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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동운동, 살려면 현장토론 강화하라"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출간 기념 대담

노동운동의 위기란 말은 어제 오늘 나온 지적이 아니다. '위기 논쟁' 저 편에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현장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은 '열심히'만 뛰어다닌다고 그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오늘의 위기 해법을 과거에서 찾는다는 말은 노동운동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노동운동은 어떤 위기를 맞았고, 어떻게 극복해 오늘날에 이르렀는가를 검토하는 것, 즉 노동운동 역사에 대한 검토 작업은 노동운동을 고민하는 모든 이의 공통된 관심사다.

이런 관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책 한 권이 나왔다. 오랜 세월 노동운동 역사의 물줄기에 한 번도 이탈한 적 없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이사장이 최근 <한국노동운동사 1백년의 기록>을 펴냈다. <프레시안>은 책 출간 기념 이 이사장과의 대담을 지난 10일 충정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2시간동안 진행했다.

대담은 저술 동기와 관점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 현재 노동운동이 직면한 문제점들에 대한 분석, 현재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이사장은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이 걸어왔던 길을 짚어가며 올해 노동진영 내 첨예한 논쟁을 불러왔던 사회적 교섭 전술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또한 노조 간부의 각종 비리 연루 사건으로 대두된 노조의 민주성 위기 논란에 대해 '현장토론' 강화만이 가장 유효한 해법이라고 강조한 대목도 눈에 띠는 대목이다.

대담에는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가 나섰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박인규 : 책을 일독한 뒤 무척 겸손하게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별 내용마다 평가를 덧붙일 만도 한데, 평가보다는 객관적 기술에 방점이 찍혔다. 오늘 대담자리에서는 책에서 말하지 못한 이사장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해 주길 바란다. 특히 해방 이후와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를 부탁드린다.

책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번 저술의 기본 의도는 '노동운동의 새길 찾기'인 것 같다. 대담에서는 현재 노동운동이 직면한 현실과 이와 관련한 논쟁도 언급하면 좋겠다. 특히 최근 노동운동 '위기'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노동조합의 대표성과 도덕성, 민주성 개념도 등장했다.

또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내셔널 센터 위원장(각 노총 위원장을 뜻함) 선출을 직선제로 하자는 제안도 있다. 일반 국민은 잇따른 노조 비리사건 이후 직선제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조 부패의 근본이 민주성의 형해화에 있는 만큼, 직선제를 통해 노조 민주성을 강화하자는 발상인 듯하다. 이처럼 직선제 논란과 더불어 오늘날 노동진영이 '위기'를 딛고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기 위한 대안에 대해서도 논의해보자.

먼저 <한국노동운동사 1백년의 기록>(한국노동사회연구소. 5월 출간)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알고 싶다.

***이원보, "현장, 노동운동 역사에 대한 관심 부쩍 늘었다"**

이원보 :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 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많이 있다. 최근 교육장에서 만난 현장 활동가나 노동운동가 사이에서 노동운동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이 매우 답답하고 어려워지니까, 현장 노동운동가 사이에서 '역사 알기'에 대한 욕망이 강해지는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절에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식으로 역사에서 난국을 풀 열쇠를 찾으려 하는 움직임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노동운동사를 다룬 기존 책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들은 분량이 두껍거나 여러 책으로 나누어져 있어 연속해서 읽기 어려워 노동운동사를 일별하기 힘든 한계가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사를 쉽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하겠다고 고민하다가 직접 써보기로 한 것이다.

세계 각국 노동운동가들이 한국의 노동운동을 대단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런 나라에서 노동운동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책 한 권 없다면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책을 쓰게 된 주요한 동기다. 우리 노동운동의 위상에 걸맞는 노동운동사 한 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인규 :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책을 들여다 보면 저자의 평가가 상당히 인색하다. 각 장마다 나름의 평가도 덧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평가를 자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원보 :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기본 생각이 가능한 한 당대의 특징에 대해 잘 드러내되, 주관적 평가는 자제하자는 것이었다. 일단 과거사 평가가 쉽지 않다. 과거 있었던 일에 대해 정확히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정 사건은 모두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도 평가를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노동자에게 역사에 대한 섣부른 선입관을 주기 싫었다. 당대 사건의 주역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무슨 활동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보여 주면, 노동자들이 각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서로 토론하면서 그 시대를 평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박인규 : 그런데 해방 이후 최초의 노동자들의 결사체라고 부를 수 있는 전평에 대해서나, 70년대 노동운동 등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한 부분도 있다. 이러한 이사장의 평가는 기존의 다른 서적에 나온 평가들과 차이점이 있기도 하다.

