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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박물관'이 순국선열 명예를 더럽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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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위안부 박물관'이 순국선열 명예를 더럽힌다고?"

[인터뷰] 양징자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일본건립위 대표

'환향(還鄕)녀'. 비극적인 한국 여성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고려 시대에 몽고 조정에 끌려간 공녀, 조선 시대에 명나라 조정에 잡혀갔다 돌아온 '속환녀' 등 한국 역사 속에는 공물 취급을 받으며 대국으로 끌려가 성 노리개가 됐던 여성들이 주기를 반복하며 등장한다. 가장 최근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가 되어야만 했던 조선 여성들이 그렇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직 생존해 있는 위안부 여성은 과거 고국으로 돌아온 여성들이 받았던 '손가락질'에서 벗어났을까. 양징자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일본건립위원회' 대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양징자 대표. ⓒ프레시안

10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한국정신대문제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양징자 대표가 꼽은 위안부 여성의 가장 큰 상처는 같은 동포에게 받는 냉대와 무관심이다. 그가 "아직도 전쟁의 희생자인 여성들이 '손가락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잘라 말하는 것도 이런 현실 탓이다.

재일교포 2세인 양징자(52) 대표는 1991년 재일 교포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대응 활동을 하고자 발족한 '우리여성네트워크'를 시작으로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 집회와 각종 캠페인 행사를 주도하는 이른바 '위안부통' 활동가다.

끝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손가락질 '환향녀'

양징자 대표의 말대로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환향녀'를 보는 시각은 다를 바 없다. 현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둘러싼 논란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2003년부터 준비를 시작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건립위원회'는 2005년 서울시와 협의를 통해 서대문독립공원 내 매점 부지를 박물관 부지로 선정했다. 이후 3년 동안 박물관 건립 사업인가를 기다렸고 결국 지난해 10월 서울시는 건축을 허가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황이다. '반대'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광복회 등 독립유공자단체는 "서대문독립공원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순국선열에게 명예훼손이며 일본에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라며 서울시에 건축 허가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박물관 건립을 위해 필요한 매점 철거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등 공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 8일, 그간 박물관 건립을 위해 노력해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박물관 부지에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착공식-희망의 터 다지기' 행사를 열었다. 일본에서 온 60여 명의 방문단을 비롯해 2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축제처럼 흥겹게 진행됐다. 그러나 여전히 '반대'를 고수하는 광복회 등은 한편에서 기자 회견과 반대 집회를 열었다. 착공식 도중 독립유공자단체 회원 일부가 식장에 들어와 소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양징자 대표는 박물관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독립유공자단체들 회원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를 두고 "정말 충격이었다"고 소회했다.

"독립운동하신 분에 대해서는 나는 구체적인 상이 없었다. 그냥 좋은 일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분들이 있어서 조국을 되찾게 되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겪은 설움은 '망국노'의 설움이라고 배웠다. 독립 운동하신 분들이 있어 나라를 되찾게 되어 이국땅에 살면서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거라 배웠는데….

그런 분들이 이런 한심한 주장을 하고 계신다는 걸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 충격이었다. 내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모르는 게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모르고 행복하게 지낼 해외교포 자녀들도 있을 텐데…."


양징자 대표는 "대체 왜 그럴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양 대표는 "결국 위안부 할머니도 똑같이 일제 식민지 통치의 피해자"라며 "어디까지나 같은 피해자로 껴안아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일본에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알게 된다면 또다시 상처를 받게 된다"며 "안 그래도 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신 분들인데 그럴 순 없다"고 재차 당부했다.

양 대표는 반대가 있다는 이유로 박물관 건립 승인에 미온적인 서울시에 대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분들(독립유공자단체)은 굉장히 뿌리가 깊어 쉽게 입장이 바뀌진 않을 듯 하다"며 "결국 해결을 위해서는 서울시와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양징자 대표는 송신도 할머니를 통해 위안부 여성의 상처를 가슴으로 느낄수 있었다. ⓒ프레시안
"동포에게 버림받은 위안부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양징자 대표의 생각은 일본에 있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로 이어졌다. 이미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동포와 한국 정부로부터 상처를 받아온 그들이었다.

그런 그도 처음 활동에 뛰어들 때는 할머니들에게 얼마나 큰, 어떤 상처가 있는지 잘 몰랐다. 그는 "처음 위안부 문제를 시작할 때는 피해자가 나타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단순히 문제를 머리로만 인식하고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를 깨닫게 해준 인물이 송신도 할머니였다. 위안부의 피해자로서 일본에서 숨죽여 지내온 송신도 할머니는 양 대표가 활동해온 '재일위안부재판을지원하는모임'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던 당사자다.

송 할머니의 옆구리와 넓적다리에는 위안부 당시 군인에게 칼로 베인 상처가, 팔에는 '가네코'라는 당시 이름이 문신으로 남아있다. 군인에게 맞아 찢어진 고막 탓에 현재는 보청기 없이는 잘 들을 수도 없다. 일본 패전 후 일본 군인의 꼬임에 넘어가 일본으로 왔지만 결국 버림받고 그후 재일 조선인 하재은을 만나 현재 살고 있는 미야기현에서 살게 됐다.

