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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용산-야간집회 헌소…사법부 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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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용산-야간집회 헌소…사법부 척도

[박동천 칼럼] 시간은 누구 편일까?

지금은 어렵지만 결국 진실이 이기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인류는 발전할 수 없다. 갈릴레오같은 예를 들지 않아도 진실이란 많은 경우에 논쟁을 이겨내고서야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의 세계에서 자기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불만스러운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내 진실이 알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는 표현도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말하는 사람이 어떤 처지인지에 따라서 성격이 상당히 달라진다. 집권자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 반대파를 더 이상 설득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붙이겠다는 최후통첩인 셈이다. 반면에 사형대에 오른 정치범이라면, 자기는 죽지만 자기가 소망한 꿈은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기원이 된다. 예외적으로,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소망이나 기원이 뭔지를 아예 모르는 사람은 순전히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죽는 순간까지 인생을 연기로 일관하기도 한다.

"역사의 심판"이란 문구를 "배 째라"의 점잖은 표현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나, 소망이나 기원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나 시간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같다. 시간이 지금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언젠가 찾아오기를 희망하지만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가리키는지가 다를 뿐이다. 흔히 전자를 현실주의라 부르고 후자를 이상주의라 부른다. 우리처럼 사회적 의제의 해결을 위해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공론이 개인적 권력과 위신과 지위를 둘러싼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다툼으로 쉽게 뒤죽박죽되어 버리는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는, 현실주의와 순응주의를 혼동하고 몽상을 이상으로 착각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한국어 토씨 "만"과 "도"를 통해서 분간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항이 한 가지 있다. 현재의 시간을 중시하는 태도와 현재 고려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 구분이 토대가 되어야 현재에 바탕을 둔 미래가 조망될 수 있고, 따라서 이상과 몽상이 분별될 수 있다. 그러니까 정치적 성향을 시간이라는 변수에 따라서 구분하면 세 갈래 - 현재 나타나는 권력에만 순응하는 순응형, 현재와 미래를 상호 매개하면서 고려하는 매개자형, 미래라는 이름 아래 빈 도화지 위에 아무 그림이나 그려 보는 몽상가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순응자형은 옳고 그름에 관해 독자적인 판단력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공표하기를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성격이다. 대개 세상이 혼란할 때, 다시 말해서 이치가 통하지 않고 폭력이 횡행하는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심성이다. 난세라면 알맞고 말고를 따질 겨를이 없겠지만, 치세라면 공공조직에서든 사적조직에서든 판단과 결정보다는 관리와 기록에 알맞은 성품이다. 단, 이런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소속한 조직의 성격에 따라 선악이 갈린다.

두 번째 매개자형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나름대로 적극적인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의견을 공표할 배짱이 있는 사람들이다. 난세라면 대개 모험가들이고, 치세라면 정치인이나 각종 조직의 지도층, 기타 문필이나 강연을 통해 도덕이나 역사의 향상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물론 이들 사이에는 가치나 미덕에 관해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야만적인 사회에서는 그런 차이들이 주로 발가벗은 무력에 의해서 결정되고, 개명된 사회라면 가능한 한 내전까지는 가지 않으면서 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차이를 조정하거나 아니면 참고 견딜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세 번째 몽상가형은 무책임이 특징이라는 점에서 순응자형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미숙한 시선에서는 대단히 멋있게 비치기 쉽다. 용기, 소신, 창조, 천재, 파격, 등등, 기성체제를 지겨워하는 젊은이들일수록 좋아할 만한 미덕들이 얼핏 보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나 타임머신을 꿈꾼다고 시간여행이 가능해지지 않듯이,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꾼다고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정치라는 업종에는 순응자형이나 몽상가형이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자는 너무 조심만 하다가 사회의 활력을 죽여 버릴 것이고, 후자는 가는 곳마다 사고를 쳐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터라서다.

정치라는 사업이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매개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노무현 정부 이래, 현재와 미래의 매개점을 찾기 위해 우리사회가 진수하려는 탐사선의 출발점이 점점 사법기능 근처로 수렴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과 행정수도 위헌판결을 통해서 그동안 다소 부당하게 가려져 왔던 자신의 정치적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다. 지금 촛불 시위, 미네르바 재판, 용산 참사, 그리고 마침내 신영철 대법관과 관련된 여러 갈래의 쟁점들까지, 껍데기를 한 꺼풀만 벗기고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사회가 법과 권력과 여론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문제를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이라는 식으로 서술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용어에 관한 불충분한 이해로 말미암은 대단히 엉성한 인식이다. 엉성한 만큼 과녁 자체를 포착하지도 못했고, 따라서 자연히 엉뚱한 지점으로 공론의 주의력을 오도하고 만다. 인민주권을 바탕으로 삼지 않으면 법치가 불가능하고, 또 법치를 바탕으로 삼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누구 편인지와 관련해서 법치와 민주주의의 내면적 연관을 생각해보자.

