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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혐오한 盧의 자기모순…'재미없는'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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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혐오한 盧의 자기모순…'재미없는' 진보

[박동천의 집중탐구⑨] 첫째 매듭

제7장 첫째 매듭

진보적 지향은 사회를 질적으로 개선시키기를 원한다.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 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형태의 사회를 구성해보려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적 지향은 본질적으로 말이 앞설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를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변경하는 일은 모델하우스를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말로써 먼저 설득하고 그들의 협조를 토대로 다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협동적 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란 정파적인 의미에서나 공동체적인 의미에서나 다분히 신중이 미덕으로 통하는 사업이다.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의 말대로 "젊은이들의 결함 때문에 아니라 그들의 장점 때문에 젊은이들에게는 알맞지 못한 사업"이 곧 정치다. 오크쇼트가 "젊은이들의 장점"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도전적인 실험정신이다. 그런데 정치라는 사업에서는 왕성한 실험정신이 미덕이 아니라는 얘기다. 각 개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최대한 창의력을 발휘하고 자유분방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공공생활의 질서는 차분하게 안정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잦거나 너무 속절없는 변화는 아무리 선의에서 나오고 아무리 결과가 바람직하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폐단이다.

그러므로 진보정치가 성공을 거두려면 변화 후의 결과가 바람직하리라는 청사진에 더해서, 변화 과정 역시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다는 설득까지를 이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부담까지를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다고 여길지는, 변화와 불확실성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따라서 크게 좌우된다. 이 점에서도 한국사회의 배경은 진보정치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한국사회에서 변화를 두렵고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풍토가 자라난 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교의 복고주의 역사관이나 불교 및 도교의 초월주의 성향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전통사회의 억압적 정치체제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군부독재는 의도적으로 공포와 위기감을 주입해서 시민사회의 자발적 연대를 방해했다. 또는 최근 150년 사이의 급격한 변화가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다분히 외부적으로 강요된 탓에 무의식 안에 생성된 거부감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서양문명을 "선진"이라고 동경하고 수용하는 한편으로, 서양근대를 추동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욕구의 해방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뜩찮은 태도를 지키는 것이다.

나는 앞 제1장에서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400만 가량의 유권자가 2007년에 왜 이명박 또는 이회창으로 이동했는지를 화두로 삼았다. 변화와 불확실성 자체에 대한 불신 또는 불안이 한국사회에 두껍게 분포한다는 점만으로 노무현의 인기하락을 설명할 수는 당연히 없다. 노무현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극적인 반전의 이유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대부분 노무현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야 할 부분이다. 여기에는 ① 불안정하고 성급해서 대통령으로서 품위를 깎아먹은 언사, ② 연고와 사교를 곧 부패와 동일시해서 동맹의 외연확대를 스스로 차단해버린 무모함, ③ 탄핵역풍으로 급조된 과반수 열린우리당에 구심점 노릇을 하기는커녕 방치해버린 당청분리라는 교과서 정치, ④ 아무런 전략도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시작했다가 부메랑을 맞은 우익 신문들과의 말다툼, 등을 열거할 수 있다. 모두 전략적 사고를 혐오한 증거라고 볼 수 있고, 정치인이면서도 정치를 혐오하는 자기모순을 엿볼 수 있다. 정치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왜곡된 환상을 가진 탓이라고 나는 생각하거니와, 그러한 환상의 표현이 지역주의타파라는 잘못된 문제의식으로 나타났음을 바로 다음 제2부에서 논의할 것이다.

둘째는 노무현이 처했던 환경 때문에 다소 불가피했던 요인이다. 이름이라도 아는 유권자가 불과 2%에 불과했던 시골 애틀랜타 주지사에서 청렴의 이미지 하나로 일약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결국 워싱턴 정치무대에 적응하지 못해 1980년 레이건에게 선거인단 투표 489대 49라는 압승을 선사한 지미 카터와 비슷한 부분이다.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서 386 참모들이나 대학교수출신 이상주의자들이나, 구상들은 있었지만 현실에 직접 적용해서 바로 성과를 낼 수 있을 만큼 숙성되지도 못했고, 해나가면서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 정치적 동맹을 확보할 만한 연고의 끈도 부족했다. 물론 이는 미리 숙지하고 대비했더라면 어느 정도는 피할 수도 있었던 문제였는데, 줄곧 열세로 가다가 막판에 역전한 선거전의 진행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비현실적 정치관 때문에 거기까지 시선을 돌리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된다.

