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신해철 학원광고…"참고 견딜 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신해철 학원광고…"참고 견딜 일"

[박동천의 집중탐구]<13>이익과 의로움

제3장 이익정치와 공익

제1절 이익과 의로움

제2장에서 나는 "지역주의"를 탓하는 문제의식 주변에 약간의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보았다. 막연하거나 구체적이거나 반감에 기초하는 정치적 선호보다는 적극적인 비전에 기초하는 정치적 선호가 바람직하고, 엽관제나 향리주의 자체가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나는 일단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직접 문제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본질적 성격에 관한 오해라고 말했다. 이제 절차적 민주주의와 이익정치가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 전제 위에서 건설되며, 그렇게 이해된 본성을 가진 인간들을 어떻게 대접하자는 원리인지를 살펴보고, 아울러 그렇게 했을 때 공익을 기대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본다.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 "이익이 생길 기회를 맞아서는 의로울지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내놓고, 오래 된 약속에 관해 지난날에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이루어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論語』, 「憲問」, 13). 안중근의 유묵 중 하나인 "見利思義 見危授命"의 출전이다. 공자는 또, "군자는 의로움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익에서 깨닫는다"고도 했다 (『論語』, 「里仁」, 16).

의로움을 저버리고 이익을 쫓는 행태를 공격하고,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하기는 대단히 쉬운 일인데, 사실 목전의 이익을 버리고 의로움을 선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도덕주의자들은 그렇게 못하는 사람을 사악하거나 나약해서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는 사악하거나 나약해서 명백히 의로운 길을 버리고 악한 이익을 쫓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3자의 눈에 의로움을 버리고 이익을 쫓는 것처럼 비치는 행동 대부분에서 행위자 눈앞에 보이는 이익은 분명한 데 비해서, 의로움이란 분명한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이익에 팔렸다"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런 비난을 당사자가 수긍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다시 현재진행형인 논란 하나를 사례로 들어보자.

가수 신해철이 학원광고에 나온 것을 두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그동안 비판을 서슴지 않던 사람이 특목고 입시준비로 영업하는 학원의 자본에 팔려갔다는 비난이다. 신해철은 "돈에 팔렸다는 능멸을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지난날 했던 말을 잊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학습목표와 방법추구'라는 광고카피에 끌렸다"고 해명했다.
▲ ⓒ프레시안

신해철이 출연료를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출연료를 받지 않았더라면 학원광고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일단 이익을 추구한 행위가 된다. 그러나 이익을 추구하면 곧 의로움을 저버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익 중에는 때로 의로움의 의미가 거의 섞여있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살인범의 이익, 가벼운 접촉사고에서 다친 곳도 없이 무작정 병원에 눠서 보험금을 뜯어먹는 파렴치한의 이익, 그런 파렴치한을 거들어 진단서를 떼주는 양심불량 의사의 이익, 등등,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례의 목록은 무한정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익 중에는 의로움과 상통하는 유형도 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은 대개 당사자에게 영광과 명예와 보람이라는 이익을 준다. 그의 의로움 덕택으로 직접 도움을 받은 사람은 안전과 신뢰라는 이익을 누리고, 나아가 그렇게 개인적으로 체험된 안전과 신뢰는 사회전체로 은은하지만 매우 강력하게 퍼져나간다. 모함에 굴하지 않고 노력해서 마침내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의 의로움, 제국주의의 부당함을 알리고 응징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의 의로움, 자기 몸을 불살라 노동현장의 모순을 세상에 알린 전태일의 의로움, 이국땅 도쿄의 지하철역에서 취객을 구하고 숨진 유학생 이수현의 의로움 등등, 모든 의로운 행위는, 그것이 의로운 만큼 본인에게 그리고 직접 수혜자는 물론이고 간접 수혜자인 사회전체에게 일정한 차원의 이익을 남긴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항목 사이에 관계는 네 개의 갈래로 나눠진다. <표7>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도랑치고 가재잡기"와 같은 속담의 그림자 안에서 사람들은 흔히 B와 C만을 생각하고 A와 D는 아예 고려에서 빼버리기가 쉽다. 하지만 명백히 도랑을 치지 않고도 가재를 잡을 수 있고, 도랑을 치고 가재를 못 잡을 수도 있다. 또는 공자처럼 이익과 의로움을 대조하는 말에만 자주 노출되다 보면, A와 D만 있고 B와 C는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다. 이익이면 의롭지 않고 의로우면 이익이 아니라고만 생각할 뿐, 이익이면서 의롭고 이익도 아니고 의롭지도 않은 경우들에는 아예 시선 자체를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두 항목이 완전히 정비례의 관계, 즉 B와 C만 가능하고 A와 D는 불가능하다면, 이미 그것들은 두 항목이 아니라 같은 항목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임을 말해 줄 뿐이다. 마찬가지로 두 항목이 완전히 반비례의 관계, 즉 A와 D만 가능하고 B와 C는 불가능하다면, 두 항목처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이는 양쪽 끝이었다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정치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어떤 두 개의 항목 사이에도 이와 같은 단선적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사회와 관련되는 명제에서 변수가 둘이라면 결과는 사실상 언제나 네 개의 갈래로 나뉜다. 이 점은 유치한 흑백논리를 벗어나고, 정치사회가 폭력대결로 타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심해야 한다.