속담이나 격언 중에는 잘못된 말도 많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속담만은 뭐라 시비를 걸 구석이 없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남보다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사람들의 기억이라도 결국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지고 퇴색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실 나쁜 기억일수록 망각이란 저주라기보다 축복이라고 봐야 할 의미조차 적지 않은 것이다. 세월을 상대로 싸우는 짓은 단순한 어리석음일 뿐, 어떤 다른 의미도 첨가될 수가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의 질곡을 깨뜨린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지 시간의 흐름 자체를 거역하겠다는 만용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만약 어떤 정치체제에서 시간과 관련된 현저한 불평등을 드러낸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다시 말해, 특정 부류의 시민들에게는 시간 자체를 상대로 싸워야 하도록 판을 짜고, 다른 부류의 인종에게는 시간의 든든한 후원을 넉넉하게 향유할 공간을 허용한다면 뭐라고 반응해야 하나? 나는 아무데서나 평등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질투의 화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 인종이나 계급이 시간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다른 인종이나 계급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 평등을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다.

용산 참사의 유족들과 신영철 대법관의 처지가 너무나 대조적이라서 하는 소리다. 용산에서 참사가 벌어진 후, 경찰은 줄곧 서울 도심에서 화염병으로 무장한 세력을 진압하지 않았다면 일반 시민들이 위험했으리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검찰도, 한나라당도, 청와대도, 우익 신문들도 이 주장을 성원하고 반복했다. 희생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정을 표하려는 집회마저도 원천 봉쇄되고 있다. 특공대 투입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었을 정도로 사정이 절박했다는 주장은 곧 농성자들이 마치 흉기로 무장하고 인질극을 벌이는 현행범처럼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왜 재판이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명백한 현행범"들에 관한 재판에 무슨 준비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일까? 법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물론 온갖 종류의 기술적인 변명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 변명 중에는 타당한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장례도 치르지 않고 버티고 있는 유족, 그리고 구속당한 상태에 있는 피의자들 입장에서는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검찰의 수사가 편파적이었다고 불신하므로, 법원이 특별히 공정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그 희망에만 기대기에는 뭔가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까지 억누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 만약 법원마저 일방적으로 경찰 편을 든다면 믿을 것은 여론의 도움뿐인데, 시간이 지난다는 것은 곧 시민사회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뜻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신영철 대법관의 사례에서는 상황이 대단히 대조적이다. 박재영 판사가 사표를 냈을 때만 해도, 국회청문회에서 그 사정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이뤄졌을 때만 해도, 큰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신영철 씨가 대법관으로 임명된 후, 이메일 내용이 폭로되고 법원내부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온 다음, 여론이 들끓어 더 이상 덮을 수가 없게 되자 대법원은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를 김용담 법원행정처장은 "재판관여라 볼 수 있다"는 대단히 안전한 어법을 써서 표현했다. 논리적으로만 분석하면 "볼 수 있다"란 "안 볼 수도 있다"를 함축하기 때문에, "반드시 재판관여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라는 해석의 여지가 남는다.

진상조사단이 명확한 입장표명을 회피했기 때문에 대법원장은 징계위원회 대신에 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다시 말해 신영철 대법관의 행위에 관해 재판(징계위원회)을 하기 전에, 재판을 해야 할만한 이유가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윤리위원회에 묻고 있는 셈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지만, 나는 지금 활동을 개시도 하지 않은 윤리위원회의 의지나 역량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윤리위원회가 본연의 임무를 다 하리라는 전제 위에서, 용산 참사의 희생자 및 피의자들이 겪고 있는 처지와 신영철 대법관의 처지를 한번 드러내서 비교해보려는 것뿐이다.

