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지향성은 없고 불평에는 안성맞춤
제3장이 삽입된 까닭은 이기심 중에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직결되지 않는 부류들은 내버려 두는 데에 민주주의의 요체가 있으며, 그런 이기심들을 소재로 공익을 찾고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예술적인 정치가 구현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제 다시 논의의 본래 줄기로 돌아가, "지역주의"나 "지역감정"에서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를 찾는 문제의식이 가짜문제를 진짜문제로 착각한 결과라는 논점을 계속 추구해본다.
앞에서는 "지역주의" 운운하는 문제의식이 진짜문제가 될 수 있는 어떤 사항들을 어렴풋하게나마 건드리는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역주의"라는 모호한 용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마치 도끼로 외과수술을 하려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이번에는 반대방향에서 접근하여 일종의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통한 논증을 시도해본다.
백보를 양보해서 가령 지역주의가 문제인 것은 맞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나서 지역주의가 치유된 상태가 무엇일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지역주의를 성토하는 담론의 특징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역주의가 없는 상태라면 어떤 상태인지 역시 불투명한 채로 남겨둔다는 점이다. "지역주의"를 병폐라고 보는 사람들이 치유된 상태에 관해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를 않기 때문에, 논의를 진행해 보기 위해서는 여기서도 다시 내가 그들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지역주의를 성토하는 입장에 서서 어떤 상태를 문제없는 것으로 여길지를 추정해보자.
우선 투표성향의 편차부터 보자. 전라도와 경상도의 몰표가 문제라면, 표가 얼마나 분산되면 문제가 아닐까? 후보들이 똑같이 나눠 받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바보에 가깝다. 전라도에서도 경상도에서도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사이좋게 50%씩 나눠 가지는 선거결과가 나오고, 그에 대해 우리 유권자들이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고 전국적 축제가 벌어진다면 외신이 재밌는 소식으로 전하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보다 바람직하다고 봐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더구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자유선진당, 창조한국당은 왜 뺀단 말인가? 그뿐이 아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 후보를 낸 정당은 이들 외에 참주인연합, 경제공화당, 새시대참사랑연합, 한국사회당 등이 있었다. 이 당들이 다 똑같이 10%씩을 득표하는 선거결과가 나온다면 바람직하기는커녕 뭔가 크게 잘못된 징표일 것이다.
나는 앞에서 60%대의 표결집이라면 자기 후보에 대한 지지의 의미가 강하고 상대 후보에 대한 반감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관찰에 동조하면서 지역주의를 문제로 보는 사람이라면, 몰표가 70%를 넘지 않는다면 문제가 아니라고 볼지도 모르겠다. 만약 선거시 지역간 편차가 한국정치에서 정말로 떼어버려야 할 악성종양이라면, 깨끗하게 없애버릴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둘만 들어보자.
a. 가장 극단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처방: 전라도와 경상도 주민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몰표는 안 나온다. 투표하고 싶은 사람은 충청도 이북이나 제주도로 주민등록을 옮겨서 투표하게 되면, 지금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표가 분산돼서 나타나고 몰표현상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b. 조금 덜 극단적이면서 확실하기는 비슷한 처방: 대통령 선거에서 70% 이상의 몰표가 발생하면 70%를 초과하는 표를 그대로 2등에게 넘겨준다. 괜히 넘겨주는 표가 되고 싶지 않은 유권자들은 고정지지 정당 말고 두 번째 또는 세 번째로 선호하는 정당이나 후보에게 투표하게 될 것이다. 물론 유권자들이 종전처럼 투표해도 문제는 없다. 70% 초과분은 2등에게 주면 된다.
너무 심한 편차가 진실로 문제라면, 또는 유권자들의 정서 중에 포함되어 있는 반감이 한국정치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진실로 문제라면, 그 병소 부분만 잘라낼 수 있는 처방은 이밖에도 사실 무수히 고안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방안들은 첫눈에도 말이 잘 안 된다. 만약 순전히 몰표를 방지하는 것만이 목표라면 이런 방안이 충분히 고려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안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어 보인다면, 바로 그 점으로써 몰표 자체가 나라를 망치는 치명적인 병폐는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귀류법에 의한 증명끝(Q.E.D)이다.
둘째, 그렇다면 엽관제는 어떠한가? 이 역시 반대쪽에서 물어보자 - 어떤 상태여야 엽관제의 우려가 없어질까? 대통령이 고려대학교 출신이면 고려대학교 출신을 서울대학교나 전북대학교 출신, 또는 대학교를 나오지 않은 집합에 비해 어떤 비율로 고위직에 임용해야 엽관제가 아닐까? 진짜 엽관제와 단지 시비를 걸기 위해 언론이 엽관제라고 꼬투리를 건 경우는 어떻게 구분할까? 엽관제라는 꼬투리에 하나도 걸리지 않기 위해 고려해야 할 변수는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 지연, 학연, 교회나 시민단체나 직장이나 군대 등, 다양한 조직에서 함께 일했거나 자주 만났다는 인연, 이념이나 기질이 비슷하다는 공통점, 등등, "코드 인사"의 혐의를 걸 수 있는 변수의 목록은 거의 무한정 이어갈 수 있다.
