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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을 빼고 '전라도 몰표'를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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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을 빼고 '전라도 몰표'를 설명할 수 없다

[박동천의 집중탐구]<17>반대를 위한 반대, 분석을 위한 분석

제2절 반대를 위한 반대, 분석을 위한 분석

한나라당(대구 달성군)의 박근혜 의원은 3월 2일 미디어법에 대한 야당의 반대를 두고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불렀다. 이명박 대통령은 3월 9일 라디오 연설에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다"는 불평은 박정희 시대부터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도 정부 측에서 늘 나왔던 소리다. 그리고 그 자체로만 보면 지당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정부가 하는 일에 무조건 반대만 일삼는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민주당에 가서 "야당이 반대만 하면 국민은 피곤하다"고 말한 것(동아닷컴, 2009. 2. 5, "박원순, '반대만 하는 야당, 국민은 피곤하다"), 또는 강준만 교수가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MBC의 파업에 대해 "긴박한 상황에서도 투철한 자기성찰과 그에 따른 새로운 대안 제시는 꼭 필요하다"면서 날린 점잖은 일침("1억 1400만원의 정치학", 한겨레, 2009. 3. 8.), 등은 다 "무조건 반대"로는 될 일이 없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정치에 관해서 보편타당한 일반적인 진리 가운데에는 "일반적인 진리만으로는 아무 일도 안 된다"는 명제도 포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무조건 반대만으로는 안 된다"는 분명히 지당한 말씀이지만, 그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지금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미디어법이 경제살리기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한미 FTA를 해야 할지 말지, 또는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할 것이 뻔한 차에 지금 한국 국회에서 비준을 서둘러야 할지 말지, 등등, 온갖 정치적 현안을 풀어나가는 데 단 한 발자국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떤 반대가 생산적이고 어떤 반대가 소모적인지를 분별하는 대목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무조건 반대는 안 된다는 식의 일반론에 머물면 말장난만 남는다. 박근혜의 경우 야당의 미디어법 반대를 "무조건 반대"라고 본다면, 야당이 제기하는 명분의 조목을 들어 반박해야 논의가 진전이 된다. 그렇지 않는다면 박근혜는 야당더러 "무조건 반대"라고 부르고, 야당은 박근혜더러 "무조건 비난"이라고 부르는 소모적인 언쟁밖에 남을 게 없다. 이명박 역시 "정부가 하는 일에 무조건 반대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싸잡을 일이 아니고, 누구의 어떤 반대가 무조건인지를 밝혀서 말해야 토론이 된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대통령이야말로 남탓만 하고 있다"는 같은 수준의 역공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물론 정치인들의 언어가 수사적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내가 지금 정치인들의 말투를 거론한 까닭은 그들에게 실제로 말버릇을 고치라고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형태의 말투가 순전히 소모적인 수사임을 주권자이면서 비정치인들인 시민 개개인들이 분명하게 분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리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한 공론장에서 그런 식의 공허한 일반명제들이 자연도태될 수 있도록 말하기의 건강한 방식에 관해 명확한 기준이 정립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일반시민들 사이의 토론에서든, 정치인들 사이의 토론에서든, 심지어 학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든, 건강한 토론과 소모적인 언쟁이 그다지 분명하게 분간되는 것 같지가 않다. 박원순이나 강준만이 말하는 방식이 그 점을 부지불식간에 잘 보여준다. 박원순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야당의 어떤 부분이 "반대만 하는" 셈에 해당하는지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식적인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지적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강준만의 칼럼은 단지 "MBC 직원 1인당 평균 연봉 1억 1400만원"이라는 한나라당(서울 중랑을) 진성호 의원의 선전이 사람들에게 먹히는 데는 이유가 있음을 자기성찰하라고 하면서, 노무현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예시의 목적이 박원순이나 강준만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박원순이나 강준만은 무수한 페이지의 저술을 통해서 구체적인 비판을 많이 내놓고 있는 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비판들이 대한민국 유권자 몇 명에게 영향을 미칠까? 박원순이나 강준만이라는 이름은 물론 상당한 또는 대단한 영향력이 아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내놓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논지보다는 지금 내가 거론한 것과 같은 지극히 단편적인 칼럼이나 보도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압도적일 것이다. 이 수준의 공론에서는 "반대만 하면 안 된다", "자기성찰", "대안제시" 등의 구호만이 표면으로 떠오르지, 그 구호들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대상이 무엇이고, 그 구호에 해당하지 않는 사례는 또 무엇인지는 거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는 점이 내가 지금 부각하려는 대목이다.

