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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뉴라이트에게서 '자유주의'를 탈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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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뉴라이트에게서 '자유주의'를 탈환하라

[박동천의 집중탐구⑥]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제4장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제1절 자유와 평등은 상호모순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에 굴곡이 많았던 탓에 용어의 의미까지 굴절된 경우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역시 빠질 수 없다. 이 연재에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현실 정치에서 엄청난 혼동과 왜곡의 주제가 되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그저 독자들에게 알아서 들으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상당수의 독자들에게는 이미 기초적이고 당연한 사항이 될 수 있겠지만, 차후에 펼칠 논의에서 불필요한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생각하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미리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선 대단히 통속적인 대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흔히 자유주의는 자유를 중시하고 사회주의는 평등을 중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이분법은 객관식 시험문제를 내기 편하게 만드는 용도 말고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도움이 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평등한 자유가 아니라면 자유일 수가 없고, 자유롭지 않은 상태라면 평등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개탄이 딱 들어맞는 사회가 하나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런 사회는 물론 불평등한 사회다. 그러면 자유로운 사회이기는 한가? 부자만이 자유롭고 나머지는 자유롭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이런 사회가 자유주의 사회인가?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사회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자칭 타칭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이념은 대단히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법 앞에 평등이 노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를 자유주의에 포함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평등하지만 자유가 없는 상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보면,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자며, 똑같은 음식을 함께 먹어야 하고,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은 의복을 입고 살면서 똑같은 설교를 식사 때마다 들어야 한다. 대단히 평등하지만 자유는 별로 없는 사회다. 사회주의자 중에 이런 체제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사회주의자라도 대다수는 사생활에서 이보다는 더 많은 자유를 원할 것이다.

자유주의가 평등을 배척하고 자유만을 원한다든지, 사회주의가 자유를 배척하고 평등만을 원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애당초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가치를 가지려면 평등한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 단적으로 "법 앞에 평등"이란 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념 중 하나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 사이의 선택은 원칙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고 시의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이다.

예컨대 종부세 기준을 9억 아니면 6억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도 그런 유형이다. 6억 원에서 9억 원까지의 부동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기준이 6억이라면 낼 세금을 9억이라면 안 내게 된다. 세금으로 낸다는 것은 그 재원으로 마련될 복지나 공공서비스 만큼을 전체국민이 평등하게 누린다는 것이고, 안 낸다는 것은 세금만큼을 그들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간략하게 그리고 좀 현학적인 표현을 써서 정리하고자 할 때 "평등과 자유 사이의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쟁점의 본질은 종부세 기준을 9억 원으로 하느냐 6억 원으로 하느냐에 있지, 평등과 자유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하는지에 관한 보편적인 답을 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정책 논쟁들이 한 단면만을 굳이 부각해서 본다면 평등과 자유 사이의 문제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모든 쟁점들에 관해서 평등편만 선택하든지 자유편으로만 선택을 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고 말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거니와, 자유와 평등의 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중용 따위 발상은 흐리멍텅한 두루뭉수리 얼버무림이나 무의미한 방관자의 둔사로 빠질 위험이 높다고 본다. 따라서 그런 단어는 순응주의자들에게나 던져주고, 주권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담론에서는 가능하면 쓰지 않기를 바란다. 내 주장의 요체는 정치적 쟁점을 원칙의 문제로 접근하지 말고 시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이에 관해서 불안감을 느낄 사람들이 대단히 많겠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제4부로 미룬다.

제2절 리버럴과 진보

군대를 등에 업고 헌법을 졸지에 정지시킨 쿠데타를 통해 이른바 유신헌법을 만든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에 잘 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걸었다. 적어도 당시 한국 사회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했다. 그런데 1987년 이후 지금까지는 용어가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한때 이끌었고, 그 후로는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시장의 자유를 자유주의와 동일시하며, 이런 용어의 선점에 대해 진보쪽에 있는 사람들이 특별히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란 이제 한국에서 보수주의와 대동소이한 뜻으로 사용되고 이해된다.