두 항목 사이의 관계는 항상 2×2 행렬을 만들기 때문에 네 갈래가 되고, 그 네 갈래가 각각 어떻게 분포하는지는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험적인 문제이다. 즉, 추론이나 상상을 기초로 논쟁할 일이 아니라 현실의 실제 모습을 들여다 볼 일이다. 그런데 이익과 이로움의 관계는 약간 독특해서 세 갈래가 되며, 한 갈래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은 경험적 확인이 필요없이 추론만으로 확정할 수 있다.


<표8>을 보자. 앞에서 말했듯이, 의로운 행동 가운데에는 본인에게도 이익을 주고 직접 수혜자 또는 사회 전체에게 이익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의로운 행동의 현장에서 행위자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 본인에게 무슨 이익이냐고 당연히 반문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그가 사후에 받게 되는 영광이나 명예 또는 보상을 "이익"이라고 부르면 일상적인 한국어 용례에서는 그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지기가 쉬울 것이다. 또는 살신성인으로써 그의 인격이 완성되는 "이익"이 있었다고 하면 내가 말을 배배꼰다고 여길 사람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불쾌할 수 있는 논란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본인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의로운 행동의 직접 수혜자 또는 사회 전체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의로우면서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행동은 생각하기가 불가능하다. 의로움이란 그 자체로 개인의 미덕이자 사회적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의로움이 사회에게 이익이 되느냐 마느냐는 경험적으로 확인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고, 개념 안에 자체로 내포되는 이치에 해당한다. 반면에 이익이 되는 행동 중에는 의롭지 않은 것도 있을 수가 있다. 행위자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누구를 해치는 경우이다. 그리고 의롭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행위자 자신에게도 이익이 없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 이른바 남을 해치고 자기도 해치는 행위에 속하는 형태이다. 물론 구체적인 사정에서 이익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유보조건들이 필요하지만, 현재의 논의와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파고들어가지는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따져야 할 형태가 있다.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지만, 남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남을 특별히 돕는 것도 아닌 경우이다. 이것은 이익이 있는 부류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의롭다고 봐야할지 아니면 의롭지 않다고 봐야할지가 아리송하다. 신해철의 사례와 같은 경우이다. 의롭다고 말하면 공자님이 무덤에서 실망하실 것 같아서 저어되지만, 그렇다고 딱히 불의는 아닌 것 같다. 이 지점의 불확실성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에서 세속화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나는 강조하고 싶다.

