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경우 이미 1920년대에 노동자들 중심의 시네클럽인 '스파르타쿠스의 친구들Les Amis de Spartcasus'이 창설됐는데 이는 당시 파리에만 1만 5천 명의 회원을 확보해 프랑스 전역에서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자주상영의 방식으로 상영해 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영화애호가(시네필)들의 적극적인 노력은 시네클럽, 시네마테크, 예술영화관의 창설을 이뤄냈고 이에 화답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제도적인 지원을 수행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의 예술영화관에 대한 지원책과 유사한 지원방식이 프랑스에서는 이미 1959년 앙드레 말로의 문화부장관 취임과 더불어 만들어졌는데, 이는 전후부터 시작된 예술영화관에서의 영화상영이 공공성을 획득했다는 문화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도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민간의 문화 활동이 지닌 공공적 역할에 제도적 지원이 뒤따른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국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합의와 과정이 언제나 국가나 관의 행정편의에 따라 뒤바뀌는 후진적인 현상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을 통해서도 몇 차례 보도가 나간 적이 있지만 최근 시네마테크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2009년부터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을 공개공모로 전환하겠다고 공식입장을 밝혀 문제가 된 것이다. 공모와 경쟁이라는 절차를 밟아 시네마테크를 운영할 사업자를 영진위가 선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사실 논의할 가치가 없을 만큼 비상식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민간이 주도해 이미 십여 년간 진행해온 시네마테크를 관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를 하겠다는, 심지어 선정의 주체가 되겠다는 주객전도의 발상을 내놓는 것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여전히 후진적인 문화행정의 시스템을 고려할 때 지금 왜 이런 발언이 영화문화를 지원하겠다는 영진위에서 흘러나왔는지, 그리고 그런 발상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에 문단속을 제대로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김숙현 기자의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영진위가 시네마테크를 공모로 전환하겠다는 직접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영진위의 자체판단인지 아니면 누군가 외부자의 개입에 의한 결정인지, 정치적인 외압에서 비롯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공모전환'이라는 방침이 영진위 위원장의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고, 그 개인적인 결정의 배경에 지난 국감 당시의 몇몇 정치인들의 발언이 시발점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지난 2008년 문방위의 국정감사 당시 한나라당의 진성호, 성윤환 의원은 영진위의 지원이 특정단체에 편중되어 왔으며, 이러한 단체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했고, 또 그 단체들이 영진위의 일부 지원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유인촌 장관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단체로부터 항의서한을 받은 적이 있다'라거나 '지나친 편중은 동종업계에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에 공정하게 지원되어야 할 곳에 지원하도록 하겠다'라고 대답을 했다.
이러한 두 의원의 지적이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을 '공모'로 전환하는 발상의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영화잡지인 '씨네21'의 최근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진위는 "단체지원 사업이 독립영화협회, 영화인회의, 제작가협회, 영화인협회등 소수단체에 40%가 집중 지원되고 있으므로 형평성 차원에서 단체지원 사업의 추진방식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받았고, 이를 위해 "공모사업 수행시 특정 단체에 편중하여 기금이 지원되지 않도록 공모사업 및 위탁사업의 전반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받았다고 한다. 공공연하게 영진위는 문광부의 압력이 있기에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을 공모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동시에 이런 궁색한 변명이 쉽게 납득될 수 없는 일이기에 두 번째로 법적인 절차와 관련한 설명을 부연하곤 한다. 민간 단체에 대한 지원이 어쩔 수 없이 공모라는 형식을 빌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서울아트시네마의 공모제 전환 건에 대해 영진위가 올해 시행의 입장은 철회했지만, 이는 완전 철회가 아닌 1년 유예인 만큼 논쟁의 씨앗을 남겨두고 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지난 2월 28일 긴급토론회를 개최하고 "공모제 전환 통고는 문화적 합의의 일방적인 파기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사진제공 = 서울아트시네마) |
그런데 영진위의 이런 주장은 사실 근거도 없고 영진위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이라 말할 수 없다. 영진위가 단지 두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공모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이는 이치에 맞지도 않고 영진위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진위는 영화를 진흥하기 위한 곳이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인의 지적을 곧이곧대로 수긍해야만 하는 그런 정치의 전위대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영진위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다. 지난 2007년 말, 시네마테크에서 <숏버스> 상영건으로 등급분류 문제가 나왔을 때에도 영진위는 영등위와 당시 문광부를 설득하며 등급분류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영진위 책임자들이 새롭게 구성되면서 영화문화 활성화를 위한 영진위의 태도는 사뭇 달라 보인다.