물론 한 나라에서 대법관의 신분까지 도달한 분의 입장과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에 항의하다 못해 화염병을 들고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의 입장 사이에 평면적인 평등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법관을 징계하게 되면 우연히 그 자리에 앉은 한 개인의 위신만이 아니라, 사법부라고 하는 국가의 근본기능이 마땅히 보유해야 할 권위에도 손상이 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당사자에게 최대한으로 소명의 기회가 당연히 주어져야 하고, 조사 과정도 진실을 은폐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품위와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만, 불평등 중에는 당연히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평등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법관의 처지와 서민 혐의자의 처지가 일반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 나타나고 있는 것만큼 달라야 하는지는 언제나 따져 물을 수 있는 문제다. 한 사건의 피조사자와 다른 사건의 피의자 사이의 불평등한 처지가 대법관과 서민 사이의 신분이 다른 만큼 마땅히 용납될 수 있는 정도인지 아니면 그 신분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불평등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는 시간이 누구 편을 들도록 짜여있느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이 특별히 누구 편을 들도록 짜여져 있지 않다면 구조적인 불공정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 사건의 혐의자는 시간으로부터 주로 혜택을 받는데 비해 다른 사건의 당사자는 주로 피해를 입는다면 사법기능의 근거에 대해 인민 주권이 간섭해야 할 필요가 커질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헌법에도 규정되어 있는 신속한 재판이라는 관점에서 앞으로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 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27조 3항). 현재와 미래를 매개하는 관점에서 우리 사법부의 현재 모습을 가감 없이 파악하기 위해 주목할 재판은 세 가지다.
▲ 현재와 미래를 매개하는 관점에서 우리 사법부의 현재 모습을 가감 없이 파악하기 위해 주목할 재판은 세 가지다. ⓒ뉴시스

첫째 신영철 대법관에 관해 대법원 윤리위원회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이는가? 김석기 서울경찰청장 때처럼, 신 대법관의 자진사퇴로 모든 쟁점을 묻고 지나가기를 은근히 바라는 세력의 압박에 윤리위원회가 순응하는 기미는 없는가?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라도 신영철 대법관이 자진사퇴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한 개인의 거취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사법기능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용산 참사에서 실정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혐의를 쓰고 있는 피의자들에 대한 형사재판이 어떤 속도로 진행되는가? "소송 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은 제4조에서 형사사건 1심 재판은 공소제기로부터 6개월 이내에 판결하도록 못을 박고 있다. 최근 자료는 아니지만, 참고로 1996년 통계를 보면 형사재판 1심 판결에 6개월 이상이 걸린 사례는 전체 17만여 건 가운데 3.8%를 차지했다. 이런 맥락에 비춰서 용산 참사에 관한 재판이 얼마나 걸리는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타 사건들보다 느리지 않거나 오히려 신속하게 진행한다면 공론의 기억이 퇴색하기를 기다린다는 의혹이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셋째로 주목해 볼 지점은 박재영 판사가 2008년 10월 13일에 제청한 야간옥외집회 금지에 관한 헌법재판이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 윤리위원회가 서로에 대한 파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놀랄 것이지만, 얼마나 중시해야 할지 또는 실제로 얼마나 중시할지는 나로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틀림없이 커다란 관심사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의 결정이 먼저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우리사회 법조계 고위층이 모종의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여부를 논의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런 의혹을 일축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최근에 부쩍 늘어난 사법부에 관한 사회적 관심을 우리 법원이 부담스럽게만은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법률에 의한 재판이 여론 재판과 달라야 한다는 원칙은 여과되지 않은 말초적 여론을 경계하는 것이지, 법 앞에 평등이라는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공론의 심사숙고를 거친 사회적 합의로부터도 사법부가 독립할 수는 없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한, 인민은 제헌권을 포함한 주권을 보유하며, 그렇기 때문에 헌법재판소나 대법원과 같은 최고층의 재판소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매개하는 관점에서 인민을 위한 장기적인 이익을 당연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관점은 인민을 입법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통치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시각, 전형적으로 법이 위에서부터 하달되는 체제, 즉 군주정, 신정체제, 독재, 전체주의와 친밀한 시각이다. 그런 체제에서 법은 단지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하고, 법조인력은 순응형 인간으로 채워지게 된다. 이른바 "전문가의 전횡"이라는 상투어도 있다. 우리사회의 사법 현실이 불과 20년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특별히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법기능이 권력에 순응한다면, 다시 말해 법치의 원리가 무너진다면, 무책임한 몽상가들이 발호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민주주의에서 법적 안정성이란 전제적 질서와 구별되는 자유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초점이 놓여야 한다. 만일 사회구성원 중 특정한 일부에게는 시간의 부담을 일방적으로 지우면서, 다른 일부에게는 시간의 혜택을 일방적으로 허여한다는 비판이 시민들에게 호응을 얻게 된다면 자유사회라고 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당연히 그런 사회에게는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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