***이원보, "역사 평가, 불가피한 상황 이해가 전재돼야"**

이원보 : '전평'에 대한 기존 평가는 대개 (전평이) 미국을 가볍게 보고 대비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전평이 과학적이고 치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또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었더라도 미국의 강한 냉전 전략 아래에서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보았다. 지금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기존 평가는 경제투쟁 중심이었고, 연대투쟁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조 결성 자체가 정치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요구사항이 무엇이었든 간에 노조를 결성하고, 단체교섭을 요구하고, 파업을 감행하는 것 자체가 국가보위법에 저촉돼 정권의 탄압을 받은 것을 보면, 당시 운동을 단순히 경제투쟁이라고 단언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특정 사안에 대해 평가를 할 경우 당시의 불가피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 해야 한다. 이 책에 드러난 몇 가지 사안에 대한 평가는 이런 관점에서 접근했다.

***박인규, "초심자를 위해 과감한 해석이 필요할 수도"**

박인규 : 당대의 노동운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운동의 주체적 역량을 파악하고, 주변 관계를 충분히 이해해야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는 설명에 공감이 간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정직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의 초심자와 일반인을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해석이나 평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평가보다는 구체적 사실관계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초심자들에게는 전체 맥락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견해나 평가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원보 : 책을 완성하고 다시 읽어보니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 주관적 평가는 자제하더라도 최소한 평가의 준거들은 제시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인데 불충분했던 것 같다. 박 대표의 지적에 일정 공감한다. 후에 기회가 있으면 보완하겠다.

***이원보, "90년 이후 노동운동의 과제, 실질적 민주주의의 달성"**

박인규 : 그럼 이제 오늘날의 노동운동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흔히 일제시대 노동운동은 민족해방 투쟁의 일환이고, 이승만-전두환 정권 시절의 노동운동은 정치 민주화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노동운동은 또 다른 특징들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사장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보나?

이원보 : 이승만 정권 이후 노동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기본권 보장 투쟁과 노조 민주화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고 본다. 물론 피폐한 삶을 개선하기 위한 생존권 투쟁이 기본이었지만, 민주화 투쟁과 생존권 투쟁은 서로 중첩되어 왔고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왔다.

일반적으로 지적되듯 1987년 6월 항쟁은 절차적 민주주의 확보의 계기가 된 대사건이다. 노동운동도 6월 항쟁 이후 현재까지 노동기본권을 상당부분 달성했고 그 점에서 노동관계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상당히 많이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6월 항쟁 이후 우리사회의 최대 정치적 과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었고 노동운동의 최대 과제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특히 1987년 IMF 외환 위기 이후 노동자의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오늘날 회자되는 노동운동의 위기 역시 실질적 민주주의 확보에 대한 대중의 기대에 노동운동 진영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인규, "노동운동 위기,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다"**

박인규 : 과거 언론노조 활동 당시 경험을 비춰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80년대 언론인들은 언론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이유가 '독재 권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꿔말해 '독재권력'만 없다면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지나고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언론은 여전히 바뀐 것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독재정권만 없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당시의 믿음이 다소 순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운동에도 이런 생각을 대입해 볼 수 있다. 1987년 이전에는 노동운동을 가로막는 핵심 이유가 정치적 억압으로 여겨졌다. 그 이후 노동운동의 자율성이 상당부분 확보되었고, 그 결과 민주노총도 건설됐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세력화도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 까닭을 단지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과 자본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노동운동 내부에서 주체의 역량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이를 바탕으로한 주변 정세에 대한 대응이 부적절했기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나아가 노동계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성을 했는지 자문해야 한다.

***이원보, "위기라고 단언할 수 없다. 대중은 외면하지 않았다"**

이원보 : 박 대표의 지적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노동운동 내부의 위기 논쟁 핵심을 잘 짚고 있다. 먼저 '위기'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보자. 노동운동 주체들이 무엇이 변했는지 모르고 있거나, 변화는 아는데,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거나, 대응방법은 찾아냈는데, 실천은 하지 않을 때 위기란 표현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또 노동운동 내부 매커니즘이 붕괴되고, 대중의 관심이 멀어지고, 노동운동이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 또한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이 노동운동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감에 운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대중은 노동운동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 뭐하고 있냐, 제대로 한 번 해봐라'는 자세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 싶다.