종파를 막론하고 수도승들이 뭘 추구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만약 어떤 수도승이 자신의 행위와 관련해서 의로움의 기준을 높게 설정하고, 자신의 행동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자성하고 스스로 경책하는 것은 나름대로 고귀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강요해야 하는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에 따라 스스로 추구할 의로움의 기준은 한없이 높아질 수 있다. 나라가 어지러운데 자결로써 강직을 과시하지 못한 것을 수치로 여길 사람도 있고,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을 살려내지 못한 것을 자신의 죄로 여길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 도덕의 차원으로서,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적용할 수 있는 표준이 아니다. 개인적 도덕을 아무 여과 없이 바로 사회적 강행규범으로 연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도덕은 없어지고 전쟁만이 남는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도덕이나 종교 때문에 벌어지는 것들이 가장 지독하고 결과적으로도 가장 어이없이 허망하다. 영토나 자원이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은 반드시 바람직한 수단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해결해야 할 갈등을 해결하는 의미는 있다. 도덕이나 종교를 명분으로 한 전쟁은 결과와 명분 사이에 아무런 연관 고리가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질서를 논하는 차원에서는 개인적 수양의 차원과는 다른 기준을 정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따위의 교과서식 문구를 되뇌려는 것이 아니다. 법과 도덕이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법은 사회질서의 유지를 통한 개인적 자유의 극대화에 목적이 있는 반면에, 도덕은 그 목적 자체가 사람마다 다른 일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법은 결과의 효용을 중시하는 것이지만, 도덕은 결과를 중시할지 동기를 중시할지 효용을 중시할지 계시를 중시할지, 또는 다른 어떤 것을 중시할지가 모두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는 말이다. 또 한번 다른 말로 표현하면, 법은 어느 정도 통일될 필요가 있지만 도덕은 통일되지 않아도 괜찮고 통일시킬 수도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사회의 질서를 논할 때에는 신해철의 행위가 의롭든지 말든지 애당초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높은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한 사람에게는 그의 행동이 의롭지 않게 비칠 것이고,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실망을 표현하면 된다. 하지만 그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덧붙이자면, 진보진영일수록 이런 대목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하면서 일종의 결벽증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개인의 자유를 역설해 온 만큼 신해철에 대한 비난도 개인의 자유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 태도가 진보정치의 효율성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높고 고상한 도덕적 표준에 미달하는 행동을 모두 정죄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선을 넘지 않는 한 참아줄 것인가의 차이는 사회의 개명도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 가운데 하나다. 개인들의 취향이 아주 좁은 범위에 국한된 것만 허락되는 사회는 곧 극소수 지배층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폐쇄사회라는 말이 된다. 나머지 인구가 압도적인 수효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압제에 굴종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개명되지 못했다는 뜻과 같다. 정치적 가치에 관해 광범위한 연대가 일어나려면 어느 정도의 추상적인 사유능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 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관용(寬容)과 관인(寬忍)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사회에서는 이미 관용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있지만, 나는 그것을 관인으로 바꿔야 맞다고 본다.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용납하는 데에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아주는 데에 취지가 있기 때문이다. 볼테르의 말로 잘못 전해졌지만(위키백과 기사 "관용" 참조http://ko.wikipedia.org/wiki/%EA%B4%80%EC%9A%A9), 어쨌든 지금은 유명해진 구절을 보자: "나는 그대의 생각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대가 그 생각 때문에 탄압을 받는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이 말의 화자는 논적의 입장을 관용하지는 않지만 관인은 하고 있다. 신해철의 언행을 관인한다는 것은 그를 교육정책에 관한 지도자로 인정한다는 뜻도 아니고, 그가 잘했다고 찬양하는 뜻도 아니다. 단지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특별히 저지르지는 않았으니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말이나 글로 비난하는 것은 물론 참고 견디는 범주 안에 속한다.

신해철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연예인에 대한 일시적인 관심에서 별로 멀리 나아갈 일이 못 되는 주제다. 하지만 이익이면 곧 의로움과 반대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은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적 이익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도 이익이고, 단기적, 말초적 이익뿐 아니라 장기적, 심층적 이익도 있다. 배타적 제로섬 이익도 있지만 상호적 논제로섬 이익도 있다. 애당초 의로움이나 선, 진리나 아름다움, 사랑, 용기, 친절, 헌신, 기타 등등, 모든 전통적 덕목들이 어디에든 이롭지 못하고 순전히 해롭기만 하다면 결코 덕목일 수도 없는 것이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와 같은 발상을 대전제로 삼아서 태어날 수 있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