양 대표는 "할머니를 통해 민족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991년 11월, 다른 이들과 함께 '종군위안부 여성 네트워크'를 만들었던 양징자 대표는 이 모임을 통해 송신도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을 두고 "상상을 초월했다"고 설명했다.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는 내게 대놓고 '네가 조선 사람이야? 난 조선 사람 싫어'라고 말했다.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후 '매운 거 먹냐? 매운 거 좋아하는 거 보니 바보다. 조선 사람은 매운 거만 먹어서 머리가 나쁘다'며 계속 염장을 지르려고 했다. 내가 조선 사람인 게 싫은 눈치였다.

하지만 며칠 계속 지내보니 할머니의 말은 내가 아닌 할머니 당신을 도와주지 않은 동포를 향한 분노인거 같았다. 자신을 차별하고 폭행을 가했던 일본 사람보다도 분노는 더 심한거 같았다. '같은 동포인데 왜 도와주지 않았냐'는 마음이 굉장히 강한거 같았다."


한복을 팽개치던 위안부 할머니, 마음열고 "나도 인간다워졌다"

양징자 대표는 "할머니는 시종 '사람은 믿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회고했다. 할머니 자신의 뒤틀린 인생 자체가 사람을 믿었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신도 할머니는 16살 때 방직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일본군 위안부로 팔려갔다.

양징자 대표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몇몇 장면을 회상했다. 처음 할머니를 만난 날, 한복 입은 인형을 선물로 드렸을 때였다.

"할머니는 인형을 보시자마자 '창피해서 입을 수 없다'며 눈앞에서 패대기를 치셨다. 우리는 물론 당황했다. 할머니는 일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감춰야만,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체득하셨던 것으로 보였다."

송신도 할머니는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으로 와서 기자 회견을 할 때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할머니들이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오니 일본말로 '너희들 창피하다. 일본에 오는데 양복이라도 하나 사오지…. 한복은 창피한 거니깐 양복 입고 와라. 그리고 일본에선 한국말 안 통하니 일본말을 배워 와야 한다'고 호통을 치시더라."

그러나 양 대표와 활동가들은 할머니의 '변화' 또한 목격했다. 1993년 4월에 시작한 재판이 2003년 4월까지 10여 년이 걸리면서 할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 양징자 대표는 "제발 일본 우익의 주장을 한국 사람이 하지 말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레시안

양징자 대표는 "서로 부대끼며 재판을 진행한 지 5년쯤 되자 할머니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그 즈음 할머니는 우리에게 '니들 때문에 재판을 해서 재미있고 좋다'며 "자신도 '인간다워졌다'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양 대표는 "할머니가 우리를 믿기 시작한 때부터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그때 할머니의 '인간다워졌다'라는 말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소회했다.

"인간이 자신을 인간다워졌다고 말하다니…. 아픈 말이다. 자신이 인간답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거다. 사실 할머니가 인간답지 못한 게 아니라 인간답지 못한 삶을 강요당한 거다."

그가 못내 서글프게 기억하는 장면은 또 있다. 1997년 송신도 할머니가 고국을 방문해 '나눔의 집'에서 사는 위안부 할머니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때 송 할머니가 한복을 대하는 태도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정작 나눔의 집으로 모시려고 하니 '내가 왜 가야 하느냐'며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할머니들을 만나고 나선 노래도 하고 춤도 추셨다. 그때 할머니들이 건넨 한복을 입었다. 노래하면서 많이 우셨다. 그동안 맺혀 있던 모든 것들이 그 눈물과 함께 흘려갔던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민족에 대한 서러움이…."

그토록 싫어하던 하얀 한복을 입고 구성진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송신도 할머니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던 모습을 양징자 대표는 잊을 수가 없다.

"일본 우익과 같은 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 1993년 4월부터 2003년 4월까지 10년간 일본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지기하면서 송신도 할머니가 변하는 과정을 그린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프레시안
결국 양징자 대표는 송신도 할머니의 10년간의 재판을 영상으로 담은 자료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다큐멘터리 작가 안해룡 씨가 감독을, 양징자 대표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그렇게 지난 2월 26일 개봉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현재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며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오는 4월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됐다. 영화에는 1993년 4월에 시작해 2003년 4월까지 진행된 재판을 거치며 점점 변해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양징자 대표는 독립유공자협회로 인해 박물관 건립이 안 되고 있다는 사실을 송신도 할머니에게 알리지 못했다. 그간 쌓인 상처를 생각하면, 송 할머니가 소식을 들을 생각만 해도 아찔해진다. 대신 그는 한국에서 영화가 개봉돼 한국 젊은이들이 할머니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양징자 대표는 이번 한국 방문에서 박물관 건립을 위해 일본에서 모은 1800만 엔을 기념회에 전달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모금 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속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며 "제발 일본 우익 세력의 주장을 한국 사람들이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왜 한국 사람이 일본 우익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일본 우익들이 한국 사람이 자신들과 똑같은 말을 할 때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가.

그런 말을 들을 때,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아무 말도 못한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한국에 원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한 마디 말을 못한다.

한국 내에서 독립운동단체가 박물관 설립을 반대하고, 뉴라이트에서 새로 편집한 역사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정말 당황스럽다. 일본 우익들은 뉴라이트 등이 주장하는 것을 자신들의 논리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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