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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구 없소>? 이제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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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구 없소>? 이제 <일어나>!"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이젠 함께 노래를 부를 때

지난 3월 7일 오후, 용산 참사 현장에서 대학생 네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학생들은 소박한 문화예술 활동으로 추모의 뜻을 표하고자 했다. 그래서 땅으로는 부족했는지 하늘의 소유권마저 주장할 태세로 솟아 오른 고층 건물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 곳을 찾았다.

주민들의 부탁으로 쓰레기와 시위용품들로 어지러워진 동네부터 청소했다. 누구는 살벌한 낙서가 있는 벽에 붓을 가져다 댔고 누구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용역들이 나타나더니 이내 경찰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기타를 든 학생은 한영애의 <누구 없소>를 부르고 있던 참이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어둠은 늘 그렇게 벌써 깔려 있어
창문을 두드리는 달빛에 대답하듯
검어진 골목길에 그냥 한 번 불러 봤어
날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 모두
오늘밤도 편안히들 주무시고 계시는지
밤이 너무 긴 것 같은 생각에
아침을 보려 아침을 보려 하네
나와 같이 누구 아침을 볼 사람 거기 없소
누군가 깨었다면 내게 대답해 주


-<누구 없소> 중에서 (윤명운 작사·곡, 한영애 노래)

"거기 누구 없소"라고 불렀더니 대뜸 용역들이 대답하고 경찰들이 찾아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누구 없소>의 원래 주인인 한영애는 지난 2월, 무려 8년 가까이 진행해오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마지막 방송을 해야만 했다.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가 EBS의 일방적인 통보와 "낮은 질" 운운하는 발표에 모욕을 당하며 페이지를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내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누구는 한영애가 방송에서 드러낸 어떤 성향 때문이라는 얘기도 했다.

지난 1년 새 방송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문화 프로그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진행자가 바뀌거나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방식이 무척 거칠다. 후속 프로그램으로 지지기반을 이어가는 공식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일이 처리되는 것은 대개 윗선의 호령 때문인 경우가 많다. YTN의 수훈 코너인 '돌발영상'마저 가차 없이 없어지는 마당에 비중 낮은 문화 프로그램에 대한 조치에서 영민한 부드러움을 기대하긴 힘들지 모른다. 그러고선 그런 건 없어도 된다느니, 과외방송이 효과적이라느니 하는 의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을 뿐이다. 회사 차원의 일만은 아니다.

▲ 지난달 26일 오후 한달넘게 분향소가 마련돼 있는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뉴시스

권력이 바뀜에 따른 문화예술 정책의 연속성 단절 문제는 새삼스럽지 않다. 단체장을 내부에서 '사장님'으로 부르는 지방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들 중 하나로 성장해가던 '부천판타스틱영화제'는 수년 전 지역 권력의 변화에서 파급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태 덕에 기세가 꺾여버렸다. 2005년과 2006년, 대중음악의 새로운 기운과 가능성을 갈무리하여 앞서 선보였던 '광명음악밸리축제'는 지방행정권력이 교체되자 지역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네잔치로 '승화'되었다.

중앙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많이 알려졌다시피 독립영화 지원이 중단되었고, 예술영화전용관마저 모종의 압박을 받았다. 낙하산 인사에 의한 연쇄작용은 모 오페라단 단원들이 특유의 성악 발성으로 투쟁가를 부르는 진기한 장면을 이끌어냈다. 자기 허물을 잊지 않고 남의 허물도 오래 새겨주는 사람이 목사님이라면, 제 허물은 잊어도 남의 허물만큼은 기억하는 사람이 기성 정치인들이라고 알려주었으니 의미는 있는 일들이다.

작년 11월에 방송된 '윤도현의 러브레터' 마지막 회에 김제동이 초대 손님으로 나왔다. 김제동의 폭로(?)에 의하면 윤도현은 자기 사비를 들여 무명이었던 김제동에게 몰래 출연료를 챙겨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날 김제동은 마이크를 잡고 제법 진지하게 김광석의 <일어나>를 불렀다. 음악과 무관한 방송인이 부르는 노래가 그렇게 인상깊었던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두 달 후인 올 1월, 한편에서 사회안전망보다 정권안전망과 지배안전망 구축에 골몰하고 있던 나라에서는 비극이 일어났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 봐도 소용없었지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 <일어나> 중에서 (작사·곡: 김광석, 노래: 김광석)

감춰두었던 새의 둥지를 드러낸 겨울나무들이 줄지어 선 계절에 어떤 노래들은 의도와 무관하게 무언가를 누설한다. 장담컨대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거기 누구 없소?"라고 물을 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혹여 자기 등을 떠밀듯 서둘러 잊지는 않았을까. 살아있는 사람이 떠난 이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기억이다. 그리고 음악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모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은 뿌리 없이 떠돌지만, 그럴 때에 가끔 꽃을 피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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