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이런 지적은 문학이나 만화를 영상화할 때 부각되는 '언어'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무어는 괴짜답게 영화나 문학의 장르 법칙을 넘어선 만화 장르의 독창성에 근거해서 원작을 썼다고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왓치맨>을 영화로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스나이더는 원작 [왓치맨] 을 참고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스나이더의 <왓치맨>은 무어의 [왓치맨]에 대한 주석인 셈이다. 이를 위해 스나이더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최대한 원작에 충실하게 따라가는 한편, 액션과 시각효과를 극대화해서 만화와 다른 차원의 그래픽 실감을 만들어냈다. 하기야 이게 스나이더의 장기라면 장기일 것이고, 그래픽노블을 영화화하는 코믹회사들의 전략일 것이다.
중요한 건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이다. 무어의 <왓치맨>은 경제 불황과 신보수주의의 출현이라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적절하게 버무려서 '유사 역사'를 만들어냈다. 원작의 이야기가 코미디언과 오지맨디아스를 중심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 닥터 맨해튼은 신에 가까운 존재이다.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미국인이다"는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신이 존재하는 한 갈등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오지맨디아스는 맨해튼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계략을 쓰는 것이다. 신의 판단이 흐려질 때, 이야기는 비로소 시간의 화살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 '코미디언'은 국가를 통한 평화의 달성이 결국은 폭력에 의지한 치안의 확립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
코미디언과 오지맨디아스는 각각 국가와 아나키즘을 상징한다. 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세계를 두 체제로 분할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이 둘이다. 그리고 아나키스트 앨런 무어는 국가를 통한 평화의 달성이란 것이 결국은 폭력에 의지한 치안의 확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코미디언은 이를 보여주는 극명한 존재이다. 영화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로리 주피터의 생모를 성폭행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잔인하게 폭력을 가하는 코미디언의 모습에서 이런 사실은 은연중에 드러난다. 원작에서 코미디언은 매카시즘 열풍을 등에 업고 동료 슈퍼히어로에 대한 마녀사냥에 동참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런 주제의식은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스나이더가 이를 몰라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왓치맨>은 코미디언과 오지맨디아스의 대립에 중점을 두기보다 전쟁과 파괴를 불러온 실체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원작과 달리 영화는 희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강조점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평화를 위해 힘쓰던 닥터 맨해튼이 모함을 받고 화성으로 도피한 뒤, 실크 스펙터를 불러 "내가 인류를 구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닥터 맨해튼이 만들어놓은 완벽한 시계 모양의 구조물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우주를 상징한다. 신이 감아놓은 태엽에 따라 움직이는 잘 만들어진 시계가 곧 세계의 평화이다. 인간은 이 평화를 어지럽히는 존재일 뿐이다. 맨해튼의 질문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성찰이다. 이 존재를 제거해버리면 평화가 오지 않겠는가라는 반인간주의적 관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시계는 실크 스펙터의 과거에 숨겨져 있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무너진다. 그리고 생모와 이루어지는 '화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구성한다.
▲ <왓치맨> |
이 모든 건 영화 <왓치맨>의 배경인 뉴욕이라는 도시를 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스나이더는 분명 의도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령처럼 쌍둥이 빌딩은 영화 <왓치맨>을 지배하는 강렬한 이미지이다. <왓치맨>을 영상으로 옮겨놓는 단순 작업이나 할 생각이 잭 스나이더에겐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 <왓치맨>은 앨런 무어의 원작에 대한 헌사이자 동시에 9.11테러와 부시 정권을 거치면서 상처 받았던 뉴요커의 희망을 복원하기 위한 위무이다. 따라서 <왓치맨>은 최근 만들어지는 뉴요커 영화와 맥을 같이 한다. <숏버스>가 보여주는 60년대적인 것의 귀환은 <왓치맨>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60년대를 다시 되살려내고자 하는 열망이 정치화한 것이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라고 보는 건 그래서 단순한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오바마를 통해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보고자 했던 분위기가 고스란히 <왓치맨>에도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폐허로 남은 영화 속 뉴욕의 모습은 9.11테러 직후의 광경을 그대로 투영시키면서 실제의 기억을 촉발한다.
이 황폐하고 잔인한 현실이 남긴 건 평화와 자유에 대한 회의이고 삶에 대한 허무주의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이 허무주의에 대한 메시지처럼 보인다. 완벽하게 만들어진 시계장치 같은 인간 세계를 무너뜨리는 '주체'에 대한 철학이 여기에 스미어 있다. 이건 '참여'에 대한 호소이고, 주체의 자리를 객관주의의 틈새에 불러들이는 일이다. 닥터 맨해튼의 말처럼, 폭력과 악이 뒤섞인 진흙 속에서 실크 스펙터와 같은 '아름다운 연꽃'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는 시계장치가 아니라, 기계적 인과론과 공리체계를 넘어선 '기적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로어셰크라는 인물의 역할이 흥미롭다. 원작의 로어셰크는 어머니의 타락을 세상의 타락과 동일시하는 것이나, 복수심과 멜랑콜리로 인해 법을 환멸하며 반사회성을 띠는 것이나, 여러 모로 햄릿을 닮아 있다. 로어셰크야말로 치명적 사건이 만들어낸 트라우마 자체이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무늬가 달라지는 그의 얼굴이 이를 상징한다. 로어셰크의 얼굴형상은 동명의 심리학자가 만들어낸 심리테스트 무늬를 연상시킨다. 로어셰크는 무의식의 상징화라고 할 수 있다.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이 성공해서 평화와 화해의 세상이 찾아오면, 로어셰크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가 사라져야 세상에 평화가 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로어셰크는 궁극적으로 '계급투쟁'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로어셰크는 닥터 맨해튼이나 오지맨디아스, 또는 코미디언이나 나이트아울과 전혀 다른 출신성분을 가졌다. 굳이 따지면 코미디언 정도나 그와 비슷할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가 만나서 규정한 60대적 계급관을 로어셰크라는 인물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는 퇴장해야 하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는 다시 돌아온다. 억압당한 것이 돌아오듯이 말이다. 히피와 게이를 경멸하는 우파신문사에 로어셰크의 일기가 도착한다는 설정은 그런 면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자기의 이해관계를 배반하고 계급의 적을 지지하는 신보수주의 이후의 계급적 '현실'이 <왓치맨>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런 종결을 통해 <왓치맨>은 허구에서 현실로 자신의 문제의식을 확장한다. 영화 <왓치맨>은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안티테제를 형상화했던 원작의 성격을 영화에서 되풀이한다.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로서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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