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상태보다 미래에 특별히 나아질 것도 없다는 입장은 보수적인 성향에 가깝고, 미래의 개선가능성을 추구하는 입장은 진보적인 성향에 가깝다. 세상이 기본적으로 무력으로 지배되고 인간사회라고 해봤자 약육강식이라는 동물계의 질서에서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생각은 보수적인 성향에 가깝다. 반면에 어떤 보편적인 정의의 원리에 따르는 평화로운 질서의 확립, 약육강식보다는 상호협동을 통한 공생공영과 같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진보적인 성향에 가깝다. 따라서 보수세력은 현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진보세력은 이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현실은 무엇이고 이상은 무엇일까?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현실이고 "먹지 않고도 산다"는 이상일까? 사람은 누구나 몇 시간, 며칠 씩 먹지 않지만 죽지 않는다. 또 사람은 누구나 주기적으로 뭔가를 먹지만 결국은 죽는다. 즉, 사람은 누구나 먹을 때 먹고 안 먹을 때 안 먹지만, 죽을 때 죽고 살 때 산다는 말이 정확한 말이다. 내가 지금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여길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예를 바꿔 본다.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인격체라고 말하면 현실인가 이상인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이라고 대답할 사람들이 아마 꽤 많겠지만 1860년 미국에서는 이상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매우 많았다. 2002년 8월에 노무현 지지율이 19%까지 떨어졌을 때,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관념은 비현실적인 이상이었지만, 불과 넉 달 후에는 실현된 현실이 되었다. 이처럼 흔히 말하는 현실이란 사실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애써 "현실"이라고 믿는 바인 것이고, 흔히 말하는 이상이란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현실이어야 한다"고 믿는 바인 것이다.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표방하는 진보세력의 슬로건은 꿈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결코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성인이란 대개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기가 쉽다. 젊은 시절의 꿈을 이뤄서 만족한 때문이든 아니면 반복된 좌절 때문이든 꿈을 더 이상 간직하고 있지 않기가 쉽다. 한국사회의 경우 전쟁과 빈곤을 겪었던 세대가 현재의 풍요에 너무나 감지덕지해서 더 이상의 권리나 존엄성을 바라지 않는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젊은 세대라도 정치인들의 거짓말이나 허풍에 반복적으로 배신을 당했다면, 그저 돈벌이에만 열중한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이를 간단한 기호를 써서 한 번 표현해 보자. 사회구조의 변화(c)는 의도된 대로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실패를 만날 수도 있다. 물론 성공에도 정도가 있고 실패에도 정도가 있겠지만 다 생략하고, 성공했을 때 선택의 주체인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cB라고 하고 실패했을 때의 손해를 cL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성공할 확률을 p라고 하면 실패할 확률은 1-p가 된다. 그러면 한 개인이 사회의 구조변화로부터 얻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기대치(cE)는 (cB×p)-cL×(1-p)라고 표시할 수 있다. 그리고 현 상태를 그냥 지속할 때에 그의 몫으로 돌아오리라고 예상되는 기대치를 sE라고 해보자. 이 사람이 순전히 합리적인 타산에 따라 행동한다고 가정하면, 그가 변화를 선택할 가능성은 오직 cE가 sE보다 상당히 커야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 "상당히"란 변화를 추구하는 일 자체에 수반되는 번거로움(cC)을 감수할 만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한 합리적인 개인이 사회변화를 선호하는 성향은 cE-(sE+cC)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내가 마치 수학적인 변수인 것처럼 기호로 표현한 항목들은 모두 주관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존하는 것들이고, 아울러 상호 연계되어 있다. 예컨대 대운하 사업에서 기대되는 성과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획대로 추진될 확률도 높지 않다고 보며, 따라서 사업추진 자체에 소요되는 경제적, 물리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비용을 높게 계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했을 때 뒤따를 위험(cL)이 크다고 보는 사람은, 실제로 그런 위험이 발생할 확률도 높다고 보는 동시에 폐지를 관철할 때까지 지불되어야 할 정치적 비용도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재 상태, 즉 현상(現狀)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떤 변화라도 환영받을 수 있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여간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현실이란 불만스러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버틸 만하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처럼 불만스러운 점들이 없지 않은 현실에 적응하느라 많은 시간과 정서를 지불했다.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애써 적응해 놓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변화의 희망을 심어주려면 상당한 매력을 던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희망"이나 "매력"이라고 모두 똑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대운하라든지 뉴타운건설, 새만금간척과 같은 개발사업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포함하는 사업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일단 수십조 원이라는 돈이 풀리는 것이다. 게다가 십중팔구 땅값도 오르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다 보면 각종 파생산업들도 생긴다. 땅값 상승분이 누구의 몫이 되느냐, 원래의 지주나 주민들이 변화한 환경에 얼마나 적응하느냐, 그리고 물론 생태학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장기적으로 공동체에게 이익인가 등의 문제는 물론 있지만, 목전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들은 사치일 뿐이다.
