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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후진국 소리를 듣는 이유"

[독일에서 본 녹색 성장①] 횡단보도와 저상버스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8월 15일 '녹색 성장'을 새로운 화두로 꺼내 들었다. 나에겐 매우 당황스런 사건이었다. 이명박 정부와 녹색 성장이라는 슬로건이 연결되지 않았으니까. 사실 별 기대도 안 했지만, 차츰 그 속내를 환경보다는 그 반대인 파괴가 녹색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멀쩡한 강바닥 뒤집어서 경제 살리겠다는 게 녹색 성장은 아니다.

어느 누가 한국 정부의 수장이든 에너지 문제를 쉽게 볼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현재 온실가스 배출 세계 9위 국가이다. 2013년부터 시작될 '포스트 교토(Post Kyoto)' 체제에서 의무 감축 대상국이 될 것은 거의 자명하다. 이 뿐인가? 전체 에너지의 97%를 수입에 의존하면서도 에너지 소비는 매년 증가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정부의 '녹색 성장' 타령의 한 자리에 온실가스와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방법 또한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안타깝고 불행하게 원자력 발전을 해법으로 내놓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떠드는 녹색 성장의 '종주국'이라고 할 만한 독일에 머물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이런 사정이 답답하기만 하다.

나는 에너지대안센터(현 에너지전환)와 환경운동연합에서 6년간 에너지 담당으로 활동하다 더 깊이 있는 내용을 채우기 위해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플렌스부르크 대학(Uni. Flensburg)에 개설된 SESAM(Sustainable Energy System And Management) 코스에서 제3세계와 재생 가능 에너지를 주제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의 답답한 상황을 보면서 독일이라는 환경 선진국에서 배우고 접한 것들을 나 혼자 간직하는 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졸필임에도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 정부의 성장 위주의 에너지 정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지고 싶다는 욕심이 없진 않지만, 뭐 이 정부가 일개 시민단체 활동가의 의견을 경청해 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현 정부의 남은 4년보다 더 길게 이 땅에서 살아갈 시민 시민과 함께 다른 나라의 역사와 경험을 나누고 함께 토론해 보자는 뜻으로 편하게 얘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이 연재는 앞으로 10회에 걸쳐 매주 월, 수, 금 연재할 예정이다. 먼저 하고 싶은 얘기를 모아 보니 분량이 일단 그 정도가 된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사람과 차에 관한 것이다. <필자>

▲ 독일 학교 앞 횡단보도. 이 횡단보도에 적응하는 데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온 이들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 ⓒ프레시안

횡단보도와 저상버스

장면 1 : 2007년 여름이었을 게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교포 2세 이승현 학생이 환경연합에서 한 달간 인턴 활동을 펼쳤다. 전공인 지리학과 관련해 한반도 대운하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활동을 정말 열심히 해 주었다. 이 이승현 학생과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환경연합 사무실은 주택가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사무실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횡단보도 위에는 예의 항상 노란색 신호등이 깜빡인다. 그 친구와 나는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이 횡단보도를 건널 참이었다. 때마침 순찰차가 지나갔고, 다짜고짜 횡단보도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이승현 학생의 옷을 나는 본능적으로 잡아챘다.

물론 '교통사고'를 막기 위함이었다. 나의 배려 덕분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난 도리어 이 친구로부터 항의를 받아야만 했다. 왜 횡단보도를 지나려는 자기를 제지하느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지나간 차는 경찰차가 아닌가. 왜 경찰은 횡단보도를 지나려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우선 멈추지 않고 마냥 자기 갈 길을 가는가?

장면 2 : 내가 공부하고 있는 독일의 학교 앞에는 차량 통행이 제법 많은 편인 왕복 2차선 도로가 있다. 길 중간에 횡단보도가 있는데, 신호등은 없고 대신 보행자 우선 표지판만 설치되어 있다. 이 횡단보도, 적응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방 함유율 높은 음식문화보다도 단련되기 어려운 교통문화랄까. 혹시 교통 법규가 독일인의 완벽주의처럼 까다롭냐고? 독일 횡단보도의 특징은 다름 아닌 '건너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 횡단보도와 처음 대면한 순간, 난 으레 그렇듯 차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멀리서 달려오던 차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곤 속도를 줄여 횡단보도 앞에 정확히 멈추었다. 이 순간 나를 위해 멈춘 차량의 운전자와, 횡단보도 앞에서 건널 준비를 하는 나 사이에 어색한 눈인사가 오간다.