왜 영진위는 두 정치인의 발언에 '영화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영진위는 영화문화 활성화를 위한 지원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근거로 지금까지 진행됐는가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나? 아마도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첫째로, 영진위는 정치적인 외압에 맞서 논의를 전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기 논리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굴복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이것이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데, 영진위 스스로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이 적절하지 않다고 자체 판단한 것이다. 즉 영진위 스스로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금까지의 지원이 부적절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모전환'과 관련한 입장을 적절한 논의와 절차도 밟지 않고 이렇게 서둘러 밝힐 이유가 없다.
'공모전환'과 관련한 논의가 영진위 내부에서조차 제대로 이루어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진위의 정책적 판단은 더더욱 부적절해 보인다. 영화진흥정책의 변경이 대단히 중요한 사안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공모전환'과 관련한 논의가 (내가 알기로는) 영진위에서 회의조차 제대로 열린 적이 없었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영진위가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원을 '공모'로 전환하겠다고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이러한 '결정'의 주체가 누구인지 사실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결정은 영진위 내부의 전체적 의견인가, 아니면 영진위 위원장의 사견인가, 아니면 영진위가 아닌 외부의 '결정'에서 나온 것인가? 시네마테크의 '공모'와 관련한 공식적인 발언은 지난 2월 9일이었다. 처음 공식적인 발언이 공문의 형식으로 나온 이래로 이미 한 달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러한 '공모전환'이 영진위 내부의 공식 결정인지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런 연유로 시네마테크의 '공모전환'이라는 '결정 아닌 결정'이 논의할 가치가 없는 사안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의견'이 영진위에서 공식적인 서한을 통해 시네마테크로 전달된 것을 고려할 때, 대수롭지 않은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정 아닌 결정'이라는 하나의 사안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더 큰 재앙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번 문제는 지난 십여 년 간 함께 공들여 쌓아온 영진위와 영화인들, 그리고 시네마테크 간의 문화적 합의를 영진위가 일방적으로 깨뜨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방적인 파기이다. 이건 중대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시네마테크를 설립하고 시네마테크를 운영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와 서울아트시네마에 영진위가 이런 '결정 아닌 결정'을 공문으로 보낸 것은 영진위가 앞으로 협력자가 될 생각이 없다는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영진위는 그간 한 달간 진행된 이번 사태에 대해 그 어떤 방식으로든 응분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단순한 사과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이런 파행을 자초한 책임을 지고 그 이상의 적절한 행동을 보일 것인지는 영진위가 판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1968년 2월,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벌어진 영화역사상 가장 격렬한 영화인들의 싸움이 전개될 수도 있다. 문화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자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은 영화예술을 논하는 자들의 윤리적 태도다. 영화감독들만이 예술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육성하고 진흥하려는 사람들도 문화적, 예술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
글쓴이 김성욱은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영화잡지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활동하며 오시마 나기사, 장 르누아르, 장 피에르 멜빌, 파스빈더 등의 회고전을 기획했고 『루이스 부뉴엘의 은밀한 매력』, 『폭력의 엘레지 스즈키 세이준』 『오시마 나기사의 세계』 『장 피에르 멜빌』 등의 책을 책임 편집했으며 『데릭 저먼 : 대영제국의 꿈』 『디지털 시대의 영화』 등의 책을 번역했다. 이 글을 필두로 프레시안에 '김성욱의 상상의 영화관'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지속적으로 칼럼을 연재할 계획이다. (편집자 주)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