담론의 정치는 다분히 구호의 정치이고, 구호의 정치는 다분히 소모적이며 공허한 수사이기가 쉽다. 그러나 구호의 정치가 순전히 소모적이고, 담론의 정치가 순전히 공허한 수사로만 이루어진다면, 진보의 희망은 없다고 단언해도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진보정치는 시작부터 말로 표현되는 희망을 먹고 사는 것인데, 말이 공허하다는 것은 곧 희망이 깃들 여지가 없다는 뜻과 똑같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이 반드시 그처럼 절망상태는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자칫 그렇게 될 위험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지식인들의 말에서 김이 빠져버리고, 그야말로 분석을 위한 분석을 즐기고 있는 듯한 기미가 보이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에 관한 담론이 바로 그렇다.

나는 앞에서, 즉 제2부 제2장 제1절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나타나고 있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몰표 현상에 대해 간략한 해석을 제시했다. 전라도 몰표는 명백히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의 표현이며, 그 원인은 1980년의 광주학살과 뒤이은 은폐 및 억압에 있다고 말했다. 경상도 몰표는 1971년에 나타난 김대중에 대한 경계심이 뿌리인데, 그 원인도 확실하지 않고 세월도 많이 지나서, 현재의 몰표는 어쩌면 전라도 몰표에 대한 반사작용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전라도 몰표의 경우 우선 시간이 상당히 오래 지나야 해소될 일이고, 나아가 그와 같은 국가폭력이 잘못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분명해지기 전에는 경계심이 계속 되살아나리라고 말했다. 반면에 경상도 몰표는 독립변수인지 종속변수인지에 따라 전망이 달라질 텐데, 독립변수인지 종속변수인지를 확인하려면 전라도의 몰표 현상이 완화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전에 경상도의 표결집이 해소된다면, 그것이 적어도 종속변수만은 아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나는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모호하고 논쟁적이며 자극적일 수 있는 어떤 이론적 도식과 상관없이, 아주 일상적인 수준에서 간단한 표 몇 개를 토대로 위의 주장을 건축했다. 내 주장에 모든 사람이 동의할 리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설명보다 내 주장이 일상적인 의미에서 가장 말이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이는 지금까지 나온 것 가운데 내가 보기에 더 나아보이는 것을 못 봤다는 뜻이지, 앞으로도 나올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내 설명과 여타 유수한 학자들의 설명을 대조해 보자. 전라도와 경상도의 정치지향성 차이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최장집, 손호철, 황태연, 김만흠, 강명세, 문용직, 송복, 이갑윤, 이남영, 조기숙, 최영진, 강원택, 문우진, 박상훈, 이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면 우리사회에서 학술이라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통감하게 된다. 전라도에서 90% 이상의 몰표가 "'80년 광주" 때문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사실을 부각하기보다, 자꾸만 심오하고 추상적인 "구조적" 원인을 찾으려고 현학을 부리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하나의 문제로 인식되어 공론의 주목을 받은 계기는 '85년의 평민당의 "황색돌풍"과 '87년의 90% 호남몰표 때문이다. '85년의 국회의원 선거와 '87년의 대통령 선거는 '80년 이후 정파 간에 경쟁이라는 것이 약간이나마 가능한 상태에서 치러진 최초의 선거다. 맥락이 이와 같은데, 그때 표현된 전라도 민심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80년 광주"를 옆으로 젖혀버리고 박정희의 차별에서 원인을 찾는다든지, 또는 단순히 "합리적 선택"이라는 정치학의 일반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국현대정치라는 이름만 걸어놓고 음풍농월을 하는 셈과 같다.

▲ "전라도의 '90% 몰표를 설명하면서, 광주학살보다 더욱 적실한 어떤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지 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연합뉴스
역사적이거나 구조적인 원인도 물론 적실한 만큼은 발굴되어야 하고, 때로는 눈앞에 보이는 원인보다 깊은 원인이 더욱 적실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전라도의 '90% 몰표를 설명하면서, 광주학살보다 더욱 적실한 어떤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지 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국 남부에서 1970년까지 지속된 몰표를 설명한다면서 남북전쟁을 부차적으로 여기고 어떤 다른 구조적인 원인을 더욱 적실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20세기의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임진왜란을 기억하면서 반일감정을 가질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일제강점기가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고, 이순신의 영웅담이 적실성을 가지는 것이다.