▲ 만약 그가 대통령으로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스타일의 변화를 하나의 실험으로서 흥미롭게 지켜보며 기다려주기만 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합뉴스
이 두 요인을 감안한 위에 세 번째로 추가될 요인이 변화를 성가시게 생각하고, 그리고 모든 변화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한국 정치의식의 폐쇄성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인이 노무현 개인 및 주변 참모들의 결함이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가 대통령으로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스타일의 변화를 하나의 실험으로서 흥미롭게 지켜보며 기다려주기만 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러나 반대파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야 불가피했더라도, 선거 때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그의 실험을 불안하게 여기면서 리더십의 부족을 성토했던 것이다.

한국사회를 주도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정치의식 가운데에는 정치지도자가 엄숙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모세나 간디, 또는 적어도 김구처럼 뭔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신변의 즐거움을 모두 포기하고 헌신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엄숙주의가 자리를 잡는 데에는 진보진영이 크게 기여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반민족세력으로 공격하면서 김구의 빈궁을 상징화하고,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공격하기 위해서 모든 기회주의를 곧 배신행위라고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거들먹거리지 않는 노무현의 직설화법을 생소한 데서 지나 불안하게 여긴 데에는 분명히 권위는 마땅히 엄숙해야 한다고 보는 고정관념이 작용했다.

엄숙주의는 우국지사의 전통과 위기담론과도 맞닿는다. 오랜 옛날은 접어두고, 지난 150년 동안 우리 사회의 역사에서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곧 불안한 앞날을 걱정한다는 의미로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치의식이란 나라에 대한 걱정과 거의 동일시되었고, 한국사에서는 위기가 일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서는 재미있거나, 편안하거나, 손쉽거나, 편리하거나, 즐거운 일을 그 자체로 뭔가 안일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나태한 것으로 간주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제는 재미도 있는 일과 재미만 있는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재미있다는 것은 자체로 덕이지 결코 악일 수는 없다. 목전의 재미에만 빠져서 의무를 소홀히 하는 탐닉은 물론 악이지만, 그 때문에 모든 재미를 끊고 금욕주의를 실천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재미에만 빠지게 될까봐 두려워 모든 재미를 억압한다는 것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을 가지고도 "먹고 살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건희의 사고방식을 답습하는 짓이다. 물론 재산이 얼마이든 미래의 생계를 걱정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특정인더러 그렇게 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 진보진영의 정치의식이 엄숙주의에 빠져야 할 필연성이 없다는 말이다. 진보는 재미와 편리와 편안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만은 아니겠지만 그것들도 목표의 일부로 지향해야 한다.

엄숙주의는 이뿐 아니라 교조적인 성향을 부추기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 역시 지난 150년의 격심한 역사적 굴곡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된 일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변절이나 배신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수의 의견과 다른 입장의 변화나 차이를 바로 변절이나 배신으로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가수 유승준이 미국 시민권을 내세워 군대 안 간 데서 배신감을 느낀다든지, "냉정하게 대처하는 일본이 한 수 위"라는 정도의 발언 때문에 조영남을 비난한 경우가 그렇다. 이런 히스테리의 반대쪽에는 어떤 원칙이나 구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곧 미덕으로 찬양하는 풍조가 있다.

이 때문에 해당 구호나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시의에 따른 변용이나 수정의 여지는 없는지, 상반되어 보이는 가치지향들을 지양해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합할 길은 없는지, 등등, 사유의 발전이나 심화를 추구하는 노력 자체가 불순한 의도로 의심받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원칙이 곧 선이고 흥정이나 타협이나 조정은 곧 악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분법이 자주 횡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칙이란 대개 짧은 문장, 즉 구호의 형태로 표현될 뿐이다. 일례로 대한민국헌법 제1조 "민주공화국"이라는 원칙을 살펴보자. 이 원칙이 도대체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을 줄까? 예컨대 6·15선언은 국회비준을 받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현인택의 입장은 민주공화국 통일부장관으로서 할 말인가 아닌가? 국회비준이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인 남북기본합의서는 지킨다고 하면서, 6·15선언을 경시할 핑계를 저렇게 대는 행위가 민주공화국의 의미에 어긋나는가 부합하는가?