굳이 설명하자면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첫째, 사회주의에 대척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자유주의는 보수처럼 비칠 수 있다. 둘째,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영국식으로 느슨하게 이해하는 태도보다는 독일처럼 명확한 경계를 구하는 태도가 한국 사회에 팽배하다. 셋째, 추상적인 용어의 의미나 일관적인 사용에 대해 한국사회가 별로 집요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물타기나 되치기가 쉽게 일어난다. 이중 둘째, 영국식으로 느슨한 이해를 간단하게 엿보기로 한다.

영어에서 리버럴(liberal)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형용사로서 변화에 대해 개방적이고 차이에 대해 관용적이며 약자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역시 기본적으로 무언가에 대해 개방적이며 관용적이며 너그러운 태도를 함축한다. 개방과 관용의 영역 및 방향에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자유주의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란 전형적인 시장주의경제이론을 말한다. 시장의 자유경쟁이 단기적으로는 시행착오라는 낭비를 낳지만, 장기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자원배분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아래 정부나 사회 권력에 의한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복지국가의 이념까지도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미제스나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 로버트 노직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자, 그리고 정책적으로는 영국 보수당이나 미국 공화당의 입장에 가깝다.

정치적 자유주의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표현과 반대의 자유를 신봉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유재산제도와 기득권을 인정하지만, 정치적 경쟁을 통해서 합법적인 수단으로 헌정질서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수용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도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고, 사회주의 정당의 집권도 개인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의 틀 안에 속한다고 본다.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등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자유주의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치적, 사법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향해 개방적인 태도를 말한다. 빈곤으로 말미암아 생활환경에 제약이 가해짐으로써 기회 자체가 불평등해질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토마스 힐 그린, 레너드 홉하우스 등 자유당 좌파들이 원조에 해당하고, 존 메이나드 케인스나 윌리엄 베버리지 등 20세기초 영국 노동당 정부의 복지국가 모형을 마련한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 민주당은 영국 노동당 만큼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회적 자유주의의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자유주의란 '60년대의 히피와 같은 반문화, 동성애자나 소수 종족집단과 같은 문화적 소수자 등도 주류 사회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형제에 반대하고, 온갖 형태의 생태주의 공동체를 실천하며, 전통적인 가족형태나 성역할이 표준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모든 종류의 개인적 신조를 양심과 종교의 이름으로 보호해줘야 한다는 입장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사회는 1987년 이전까지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인 전체주의 사회였다. 많은 사람들이 '87년을 민주화라고 부르지만 이는 지극히 통속적인 언표의 습관일 뿐이고, 내가 보기에는 위에 열거한 네 차원의 자유주의 가운데 어떤 것도 한국사회에는 정착된 것이 없다. 정부에 대한 개인의 권리, 법 앞에 평등, 표현의 자유와 같은 항목들은 불과 일이십년 사이에 정착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시장경제"란 관치경제의 다른 이름으로서, 전체주의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부른 박정희식 지록위마의 재판이다. 뉴라이트에서 부르짖는 자유란 부자의 자유를 뜻할 뿐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의 한 형태로 잡아주기에도 곤란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며 협량하다. "곤들메기의 자유란 붕어에게는 죽음"이라는 사실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원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의 변역이 아무리 넓더라도, 사회구성원 중 일부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노선을 자유의 이름으로 강행하는 행태까지 포함하기는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뉴라이트나 한나라당이 자유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행세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이 얼마나 종파적으로 사고하는지, 그리고 정치적 어휘에 관한 이해가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와 평등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킨 후에, 자기는 평등편이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자유라는 귀중한 가치의 정합성을 쉽게 포기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 한국사회에서 뉴라이트나 한나라당이 자유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행세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이 얼마나 종파적으로 사고하는지, 그리고 정치적 어휘에 관한 이해가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뉴시스