단적으로 정말 '위기'라면 '위기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은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모색과 탐색의 시기 혹은 혼란의 시기라는 말이 적절할 듯하다.

***박인규, "대중은 노동귀족간의 밥그릇싸움이라고 질타한다"**

박인규 : 현재 노동운동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는 것 같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노동쟁의들을 보면 대개가 대공장 노조의 경우다. 일반 서민의 시각에서는 '받을 만큼 받는' 사람들이 더 나선다는 인상이다. 연봉 7천만원 받으면서 쟁의하는 것이 노동운동인가란 인식이 일반인 사이에 팽배하다.

일반인 사이에는 현재 노동운동을 노동귀족간의 밥그릇싸움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기존 노조들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현재 노조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계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현재 노조의 대표성에 대한 근본적 의심인 셈이다. 현재 주류 노동운동세력의 활동이 일반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이원보 : 구분해서 봐야 한다. 보수언론이 뿌리고 다니는 사실왜곡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노동운동 주체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현장 조합원들의 생각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생략)또 '위기'라는 말이 주로 민주노총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한다.

민주노총 현장 조합원들을 만나보면 이들은 다소 혼란을 겪으면서도 상급조직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정규직인 이들은 비정규직의 처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는 의식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의 힘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는 조직율, 단결 정도, 조직형태, 투쟁의 집중력, 전략전술의 유효성, 이념성, 정치세력화 정도, 간부들의 역량 등이 있는데, 어느 점에 비춰 보더라도 노동조합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만한 근거가 없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상급조직에서 수없이 강조해도, 현장에서는 힘의 부족을 절감하고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위기를 극복한다면, 바로 이런 힘의 부족을 충실히 채워 나가는 것이 주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박인규 : 현재 상황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지적이 있다. 이사장님이 언급하신 점도 그런 지적 중의 하나다. 현재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묘수가 있는가?

***이원보, "위축된 노동운동, 현장 토론만이 살 길이다"**

이원보 : 쌈박한 묘수가 어디 있겠는가. 원칙을 실천해 가야 하는데 그 하나가 현장 토론을 강화하는 일이다. 오늘날 각급 노조에서는 토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도부가 파업을 하자고 하면 일반조합원은 그 내용도 잘 모르면서도 따라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정작 조합원은 구경꾼 신세가 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관료화 됐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눌려 있는 노동조합을 일깨우는 방법은 현장토론을 부단히 강화하는 것이다. 상급조직의 지침과 현재 정세에 대해서 조합원과 활동가가 상호 소통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와 동기부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

과거 현장에는 여러 개의 현장조직들이 있었다. 현장조직은 지도부를 민주적으로 잘하는가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현장 토론을 활성화 하는 핵심 단위이기도 했다. 오늘날 노조 현장에는 현장조직 다운 조직이 없다는 비판이 많다. 최근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잇따라 터진 노조 간부 비리 사건 역시 지도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현장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지도부의 건강성은 정파나 종파의 이해를 넘어선 건강한 현장조직이 있을 때 더 잘 유지된다.

***박인규, "여전히 대중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박인규 : 운동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 일반 국민이 노동운동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 한 신문사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 한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평소 노조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지 않았던 그 선배는 '노조라도 가진 사람들은 그래도 기득권자다'라고 지적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각은 당시 그 선배의 생각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예컨대 일반인들은 현대차 노조를 보면서 '받을 만큼 받는데 웬 투쟁이냐'란 불편한 심사를 갖고 있다.

이런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노동진영이 진정으로 1천4백만 노동자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요즘 노동진영의 활동에는 가슴에 와 닿는 점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제도 언론들이 노동진영의 활동에 대해 왜곡하는 경향도 있지만 말이다.

***이원보, "부각이 안되고, 역량이 부족해서일 뿐"**

이원보 : 한국노총은 제도상의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 민주노총은 대표적 비정규직 관련 사업으로 50억 기금 마련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1월 대의원대회에서 사업계획이 통과된 이후 각 연맹과 단위노조 별로 실천이 진행되고 있다. 50억 기금은 비정규직 관련 연구사업과 조직사업 등에 사용된다. 민주노총의 여러가지 비정규 관련 사업 중 가장 핵심적 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정규직 노동 관련 사업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추진되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업은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

또 일반인이나 노동 내부에서 노동진영이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적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그 동안 신자유주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허용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비정규 관련 최대 현안인 비정규 관련 법안을 보면, 현재 운동역량으로 온전한 '비정규보호법안'을 쟁취하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 현재 노동운동의 힘이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운동이 강성이라고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강성이라고 불릴 만큼 신자유주의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총파업 등 각종 정치투쟁을 감행했지만, 비정규직이 대폭 증가한 것이 현실이다.