그런데 진보진영이라면 대체로 개발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개발을 추구하는 보수진영에 비해서 장기적인 고려, 바람몰이식 흥행과정에서 자칫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국가보안법 폐지, 신문방송겸영금지, 신문시장독과점제한, 지역균형발전 등등의 정책과제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자유를 확보한다는 목표를 지향한다. 여기에는 기득권 계층이 누리던 특권을 줄인다는 의미가 포함되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일상에 직접 가시적인 이익을 갖다 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공권력이 자의적으로 평범한 시민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여지를 그만큼 줄이는 일로, 우리사회의 법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한 영향이 개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뚜렷한 차이로 표현되기에는 적어도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은 변화의 의의에 동감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때문에 정치판에서 충돌이 발생한다면 쉽게 "시기상조"라는 생각에 휩쓸리게 된다.
반면에 단기적인 매력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장기적이거나 세심한 이익은 쉽게 지각되지도 않고, 지각이 되더라도 항상 논쟁적이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면 건설회사, 지주, 부동산업자는 현금을 쥐게 된다. 반면에 그 와중에 밀려나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인지, 소외계층이 받을 손해를 감안해도 개발이 공익인지 등은 문제제기는 가능하지만 반드시 그 답이 부정적인지에 관해서는 언제나 논쟁이 뒤따른다. 하물며 신문방송겸영금지, 금산분리법, 교육부의 이른바 "삼불정책",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등이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을지는 본질적으로 논쟁을 수반하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장기적 쟁점에 관한 사회적 결정은 전형적으로 담론의 정치에 따라서 크게 좌우된다.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지 여부, 이익이라면 얼마나 이익인지, 이익이 되더라도 누구에게 이익인지 여부, 사회적 갈등을 감수하면서 추구해야 할 만큼 이익인지 여부, 등이 과학적이거나 객관적인 방식으로만은 해소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쟁점들은 일면 주어진 정책이 공익에 기여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지만, 관점의 차원을 한 단계 올려서 바라보면 공익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의 종류가 무엇인지, 운좋게 힘이 생긴 사람이 그 힘으로 전횡을 부려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이라도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인지, 정치적 경쟁을 마냥 "아니면 말고" 식 재치문답이나 겉만 번지레한 구호 사이의 투쟁으로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개명되고 더욱 공평한 형태의 경기규칙을 마련할 것인지, 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질문, 즉 정치공동체의 도덕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정치공동체의 도덕적 정체성이란 이를테면 재개발 지역의 철거과정에서 용역직원들의 폭력에 대해 공권력이 어떤 대응을 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문제이다. 용산 희생자 유가족에 따르면 고 윤용현(49)씨는 아들에게 "용역이 쳐들어 왔는데 네 또래 애한테 얼굴을 얻어맞았어..."라면서 울먹이고, 고 이상림(72)씨는 현수막을 걸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급소를 잡히고 내동댕이쳐졌다고 한다 (주진우, 「용산 철거 용역 목포 조폭과 관련」, <시사IN> 74호. 2009. 2. 7.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55). 이런 부당한 폭력에 노출된다면, 누구나 "이 사회가 이러면 안 된다"는 공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직접 당하지 않은 사람이 느낄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컨대 이웃동네에서 자기도 쫓겨날 처지에서 농성 중이라면 공감대가 상당히 두꺼울 것이다. 현재 철거당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런 일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약간의 공감대가 있을 것이다. 비교적 넉넉한 처지고 안정된 직장도 있어서 이런 일이 자기에게는 닥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도, 용역의 폭력을 방치하면서 농성자의 폭력만을 문제 삼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공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중 어떤 경우라도, 똑같은 상황에서 이처럼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공감대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이다. 따라서 진보적인 의제가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와 같은 선택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매개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의나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의 처지가 되어 본 다음에 느끼는 공감이나, 처지가 비슷해서 느끼는 공감은 다분히 정서적이다. 이런 정서적 공감이 모여서 사회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른다는 것은 곧 폭동이나 민중혁명을 의미한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정치권력의 기본성격을 개선하는 데에 진보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있어야 한다. 직접 당해보기 전에 이론적인 매개를 통해서 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치권력의 기본성격을 바꿀 길이 열린다. 오직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불의에 대한 공분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겪는 불의가 곧 자신에 대한 불의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어디에든 작은 불의가 있다면 모든 곳에 정의는 없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이러한 매개의 이론을 형성하는 데에 담론의 정치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경제 살리기", "민생", "상생과 화합"과 같은 구호들을 생각해보자. "경제가 어렵다"는 노무현 정부 내내 우익 신문들이 집중적으로 부르짖어서 결국 이명박의 압승을 실현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구호였다. 노무현 정부 때에 "경제가 좋았다"고 말할 생각도 나에게는 없고 근거로 제시할 자료를 찾아다닐 생각도 없다. 다만 내가 보기에 노무현 정부의 단기적 장기적 경제정책은 전문가들 사이에 논쟁을 하더라도 쌍방이 팽팽하게 맞설 수 있는 주제이지 한 마디로 "형편 없었다"고 일축할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 사이에는 확실히 노무현 정부가 경제에 관해 "무능했다"는 인상이 널리 퍼져있다. "경제가 어렵다"는 구호는 곧 "이념밖에 모르는 386이 경제를 망친다"는 이미지를 전파시켰던 것이다.