눈으로 안 되면 서로 손짓을 한다. '먼저 건너가시오', '아니, 먼저 지나가시오', '아니, 당신 먼저 건너라니까', '아 그럼 내가 먼저 지나갈까요?'… 나는 여전히 운전자를 곁눈질하면서 쭈뼛쭈뼛 길을 건넌다. 운전자는 나보다 여유롭게, 때로는 이상한 녀석도 다 있군 그래,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니다. 나의 동료인 많은 제3세계 학생은 나와 똑같은 눈인사를 여태껏 하고 있다. 독일식 횡단보도 문화에 익숙해진 내가 그들에게 의기양양 조언을 해 준다. '횡단보도는 사람 건너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차보다 사람이 먼저다.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지 말고 지금 바로 건너라'고. 이 친구들, 알았다고 대답하고선 여전히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렸다 차량이 멈추면 건너간다. 그것도 뛰어서….

물론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있다면 신호가 우선이다. 그러나 신호 대신 보행자 우선 표지만 있다면 차보다 사람이 앞선다는 규칙. 적응하는 데 약 반 년 걸렸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이 낡고 오래된 상식은 이성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쌩쌩 달리는 찻길에서 내가 먼저라는 규칙을 몸이 수용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 정류장 인도에 바짝 붙여 정차한 독일의 저상 시내버스. ⓒ프레시안

장면 3 : 몇 년 전부터 서울에 저상버스가 도입되었다. 현재까지 그 비율은 전국적으로 5% 미만이라고 한다. 2013년까지 50%를 이 새로운 저상버스로 바꾸겠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독일에 와서 적잖이 놀란 것 중 하나가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의 모습이었다. 덩치 큰 유모차가 두세 대씩 한 버스를 타고 다니는가 하면, 휠체어에 노인을 위한 보행 보조기까지 자유자재로 버스를 타고 내린다. 바퀴 달린 기구들이 버스에 문제없이 승차할 수 있도록 버스 기사는 인도에 바짝 붙여 정차한다. 그러자면 타이어가 인도에 부딪히기 일쑤다. 그들이 모두 탈 때까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기사들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여유만만하다.

▲ 저상버스에 탑승하는 유모차. ⓒ프레시안

▲ 몸이 불편한 이 두 노인은 버스 타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 보행 보조기와 함께 버스에 탑승하는 노인(왼쪽)과 버스에 탑승한 후(오른쪽). ⓒ프레시안

독일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시골 어디를 가도 저상버스를 볼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99% 이상 대부분의 대중교통 버스는 바로 이 저상버스일 것이다. 교통약자로 불리는 장애인, 유모차 부대, 실버 세대들은 더 이상 교통약자가 아니다. 어느 누가 대중교통의 대명사인 버스를 '신체 건강한' 두 다리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다고 정의했단 말인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대중'이 아니기 때문이란 말인가?

물론 아무도 이렇게 정의내린 적 없지만, '특정'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고, 이러한 구태의연한 현실이 공공연하게 통용되고 소수의 권리가 여전히 묵살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의 대중교통 문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를 떠나 차보다는 사람이 우선되는 기본적인 '철학'의 부재일 테다.

주객이 전도된 대한민국

우리는 사람보다 차가 앞선, 주객이 전도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지하도와 육교가 흔했다. 차를 발명하고 이를 만든 '사람'은 차의 진로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 속을 통해 또는 공중 부양을 통해 길을 건너지 않았던가. 골목길에서 아이가 뛰어 놀기라도 한다면 그 부모는 운전자로부터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차 다니는 길에 아이를 내보내는 정신없는 부모'라고 말이다.

등하굣길의 학생들은 어떤가. 차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역을 설정하고 차량 통행을 자제시키고 있지만, 경찰이나 교통 자원봉사단이 없다면, 녹색어머니회 옷을 입고 매일같이 당번을 서는 학부형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시다시피 한국 어린이들의 교통 사고율은 세계 1위다.

▲ 어린이 보호 구역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왼쪽)과 끝을 알리는 표지판(오른쪽). ⓒ프레시안

한국의 국가 경쟁력이 세계 10위 이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교통 문화에 있어서, 특히 차량이 사람을 지배하는 이상한 문화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에 불과한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정부의 저상버스 보급 계획에 딴죽 하나 걸자면, 왜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먼저 보급하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저상버스가 생소한 한국에서 이를 보급하자면 예산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겠기에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뭐든 대도시에 먼저 보급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농어촌 지역으로 내려갈수록 교통 약자의 비중이 극심하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힘겹게 버스에 오르는 안쓰러운 모습이 바로 저상버스가 해결해야 할 숙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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