이제 스스로 강하다는 착각이 점차 깨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운동에 대한 허장성세 인식이 깨져가면서 진정한 힘을 기르기 위한 고민이 현장 활동가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인규 : 노동운동 위기의 대표적 징후는 노조 간부들의 각종 비리 행위이다. 현대차·기아차의 채용비리 등이 연일 보도되면서 일반인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기본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노조 간부의 비리는 단지 특정인들의 일탈행위인가?

***이원보, "노조 비리, 수 십 년 째 스스로 점검하지 못한 결과"**

이원보 : 일탈행위이기보다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비리 부정을 그 동안 우리 노동운동이 자체 청산한 적이 없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권력에 의해 강제 청산돼 왔다. 그 과정에서 민주적 세력마저 도매끔으로 매도되고 탄압받았다.

한국노총은 87년 6월 항쟁이후 전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가 달성되는 와중에도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사회발전에 상응하는 개혁작업을 수행했다면 어처구니 없는 리베이트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노총 등 민주노조 세력들도 스스로 자정하고 반성하는 작업을 했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민주노조의 핵심은 민주성 · 자주성 ․ 투쟁성 ․ 이념성인데, 지난 십수 년 동안 여기에 대해 점검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자기 쇄신의 매커니즘이 없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초창기 민주성 유지에 도움이 됐던 현장조직들의 민주적 견제 장치 마저도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상급단체마저도 이를 점검할 여유가 없었다. 외부의 거센 도전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매번 수세적으로 끌려다니다 보니 점검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박인규 : 노조의 민주성 확보의 한 방편으로 거론되는 것이 내셔널 센터 위원장 선출에 직선제 도입이다. 현재는 대의원 투표라는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직선제 도입에 대한 의견은 뭔가?

***이원보, "위원장 직선제, 노조 민주성 확보에 도움될 지 미지수"**

이원보 : 직선제 문제는 1998년 민주노총에서 심도 있게 논의된 바 있다. 당시 이갑용 위원장(현 울산 동구청장) 지도부는 신념에 가깝게 이 사업을 추진했는데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최근 한국노총 개혁방안 속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직선제가 과연 노조의 민주성 회복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검토해봐야 한다. 직선제 도입이 민주성 회복의 한 방편은 되겠지만, 구체적으로 전체 노동운동 혁신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또 노총이 단위노조나 조합원의 결사체가 아닌 연맹의 결사체라는 조직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노총의 구성원은 조합원이 아니라 연맹인 것이다. 직선제를 도입하게 되면 구성원은 연맹인데, 위원장 선출은 조합원이 하는 이중구조를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총연맹의 역할도 혼란스러워 질 수 있다. 연맹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운동이념을 정립하고 정책참가와 정치활동도 해야 하지만 직선제되면 현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총연맹 사업이 혼란으로 흐를 수 있다.

민주성 회복 과제의 핵심은 현장 조합원과 상층 지도부 사이의 괴리를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다. 현장 조합원은 매우 현실적 요구를 하는 반면, 지도부는 이상을 쫒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조율하는 것이 관건이다. 조율이 실패하면 조합원과 지도부 사이에 괴리가 커지게 되고 이에 따라 지도력이 상실되거나 현실주의에 노동운동이 매몰될 수 있다.

크게 보면 사회적 교섭에 대한 논란도 현장과 지도부 사이의 입장 조율 실패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인규 : 사회적 교섭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지난 2월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는 민주성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진 것은 일단 사회적 교섭에 대한 반대 정서가 깊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근저에는 1998년 당시 노사정 위원회 참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있다. 당시 노사정위 참가가 정말 자본에 대한 '완전 투항'이었는지 궁금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이원보, "대정부 전술, 다양할 수록 이롭다", "사회적 교섭 전술 마다할 이유 없다"**

이원보 : 당시 상황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당시 사회적 교섭을 요구한 것은 정부가 아닌 노동조합이었다.