한국정치에서 진보세력이 자리를 확고히 잡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을 시민의식이 형성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런 점에서 2004년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자마자 열린우리당 의장 정동영이 "상생과 화합"을 들고 나온 것은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부정한 행위였다고 봐야 한다. 물론 그 배경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유권자들에서 나타난다고 흔히 운위되는 "그네 투표"(swing voting) 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탄핵 역풍으로 일방적으로 몰리던 한나라당에 대해 동정여론이 이는 기미는 이미 4·15 총선 막바지부터 감지됐었고 결국 120석 확보라는 박근혜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를 본 정동영은 승자의 처지에서 표정관리가 필요했다고 본 것이고, 거기까지는 정치인으로서 결코 나무랄 데 없는 판단이다.
문제는 "상생과 화합"이라는 문구가 담론정치의 차원에서 함축하는 의미를 간과했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상생과 화합"을 내건 순간 국가보안법 폐지는 불가능해진 것이고, 이는 곧 정동영 자신이 국가보안법 폐지가 가지는 상징적 중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고 하면 공안주의자들이 결코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 따라서 그런 의제에 관해 상생이란 곧 의제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의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보안법 때문에 지금까지 발생한 모든 불의와 잘못을 두루뭉수리 넘긴다는 말이 되고 만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인생이 망가져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것을 상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가보안법은 어찌 보면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폐지를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빨갱이" 담론이 상당수의 국민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데에는 그 법의 존재가 크게 기여한다. 그 법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다음이라면, "빨갱이" 담론에 영향을 받을 국민의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 법이 명목으로나마 살아 있는 한, 한국의 우익은 경찰국가로 가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지금 그런 유혹들이 다시 가지를 뻗고 있다. 따라서 사회의 구조적인 개선을 조금이라도 원하는 사람이라면 국가보안법 및 그것을 프레임으로 삼는 사고방식을 고치는 데 열심을 보여야 한다. "상생과 화합"이라는 구호는 그러한 의제 자체를 부인하는 효과를 자아낸 것이다.
▲ 의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보안법 때문에 지금까지 발생한 모든 불의와 잘못을 두루뭉수리 넘긴다는 말이 되고 만다. 사진은 2005년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가 국가보안법 폐지 토론회에서 축사를 하던 모습. ⓒ연합뉴스 |
우리가 속해서 살고 있는 정치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일부의 희생을 토대로 나머지가 잘 살자는 가치인가 아니면 가능하면 소수집단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약자라고 할지라도 삶의 의욕을 버리지 않도록 보살피는 사회인가? 이런 종류의 질문은 정치사회의 도덕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전형적으로 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그런데 "경제살리기", "상생과 화합" 등의 구호는 바로 그러한 물음 자체를 "정치공방" 또는 "이념공방"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무기가 된다.
정치사회는 어떻게 조직하더라도 내부에 갈등요인이 항상 내재할 수밖에 없다. 갈등요인 자체를 해소하지 않는 한, 갈등이 불거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서 갈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불거지지 않은 채 안에서 곪는 갈등요인은 결국 나중에 공동체에 더욱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 갈등요인이 이견과 제안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은 따라서 환영해야 할 의미마저 있고, 그런 것들을 모아서 조정하는 것이 정치가 맡아야 할 본연의 임무다. 그런데 이견이나 항의의 표출 자체를 "정치적"이라고 부르면서 억압하는 태도는 자기들의 뜻대로 모든 것을 밀고 나가겠다는 전제적인 발상에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는 "정치"를 그런 식으로 매도하는 어법이 정치에 대한 일반적 불신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효과적으로 진보적 관심 자체를 봉쇄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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