과 주이란 사이의 분쟁이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조정기능을 위임받은 공공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지 않다는 사실은 거기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하지만 사법기능이 진상을 명확하게 가려내지 못하는 데에는 사회 전반적인 무별주의의 풍토가 크게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식인들이 쟁점을 좁혀서 말하지 않고 자꾸만 얼버무리려는 경향이 무별주의 사회풍토를 조장하고 영속화한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85년 이후 나타나고 있는 투표편차가 "'80년 광주"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꾸만 더욱 깊은 원인을 거론하려는 경향 역시 전형적인 무별주의에 해당한다. 일례로 패권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를 구분하자는 입장이 있다. 그러니까 경상도의 지역주의는 패권적이고 전라도의 지역주의는 저항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 만약 패권이 있다면 그것이 경상도라는 지정학적 속성과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며, 한국사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또 전라도라는 지정학적 속성과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는가?

전라도의 90% 몰표를 광주학살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과 "저항적 지역주의"라고 보는 관점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비무장 시민의 시위에 대해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잔혹행위를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결국 발포까지 한 데 대한 분개는 정당한 한계를 넘는 국가폭력에 대한 분개로서, 전라도라는 지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는 김주열, 이한열, 박종철, 강경대 등의 사망에 대해 느끼는 분개와 같은 종류이고, 제주도 4·3이나 노근리 등 좌우대립과 전쟁기의 학살에 대해 느끼는 분개와도 같은 종류로 지리적인 경계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W. 부시의 행위, 용산에서 여섯 목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쳐들어간 경찰의 행위, 팔레스타인을 무차별 폭격한 이스라엘의 행위,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를 시도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군대의 행위, 9백만에서 천백만 명으로 어림되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최소 3백만에서 최대 6천만 명까지로 추정되는 스탈린의 학살, 이외에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국가폭력에 분개하는 것은 지정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희생자가 많을수록 더 널리 알려지는 뉴스가 되겠지만, 희생자가 적다고 해서 그 부당함이나 역겨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전라도의 90% 몰표를 지역주의로 본다는 것은 곧 광주학살을 지역문제로 간주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국가권력의 정당한 한계가 어디인가, 법치국가에서 시민들이 반대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얼마나 존중되어야 하는가, 대한민국 정치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들을 초점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경상도 정권이 전라도를 공격했다고 보는 셈이다. 이런 수준의 인식틀에서는 전라도 정권이 경상도를 공격하는 그림이 배제될 수 없고, 따라서 경상도 주민 가운데 개명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도록 막연한 경계심을 잉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패권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라든지, "내부식민지" 따위의 용어는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든지, 결국 쟁점자체를 지역 차원의 문제로 사소하게 만들고 지역을 뛰어넘는 차원의 모든 가치에 대한 감수성을 자라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전라도 주민들 가운데 광주학살을 지역차원에서 바라보고, 심지어 지역적 반감이나 복수심을 맘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아마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의 수가 몇이나 되든, 그런 감정은 분명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경상도 주민 가운데 막연히 전라도 정권을 두려워하는 정서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건강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역주의를 저항형과 패권형으로 나눠서 바라본다는 말은 이처럼 건강하지 않은 형태의 정서를 정상적인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지리적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안목과 정서는 마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치부해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삼국시대 또는 후삼국시대에서 유래하는 갈등이 있다는 소리는 지역간의 반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반칙도 서슴지 말라는 선동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내부식민지" 담론 역시 이런 선동에 비해서 설명 자체의 진실성에서나 정치적 효과에서나 조금도 나은 대목이 없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문제를 전라도/경상도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기본 프레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증거로 다른 사람의 말을 하나 인용한다.

"지역주의를 지역간 갈등 구조에 기초를 두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패권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 간의 대립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비판의 조직화는 패권의 지역주의에 대한 것이 된다. 아니면 패권적 지역주의에 대항하는 지역들 간의 연합이 현실적 대안이 된다거나, 저항적 지역연합의 진보성을 확대하기 위한 지역-계층연합이 초점이 된다. 어떤 경우이든 현재 한국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과 대안은 지역주의 차원의 문제로 용해되고 치환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박상훈, 「한국의 유권자는 지역주의에 의해 투표하나?: 제16대 총선의 사례」, <한국정치학회보> 35:2, 2001, 117).

장관 인사의 지역편중을 염려하는 시각이 지역안배라는 전근대적 탕평책의 사고에 갇혀있는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지역갈등의 원인을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찾든 박정희의 차별에서 찾든, 지역적 경계라는 개념적 구도에 따라 문제를 인식한다는 프레임은 마찬가지다. 이런 프레임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지역주의를 성토하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역적 경계에 따라서 사고하는 프레임이 점점 널리 퍼져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말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발생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사회 지식인들이 독자적인 사고를 추구하기 보다는 언어적 유행에 쉽게 동조해버리는 탓이 가장 크다고 나는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세목에 관해 날카롭게 벼려진 각자의 입장을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수준에서 두루뭉수리로 얼버무려진 내용을 난삽한 현학에 실어서 발표하는 무별주의 탓이라는 뜻이다. 무별주의 또는 얼버무리기, 또는 덩달이 담론, 또는 언어의 표피에만 반응하는 부화뇌동, 또는 교조적 표어에 매달리는 것을 신념이라고 착각하는 현상 등은 물론 지역주의 담론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런 현상에 대한 고발은 이 연재에서 계속될 것이다. 지역주의 담론은 그 중 첫 번째일 뿐이다.

지역주의 담론은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고 착각한 경우로, 착각의 핵심에 무별주의가 있다. 세밀한 실상의 차이를 식별한 기초 위에 나름대로 이치에 따른 판단에 도달하지 못하고, 언표적인 유행에 휩쓸리는 덩달이 담론들이 바로 그러한 무별주의의 소산이다. 그러니 황우석을 따라 우르르 몰려갔던 여론이 하루아침에 그를 내동댕이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고, 노무현에게 걸었던 기대가 식자마자 급속한 보수화 쪽으로 무려 400만 명 정도의 유권자가 이동한 것이다. 지식인들이 이치에 입각한 사회적 소통에 기여하기 보다는, 몰려다니기 현상에 오히려 앞장을 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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