위에 거론한 특정 학자더러 연구주제나 연구방식을 고치라는 요구가 아님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개별적인 학자가 자신의 주제를 개발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파고드는 것은 판사가 양심과 법률에 따라 판결하는 만큼이나 밖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자율적인 영역이어야 한다. 단, 그처럼 자율적인 영역에서는 앞 제2부 제1장에서 예시했듯이 스콜라 철학에서 논의되던 신존재증명과 같은 화두도 한자리를 차지할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현실정치를 개선한다는 관점에서 논의되는 주제는 그만큼 현실 안에서, 상식인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장래에 구체적인 차이로 이어질 수 있는 이야기에 국한되어야 한다. 현실문제를 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학자들 사이에 논리학 연습용 과목에 불과한 주제는 전형적으로 가짜문제가 된다. 논리학 연습용이라서가 아니라, 현실문제를 건드리는 척하면서 그렇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왕건의 훈요십조로 말미암아 그후 천년동안 전라도가 무슨 차별을 받았는지, 박정희 시대에 전라도가 지역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체계적인 차별을 받았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어떤 연구자가 지금까지 알려진 이상의 획기적인 증거를 찾아 나설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어떤 획기적인 증거가 나타나기 전에 그런 식으로 차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술자리에서 신소리로 아는 척하기 위한 얄팍한 화제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지역주의가 해결이 필요한 문제"라는 차원의 실제적인 의제와는 접촉하는 지점이 거의 없는 한가한 말장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금 말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나 분석을 위한 분석도 학계에서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의미가 분명히 있다. 머리카락 세로로 쪼개기 수준의 논의를 실천한 스콜라 철학이 서양 근대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지적은 여러 차례 반복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런 논의들이 실천적인 문제에 대한 적실성을 자동적으로 가지지는 못한다. 실천의 문제는 주어진 과제가 얼마나 심각한지에도 신경은 써야겠지만, 그보다는 그 일에 관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차원에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사회의 정치담론에서 현저하게 부족한 대목이 이것이다. 문제를 고발하는 관심들이 무성한 데 비해서, 그렇게 고발된 문제들이 시의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를 분별하는 관심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상에서 문제라고 인식되는 것들 가운데에는 두고두고 저작하면서 음미할 수밖에 없는 부류, 두고두고 저작하면서 음미해도 당장 무슨 고장이 나지는 않는 부류들이 있다(A). 정반대쪽에는 지금 당장 고치지 않으면 어딘가 고장이 크게 나거나 가까운 장래에 큰 피해가 예상되는 부류가 있다(B). 이런 양 극단 사이에 무수히 서로 다른 형태와 정도의 문제들이 있다. 지금 당장 고치지 않아도 큰 고장은 안 나지만, 지금부터 서서히 준비하다보면 나중에 큰 이익으로 돌아올 부류도 그 중간에 위치한다(C).

진보담론은 B또는 C를 지향해야 한다. A는 일단은 세상의 풍파와 거리를 둬도 괜찮은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연구 영역으로서, 그런 부류의 주제에 대한 관심은 사회에 대해 진보적인 함의만이 아니라 대단히 보수적인 함의도 함께 섞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네 지식인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버릇은 직설어법 자체를 무례로 간주하고, 뼈를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을 원천적으로 경원하는 풍토에 젖어 있다. 그 때문에 90% 이상의 몰표가 광주학살 때문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사실을 그냥 드러내서 말하지 못하고 뭔가 더 멋있어 보이는 원인을 굳이 찾아야 학문적이라는 포장에 알맞다는 무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80년 광주"가 90% 몰표의 원인이라는 내 주장을 새롭게 느끼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나라의 지난 30년 역사를 대략 알고 있는 사람치고 이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도 그토록 무성한 지역주의 논란은 초점이 거기로 모이지 않고 기껏 지역차별론 아니면 합리적 선택이론 정도 수준에만 머물렀다. 단적으로, "광주"를 말하기가 거북스러웠다는 얘기다. 전두환 시절이라면 그랬을 수 있겠지만, 왜 그 후에도 "광주"를 말하기가 거북했을까? 현실정치에서 뜨거운 쟁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실 쟁점을 정면에서 다루기를 회피해 온 버릇은 한편에서는 "가치중립"이라는 소외된 환상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짜비급을 수련하다가 마침내 주화입마 상태에 빠져 버린 한국 사회과학계의 풍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립성의 환상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주화입마에 관해서는 제3부에서 상세하게 비판을 시도할 것이다. 여기서는 절을 바꿔서 눈앞에 있는 문제를 그냥 까놓고 말하면 뭔가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무별주의를 공박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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