장관을 비롯한 고위직 공무원의 출신지역 비율이나 출신학교 비율 등은 지역별 안배나 출신학교별 안배를 인사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지 않는 한, 인구 구성비와 일치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 예컨대 영남 40% 호남 20%라는 따위의 비교는 자연스럽게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 단순한 평등에 관한 막연한 기준을 바람직한 것처럼 여기도록 오도하는 경향이 있다. 인사의 기준으로 지역이나 출신학교 등, 사실 업무와는 상관없는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트집은 잡기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다. 안배를 최고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한, 거의 모든 인사에서 일정한 수준의 편차를 찾을 수 있고, 그러한 편차를 곧 편파성으로 몰아가기는 쉽기가 여반장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런 편차가 장기간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일어나면 문제가 아니냐고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체계적인 편차"가 있다면 어쩌면 체계적인 차별이 있다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얼핏 상당히 중요한 문제제기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어떤 상태가 "체계적인 편차가 없는 상태"인지에 관해 조금이라도 명확한 기준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런 종류의 담론은 모두 가짜문제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차원의 관직 나눠먹기에 관한 관심은 어떤 사회에서도 일정 정도는 존재한다. 문제는 그 관심을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느냐는 데 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런 관심은 통속적인 호사가들의 수준에나 맡기고 건강한 공론에서는 가벼운 농담이나 분위기 조성용 화제 정도로 다루어지는 것이 알맞다고 본다. "얼마나 평등해야 문제가 아닌지"를 애당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분석단위를 적절히 조절하기만 하면 모종의 통계적 편향성을 쉽게 찾아서 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경우에도 문제를 찾아서 고발할 수 있는 의제라면 그것은 애당초 단순히 소모적인 트집거리에 불과한 것이지 건설적인 의제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셋째, 향리주의 역시 문제가 아닌 상태를 어떻게 상정하고 나오는 문제의식인지가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속한 일차적 지역공동체의 범위를 얼마나 멀리까지 잡아야 향리주의가 아닌지는 그야말로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구의 한 유권자가 경부운하가 대구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서 이명박을 찍었다면 향리주의가 되고, 경부운하가 대한민국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찍었다면 향리주의가 아닌가? 이런 유치한 구분은 오직 대구지역 경제와 대한민국 경제가 서로 제로섬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 ⓒ연합뉴스 |
만약 대구의 한 유권자가 경부운하를 높이 사서 이명박을 찍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것이 대구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나아가 어쩌면 인류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경부운하를 높이 사서 이명박을 찍었다면 그 사람이 전라도 유권자라도 전라도에게만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나 인류에게 이익이 되리라고 보는 것은 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이명박의 공약 자체가 경부운하를 통해 대한민국이 이익을 본다는 것이지 광주에게는 손해고 대구에게만 도움 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부운하를 지지하는 유권자라면 그와 같은 공약을 포장하고 있는 프레임 전체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향리주의를 비난하는 관점은 유권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 유권자를 관찰하는 외부적 시각이다. 다시 말해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계몽에 대한 이상적인 기준을 설정하고서, 유권자들이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다고 꾸짖는 셈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서양의 민주주의를 교과서적으로 이해하고 나서, 그렇게 자기들 마음 속에 투영된 민주시민의 상을 한국사회의 유권자들에게 힐난을 섞어서 강요하는 꼴이다. 소외된 지식의 전형적인 모습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향리주의라는 관점에서 유권자들의 편협성을 공격하기로 한다면 영미 또는 유럽의 경우에도 결코 소재가 부족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일반 유권자는 물론이고 정치학이나 행정학, 경제학이나 법학, 등 이른바 사회과학에 속하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도 국가 정책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라서 누구나 자신의 즉각적인 현안에서부터 출발해서 관심의 분야를 넓혀나간다. 이 경우 뭘 얼마나 넓고 깊게 알아야 향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인지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거니와, 애당초 넓다든지 깊다든지 하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더군다나 앞 제3장에서 윤곽을 제시했고, 바로 이 절의 앞부분에서도 예시했던 바와 똑같은 내면적 부정합성이 향리주의를 개탄하는 문제의식에도 들어 있다. 향리주의 개탄은 대개 정치학을 조금 공부했다는 지식인 층에서 유행하는 담론이다.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런 개탄은 곧 유권자의 "민도"를 탓하면서 자기는 적어도 그만큼은 향리적이 아니라는 함축을 가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위에서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물어보자.
투표권을 예컨대 정치학박사나 석사소유자에게만 제한한다고 하면 아마도 그들의 "민도"를 문제삼기는 어려울 것이고, 따라서 "향리주의"를 탓하기도 많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전체적인 선거의 결과가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나더러 답하라고 하면, 그런 보장 따위는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결과가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2007년 12월 선거에서 정치학 석사나 박사 학위 소지자만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더라도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이명박과 정동영의 득표율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가 실질적으로 나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이 참정권을 제한하면 정치사회에게는 무익무해가 아니라 실제로 피해가 간다.
제3부와 제4부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는 정치사회가 내리는 매번의 선택이 실질적으로 더 나아진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들에게 자신의 일과 공공선택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실감케 해서 책임감을 고양하는 데에 있다. 어떤 관념적인 도식을 상정한 다음 유권자들의 특정 행태를 거기에 비춰봤더니 미흡한 것처럼 나타날 때, 그 행태를 직접 꾸짖고 고치라고 성토하는 것은 애당초 민주주의의 근본 취지와 핵심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짓이다. 민주주의에 여러 가지 가치가 있지만, 그 중에서 절대로 놓치지 않아야 할 가치는 앞 제3장에서 언급했듯이 불확실성에 대한 대처능력을 기른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제3부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지만, 유권자의 향리주의를 마치 직접 공략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양 치부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취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은 말이다. 다시 말해 군주정이나 계몽적 전제에서 통용될 수 있는 발상의 조각을 민주정에다 적용하려는 범주혼동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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