자유란 언제나 개인의 자유고, 개인의 자유란 모든 개인이 동등하게 누릴 권리이다. 이것이 권리라는 말은 정부의 권력이나 사회적 주류의 권력이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다. 권리(right)란 옳음이고 권력(power)이란 힘이기 때문에, 힘이 옳음을 누를 수는 없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소수의 권리가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시 또는 천재지변과 같은 비상시뿐이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않은데, 미리 비유적으로 전쟁을 연상하면서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는 짓을 바로 전체주의라고 한다. 공포심을 유포시켜 정권의 목적을 도모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생소하거나 위험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한국사회에는 아직도 압도적인 다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는 자유주의가, 문화적 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정치적 사회적 자유주의뿐 아니라 경제적 자유주의에 들어있는 일부 관념조차도 여전히 진보의 아젠다가 되어야 하며, 이명박 체제의 한나라당이나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라기보다는 독점과 특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파시스트 또는 전체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제3절 사회주의의 다양한 모습들

변종과 의미가 다양한 것은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영어 위키피디아(Wikipedia)만 봐도, 아프리카 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 등 민족적 변형을 포함해서, 민주사회주의, 녹색사회주의, 길드사회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시장사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적 무정부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등의 갈래들을 열거해 놓았다.

여기서 이런 갈래들을 일일이 설명하고, 또 갈래들 사이의 관계를 해명할 수는 없다. 단, 이와 같은 다양성을 직시함으로써 사회주의라는 것이 어떤 하나의 단일한 교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리적 시간적 정치적 환경의 다양한 맥락에 따라서 무한한 변형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용어라는 사실을 우리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각각 단일목표를 지향하면서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언제든 시의에 따라서 접합과 동맹이 가능한 지향성으로 이해하는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기를 바란다.

사회주의 가운데 자유주의와 합치하기 어려운 경우는 자본주의를 타도대상으로 보는 형태와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개입하려는 형태뿐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예컨대 살인마라고 할지라도 체포나 사법처리과정에서 인권을 누려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개인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단지 이기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동기는 여하간에, 행동의 결과가 형법에 어긋난다면 처벌대상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체제는 자본가들의 탐욕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탐욕을 추구하는 행동방식에 일정한 한도를 설정해 둔 다음 한도를 넘는 경우만을 규제한다.

반면에 혁명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자체를 무너뜨리고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시각에서는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나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 체제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표현의 자유를 용인하고, 그들이 혁명이론을 선전한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컨대 어떤 무력이나 암살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부전복을 기도한다면 당연히 처벌대상이 된다. 단적인 예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온상인 영국의 런던에서 살면서 『자본』을 저술할 수 있었다. 영국 사회가 그를 특별히 도와주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박해하지도 않았다.

개인생활의 어떤 부문이라도 국가가 필요하다면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 즉 줄여서 국가사회주의라고 종종 불리는 발상 역시 자유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자유주의는 어떤 공공목적이나 국가의 필요를 명분으로 삼더라도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될 개인 사생활의 영역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단, 위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체제는 국가사회주의에게도 표현의 기회는 부여한다. 반면에 국가사회주의 체제에서라면 자유주의에 입각한 주장마저 봉쇄되기가 쉽다. 영어에서는 이런 형태를 보통 State Socialism이라고 부르는데, 히틀러의 것만은 National Socialism이라고 부른다. 히틀러가 Nationalsozialist를 자칭했기 때문이다. 나치(Nazi)란 이를 줄인 말이다.

제3장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이념과 지향성의 차이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태도보다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인식론적으로 개방적이라는 취지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즉, "진정한" 진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보수로 몰아붙이려는 태도, 또는 자유주의를 보수이념으로 당연시하는 태도는 얼핏 정책적 정향에서 진보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식론적인 자세로서는 극우파의 색깔론만큼 이나 대단히 교조적이며 배타적인 태도로서, 대개는 보수적인 성향에 해당한다. 이런 태도는 당연히 범진보에 속하는 다양한 세력의 연합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부동층에 속하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진보라는 것을 어떤 밀교 비슷한 불가해한 운동으로 경원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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