앞에서(제3장 제1절) "대통령"이라는 개념의 예를 가지고 지적했듯이, 이런 경우에도 "민주공화국"의 독립적인 의미가 있어서 이런 질문에 대해 판가름을 해줄 수는 없다. 오히려 순서는 정반대이다.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저런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민주공화국"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헌법이란 1987년에 고정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해석과 적용을 통해서 그리고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구성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원칙에 입각해서 해결한다는 것은 곧 "원칙"을 둘러싼 담론의 정치가 시작된다는 뜻일 뿐이지, 정치의 문제를 탈정치화된 원칙으로 해결한다는 말이 될 수 없다.

정치의 문제를 원칙으로 풀 수 있는 경우는 오로지 원칙의 구체적 적용에 대해 합의가 있을 때뿐이다. 그런 합의가 없다면 오히려 원칙을 둘러싼 갈등을 정치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칙을 둘러싼 갈등은 원칙 차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구체적인 적용 차원, 즉 시의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그나마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열릴 수가 있다.

엄숙주의는 이와 같은 유연한 사고 자체를 불신하고 경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허망하며, 대개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구호들을 원칙이라고 생각하면서 붙들고 매달린다. 이는 말하자면 위패숭배라고 할 수 있다. 숭배하고자 하는 대상도 불분명하고, 숭배해서 얻어질 이익이 무엇인지도 불투명하지만, 그저 뭔가를 숭배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위패를 하나 그려놓고 붙드는 셈이다.

이런 습성이 비판을 받지 않고 마냥 자라난 후에는 숭배대상뿐 아니라 분풀이대상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진다.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지역감정", "지역구도", "지역주의", 등의 구호들이 대표적인 분풀이의 과녁 역할을 했다. 이외에 "신자유주의", "공교육붕괴",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등, 수많은 구호들이 문제의식의 심화를 통해 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기보다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임시적인 감정의 분출구 노릇에 그쳤다.

"빨갱이", "퍼주기", "사회혼란", "안보위기", "경제가 어렵다", "3·1절 골프", 등등, 우익의 담론정치가 진보진영의 아젠다를 가로막는 효과를 가진다는 사실에만 반응하느라, 진보진영에서 내거는 구호들 역시 피상적이기 때문에 모호할 수밖에 없는 수준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이다. 언어적으로 분풀이는 하지만 과녁의 실체가 지극히 모호하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지역감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역감정의 징후로 간주되는 현상들은 오히려 고착되고 강화되는 결과를 빚었다. "공교육붕괴"라는 구호는 초등학생들도 되뇔 정도로 유행어가 되었지만, 그 사이에 학원 시장은 날로 번창하기만 했다.

보수와 진보를 망라해서 지식인들이 20년 동안 한국의 지역감정을 열심히 비난해 온 결과, 이제는 거의 모든 국민이 지역감정을 말하지 않고는 한국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에 부패가 문제라고 모두들 목청을 높여 성토하는 사이에 뇌물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는 현실인식이 자리를 잡고, 일상인들은 그렇게 인식된 현실에 적응할 준비를 서서히 갖춘다. "대학서열화"를 모두들 비난하지만, 자기 자식이 대학을 선택할 때는 바로 그 서열기준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다.

이는 범사회적 정신분열증에 가깝다. 나는 지역균열이나 부패나 대학서열화 자체보다도 이와 같은 정신분열증이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 뿌리에는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는 정서적 비겁, 세밀한 차이와 이치를 귀찮게 생각하는 지적 나태, 쫀쫀함을 경멸하는 귀족적 특권에 대한 권위주의적 동경, 후닥닥 해치우는 것을 멋지게 생각하는 폭력 숭배, 등이 있다. 공공담론과 실제 행위 사이에서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들은 가짜문제를 언표적으로 하나 만들어 둔 다음에 공론장에서는 지속적으로 그것을 두들겨 패는 한편으로, 사적 공간에서는 거기에 적응하는 현상에서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나는 이런 가짜문제에 사로잡혀 정신과 감성을 낭비한 원인으로 마녀사냥 프레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것이 제2부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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