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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숨겨놓은 의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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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숨겨놓은 의미들

[이택광의 영화읽기]<3> 문화적인 것은 어떻게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가?

90년대 영국영화를 대표하는 두 감독의 작품이 나란히 우리를 찾아왔다.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가 그것. 각각 <트레인 스포팅>과 <빌리 엘리엇>으로 90년대 이후 영국영화의 약진을 세계에 알린 감독들이다. 흥미롭게도 두 감독 모두 이번 영화에서 영국이라는 지리적 환경을 벗어났다. 대니 보일은 인도로, 스티븐 달드리는 독일로 날아가서 영화를 만들었다. 지당한 말이겠지만, 두 영화 모두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이지만 그 방식은 각기 다르다.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가 두 영화에 스미어 있는 셈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대니 보일 특유의 카메라 워킹과 색감이 속도감 있게 내달린다. <트레인 스포팅>의 주인공처럼,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도 가난과 멸시를 벗어나기 위해 달려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리고 '운 좋으면'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 주인공이 정치적 박해를 받는 까닭은 퀴즈쇼에 출연해서 모든 문제를 맞혔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것이 어떻게 정치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 영화는 정확하게 보여준다.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이 바로 '매개'이다. 대니 보일은 스티븐 달드리보다 훨씬 매개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슬럼독 밀리어네어

그래서 그런지 <슬럼독 밀리어네어>은 계급을 상징적으로 재현할 뿐, 구체적 현실감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백만장자'만 이루면 사랑도 쟁취하고 인생 역전도 가능할 것 같은 판타지를 대니 보일은 서슴지 않고 제시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뭄바이의 빈민가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에서 마이크 데이비스가 묘파하고 있는 묵시록을 연상시키지만, 결론은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다. 인도라는 전근대적 카스트와 근대적 계급이 고스란히 공존하는 '장소'에서 대니 보일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사랑은 한 여인에 대한 첫사랑일 수도 있고, 정신분석학적인 충동일 수도 있다. 멈추지 않는 욕망이 마침내 찾아 헤매던 '대상'을 만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자말의 인생이라는 작은 이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큰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다. 퀴즈쇼에 출연한 자말은 속임수를 썼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영화의 원작은 이 문제가 주요 화두였다. 퀴즈쇼에 천민이 출연해서 우승한다는 설정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은 고스란히 보여준다. 결국 앎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이건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치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런 원작의 설정을 가져오긴 하지만, 이야기의 배경 정도로 활용할 뿐이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건 자말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 바로 라띠까를 향한 욕망이다.

어차피 현실에서 불가능한 욕망이 영화에서 이루어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걸까?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형식은 이데올로기적이다. 계급이나 인종, 또는 젠더의 재현을 형식으로 착각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형식이라는 건 훨씬 은밀한 차원에서 작동한다. 이런 맥락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훨씬 더 정치적인 '형식'을 숨겨 놓고 있다. 몇몇은 대니 보일의 결론을 순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훈장처럼 달려 있는 화려한 수상경력을 보면 그 순진한 결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슬럼독 밀리어네어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표상하고 있는 정치적 지향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 내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신흥 중간계급을 향한 것이다. 이들은 서구 문화를 체득하고 전근대적이고 위계적인 신분주의에 비판적인 새로운 세력이다. 당연히 이 신흥세력이 지지하는 이념은 서구의 자유주의 체제이다. 미국이나 다른 영어권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 이민 러시를 주도하고 있는 이들도 인도의 중간계급이다. 퀴스쇼에서 자말이 우승하는 사건은 서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식적인 것이지만 인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상식적인 것이다. 인도 사회의 후진적 전근대성은 서구 관객(또는 그 관객의 응시를 자신의 욕망으로 체득하고 있는 인도 중간계급)에게도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렇게 인도의 전근대성에 대한 조롱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더 본질적인 상황, 다시 말해서 데이빗 하비나 마이크 데이비스가 지적하는 '추방을 통한 축적'이라는 중요한 명제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말이 그의 형을 만나는 장소인 거대한 아파트 공사현장은 빈민가에서 거주민들을 추방하고 재개발을 추진하는 전형적인 제 3세계 자본축적의 실상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원작에서 추방의 중심에 있었던 주인공은 영화에서 그 현장을 벗어나 있는 관찰자로 보일 뿐이다. 더구나 영화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실체는 애매하다. 권위적인 쇼 진행자나 반민주적인 경찰, 그리고 폭력을 일삼는 갱들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직접적인 주체이다.

인도 빈민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는 강탈과 추방의 실상은 영화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게 고작이다. 그것도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진짜 인도'를 보러 온 벤츠 탄 관광객의 사진기에 담길 만한 풍경들이다. 이런 한계는 영화라는 장르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인도를 여전히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는 대니 보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인도영화에서 중요한 이슈는 '부패'이다.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부패 문제의 이슈화는 마치 부패한 관료나 정치인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부패 문제야말로 인도나 한국의 중간계급이 정치를 대하는 전형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 한 편이 담아낼 수 있는 문제의식은 분명히 한정적이지만, 모든 해결책을 '개인'으로 귀결시켜버리는 건 좀 안이한 태도처럼 보인다. 하기야 어차피 미국시장을 겨냥해서 만든 '외국영화'라면, 안전장치들을 많이 달아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확실히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오스카의 구미에 맞는 적절한 사회의식과 깔끔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영화라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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