당시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가 사회적 교섭을 요구한 것은 대량실업과 휴폐업이 속출 하는 속에서 현실적으로 총파업은 불가능하고 자칫하면 정리해고를 최초로 도입했던 김영삼 정권 시절보다 더 개악될 것이라는 자체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섭을 통해서 개악을 막고 노동대중의 희생을 최소화 하자는 것이 당시 기본 전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사회적 교섭은 노동진영에서 금기시돼 왔다. 그 결과 노동진영의 전술의 다양성은 매우 약해졌다. 전술은 다양할 수록 유리하다. 사회적 교섭은 전술의 하나이고, 정책참가의 한 방편이기도하다. 사회적 교섭 말고 노동조합이 주요 노동사안에 대해 의제를 설정할 수 있는 계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회적 의제에 대한 선전수단을 보수 언론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그만 기회라고 하더라도 의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기본 생각이다.

2월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를 두고 '모든 폭력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대대 폭력사태도 그런 폭력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조직 체계를 무너뜨린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조직의 위상과 자존을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극단주의가 남발한다는 역사적 경험을 떠올려보았다. 평소에 무척 온순한 사람들이라도 상황이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면 단순하게 정리해버리고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논리도 '사회적 교섭하면 이용만 당하고 노조는 망한다'는 식으로 매우 천편일률적이다.

상황이 힘들어 지면 냉철한 평가와 대응보다 강경론자들이 득세한다.

***박인규, "노동계,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배신감 매우 커 보인다"**

박인규 : 끝으로 노동진영이 현 정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지금껏 노동진영은 민주정부들과 매번 기대와 배신의 사이클을 반복해왔다. 그런데 현재 노 정권에 대한 배신의 강도는 더 심한 것 같다.

노동운동의 방향과 전략은 정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정부를 친 재벌적이라고 평가한다면, 노동운동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궁금하다.

이원보 : 노무현 정권은 현재를 '노동자를 거들떠 볼 수 없는 상황' 즉 경제회복을 위한 불가피 한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노 정권이 스스로 '자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집권 초 권기홍 노동부 장관이 입각하면서 다소 노동자에 비중을 두고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아닌가란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권 장관에 대한 자본의 총공세와 극심한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결국 정권이 자본 파업의 위협에 타협한 모양새가 됐다.

한편 노 정권이 노동자를 배신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노 정권은 노동자들과의 동맹을 통해 선출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조직적 지지도 없었고, 계급 동맹은 아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권력이 노동에 힘을 실어 주겠는가?

박인규 : 그렇다면 노동진영은 노 정권 집권에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요구를 할 자격도 없다는 말이 된다.

***이원보, "노 정권이 언제 노동자 편인 적이 있나"**

이원보 :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시대적 과제에 대한 노 정권의 책무를 물어야 한다. 김대중 정권의 시대적 책무가 절차적 민주주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노 정권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완성해 가야 하는 임무를 지고 있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는 양극화 해소이다. 노 정권 집권 이후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즉 노 정권이 시대적 책무에 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 이것을 추궁해야 한다는 얘기다.

***박인규, "운동의 힘, 운동이 사회와 함께 할 때 생겨"**

박인규 :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운동이 힘을 가질려면 대중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진영도 노동운동의 가치, 필요성 당위성 등을 알기 쉽게 설득하는 노력 또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노동운동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일반 대중의 정서를 읽고 그에 맞는 활동을 펼쳐가야 한다. 또 운동가들이 스스로 활동에 대한 정당성과 당위성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전체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사회와 함께하는 노동운동만이 재도약할 수 있다.

***이원보, "정파와 주관을 넘어 운동에 힘을 보태자"**

이원보 :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학교에서도 노동법이나 노동경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고, 노동진영 연구자도 점점 줄고 있다. 언론도 노동을 전담하는 논설위원을 두고 있는 언론사도 없다.

하지만 노동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유리할 때란 역사상 그리 많지 않았다. 더욱이 상황은 언제나 굉장히 빨리 변한다. 이에 대한 대응은 더욱 빨라야 한다. 위기도 이런 대응이 자꾸 늦어지고 부실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말이다.

할 일이 많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히 집어내고 방향을 정확히 세워서 당장 필요한 것은 실천하고 중장기적인 전략을 꾸준히 추진해가야 한다. 노동운동 주체가 오늘의 엄중한 상황변화를 깊이 성찰하고 혁신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에 열정이 있는 주변 사람도 정파나 주관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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