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오승욱 감독, 김성욱 프로그래머, 김홍록 사무국장, 정윤철 감독 ⓒ프레시안무비 |
2월 2일 영진위로부터 최초 통보를 받은 이래 토론회 전날인 27일 영진위와 간담회를 나누기까지, 김홍록 사무국장이 밝힌 서울아트시네마의 한 달은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연이어 치는 듯한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워낭소리>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대통령과 문광부 장관이 직접 영화를 보러 행차한 때와 맞물렸다. 언론은 <워낭소리>에 관객이 몇 명이 들고 수익이 얼마가 났는지에 촉각을 세우고 제작사가 과연 영화 속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사례를 어떻게 할지 수익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주제넘은 훈수를 두면서도, 정작 독립영화와 시네마테크가 처한 진짜 현실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독립영화전용관이 이미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기사가 나오기까지 했고, 시네마테크 전용관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영진위는 서울아트시네마에 대해 자신들의 시네마테크 사업을 일개 단체인 한시협에 위탁을 준 것으로 사고한다. 평소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까지 합해서 "우리 영진위 직원은 몇 백 명"이라고 말해온 터였다. 정작 서울아트시네마를 개관하고 운영해온 것은 한시협이었다. 2002년 그간 영화상영회를 주도해온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한시협을 탄생시켰고, 이들은 아트선재센터의 지하 선재홀에 서울아트시네마를 개관했다. 영진위는 이 공간의 필요성에 동의하면서 지원을 하기로 했다. 다만 당시 영진위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이 민간에 이관되면서, 영상자료원과 업무과 비슷한 만큼 영상자료원이 한시협에 위탁하는 형태로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지원이었지만 이를 위해 명목상으로는 '위탁사업'의 방식을 선택했다. 당시영상자료원은 기관의 성격상 다른 곳에 지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는 영상자료원 대신 영진위와 직접적으로 위탁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2009년, 영진위는 명목상 위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지원이었던 것을, 지원이 아니라 위탁이니 자신들의 사업의 공정성을 위해 공모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김홍록 사무국장은 "위탁계약의 형식을 그대로 둔 것이 문제의 불씨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김영진 평론가는 "지금에 있어서는 위탁이니 계약이니 지원이니 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그들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오승욱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위탁이고 공모제고 아무리 들어봐도 대체 이해가 안 된다. 대체 영진위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앞서 씨네토크에 참석했던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대체 영진위에 이럴 권리가 있기나 해요?" 이런 식의 의문을 느끼는 건 서울아트시네마를 드나들던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대체 지원을 끊으면 끊는 거고 계속하면 계속하는 거지, 공모제를 한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당황하고 분노하고 있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는 아트선재센터 측으로부터 "내부 공사를 해야겠으니 나가달라"며 쫓겨났다. 아트선재센터는 이후 내부공사를 하지도 않았고, 그 공간을 그대로 방치하다 작년 영화사 진진과 계약을 맺고 씨네코드 선재홀로 재개관했다. 그 2005년에 영진위는 그저 뒷짐만 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영진위가 아니라 한시협의 사업이었고, 한시협의 문제인 이상 영진위가 나서서 공간을 해결해줄 필요도, 그럴 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기들의 사업이라면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원하기 위해 끌어온 방식이 위탁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지원이었음을, 누구보다도 영진위가 잘 알고 있었다. 이후 서울아트시네마는 극적으로 지금의 허리우드 극장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상처의 후유증이 컸다. 아무리 관객들이 지키고 앉아있어도, 아무리 스탭들이 발벗고 밤잠을 못 자며 서울아트시네마를 운영해도 이곳이 순식간에 없어질 가능성이란 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모두들 충격을 받은 터였다. 고즈넉한 돌담길과 도서관이 있던 풍경을 좋아했던 관객들은 졸지에 돼지머릿고기의 냄새가 진동하고 '카바레 135'가 있는 새로운 풍경에 경악했다.
그래도 관객들은 적응했다. 돼지머릿고기의 냄새를 '고향의 정겨움'으로, 서울아트시네마 바로 앞에 있는 널따란 옥상을 '자유로운 마당'으로 받아들였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새 공간을 안정적인 공간으로 만들고자, 나아가 좀더 넓은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고자 연초에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영화제를, 여름에는 씨네바캉스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감독들과 배우들이 앞다투어 나서 박찬욱 감독을 대표로 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되었다. 역시나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모임인 '시네마 엔젤'은 서울아트시네마에 필름을 기증했다. 아트선재센터 시절에도 그랬지만 허리우드 극장에 온 뒤로 프로그램은 더욱 알차고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모두들 악착같이 매달려 이곳을 '우리의 공간'으로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작년부터는 고전영화의 필름도 직접 사들여 아카이브 구축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공간 임대료 등에 해당하는 금액만 지원해왔던 영진위는 이제 와서 서울아트시네마를 자신들의 공간이라 우기며 한시협을 자신들의 사업에 임시 고용된 일개 하청업체로 취급한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이번 사건을 "영혼의 파괴"라 표현했다. 아울러 "이제껏 가져온 문화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깬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저 고전영화 좀 보자며 그간 서울아트시네마를 아껴온 관객들을, 서울아트시네마가 없어질지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흘렸던 2005년의 악몽과 패닉에 또다시 빠뜨렸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관객서명을 시작하고 인터넷에 팀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자신에게 얼마나 특별한 공간인지, 왜 이 공간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회가 열렸던 날은 마침 故 하길종 감독이 돌아가신지 딱 3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묘소에 갔다가 토론회에 늦게 도착한 정윤철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 서울아트시네마가 있었다면 하길종 감독이 덜 외로웠을 것이다." 정윤철 감독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영화인들이 이곳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관객일 뿐이라고 했다. 영화를 하다 안 풀리거나 시나리오를 쓰다가 막히면 이곳에 와서 다시 힘을 얻고 간다고 했다. "저렇게 오래된 옛날영화보다 못 만들면 어떡하겠어?"
일부에서는 서울아트시네마 공모제를 비롯한 최근 영진위의 일련의 정책들이 보수진영의 흔들기라고 말한다. 문화와 예술을 돈벌이로만, 산업으로만 사고하는 이들이 영화판의 주도권을 탈취하려 하는 와중 시네마테크에도 손을 뻗쳤다는 것이다. 정윤철 감독은 "그럴 수도 있겠지. 정권이 바뀌면서 그런 식의 재분배와 구조조정이 있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네마테크란 공간은 좌든 우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엇보다도 안정성이 중요한 공간이다. 감독들이 영화를 한 편도 못 만들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제발 이곳만은 지켜야 한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곳이 있는 한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의 입에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네마테크는 무엇보다 안정성이 중요한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영진위는 이 공간의 존립 자체를 흔들어 버렸다.
토론회에 참석한 관객들은 저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대체 무엇을 하면 서울아트시네마에 도움이 될지" 간절한 질문을 던졌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답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주인은 영진위가 아니라 관객이기 때문이다." 장-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인생>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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