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공포에 익숙해져야 할 때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전망이 무의미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현재 추세로 볼 때 적어도 상반기 내내 최근의 금융지표가 눈에 익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지금과 같은 움직임이 지속될 경우, 다시 금융 위기가 실물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다. 동유럽에서 불어온 위기의 바람이 한국에 '고난의 행군' 2라운드를 예고하고 있다.
달러·엔화 모두 '금값'…"정부 개입 쉽지 않아"
지난주 경제 바로미터인 3대 지표, 곧 주가·환율·금리는 모두 심각한 고장음을 냈다. 거시경제 변수 악화 영향이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 지표는 환율이다. 지난 20일 1달러 값은 지난해 11월 25일 이후 약 3개월 만에 처음으로 1500원을 돌파, 1506.00원을 기록했다. 지난 한 주간 달러값 오름폭은 무려 78.50원에 달한다. 러시아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는 데다 헝가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기 추가 악화 가능성이 더 커지는 등 동유럽 주요 국가 경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온 달러화는 동유럽에서 내달려온 쓰나미에 휩쓸려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노상칠 국민은행 트레이딩팀장은 "20일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로 오르자 당국의 개입 가능성 때문에 경계심이 커지는 듯했지만 외국인의 주식 순매도와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Non-Deliverable Forward) 시장에서의 지속적 달러 매수로 상승폭이 커졌다"고 말했다. NDF는 환선도거래의 일종으로 거래 만기 시 약속된 환율과 실질환율 간 차액만을 주고받는 거래다. 홍콩·싱가포르 등에서 강도높은 달러 흡입이 이뤄져 한국의 외환시장이 크게 출렁인 것이다.
엔화값도 폭등했다. 이날 원-엔 환율은 100엔당 전날보다 15원가량 올라 약 1600원을 기록, 1991년 고시환율 집계 이래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원-엔 환율은 실제 거래되는 환율이 아니라 원-달러 환율과 달러-엔 환율로 추산한 재정환율이다. 역외 NDF 시장 참가자들은 엔화 움직임을 주요 참고자료로 이용한다. 여전히 역외 환시장 참가자들은 엔화 강세를 전망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환시장이 요동치자 정부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기획재정부는 22일 태국 푸켓에서 열리는 아세안+3 특별 재무장관회의에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 다자화기금, 곧 아시아공동기금을 800억 달러에서 1200억 달러로 더 늘리는 방안을 최종 합의할 것이라고 20일 밝혔다. 신제윤 재정부 차관보는 "(동유럽 경제 붕괴의) 아시아 위협요인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재정부는 외환시장 안정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여는 등 비상태세에 돌입했다. 20일 장 마감 직전 정부자금으로 추산되는 달러 매도세가 유입됐다고 시장관계자들은 추정했다.
하지만 정부의 운신 폭은 좁다. 기본적으로 최근 환율 움직임은 국내보다 해외 변수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 은행이 현금확보전에 나서면서 엔케리자금 일본 환류가 선진국 은행을 자극하고, 다시 이는 이들 은행이 한국을 비롯한 해외 투자자금 회수에 나서도록 하는 방아쇠 효과로 발전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작년에 억지로 환율을 찍어 누른데 따른 부작용이 최근 환율이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는데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원죄를 갖고 있다. 스무딩 오퍼레이션(방향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미세 조정) 이상 수준으로 메스를 들이대기가 어렵다.
원화 약세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일단 지난해 최고점(1513원)을 과연 돌파할지가 문제다. 달러값이 이마저 넘어서버린다면 추가 상승 여부를 타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설명이다. 시중은행의 한 딜러는 "지난해 연고점을 달러화가 넘어설 경우 더 이상 예측은 의미가 없다. 지금 속도라면 연고점 돌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시장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1600원선' 도달 가능성이 거론된다. 정용택 유진투자증권 매크로팀장은 "3월 위기설 도래 여부를 떠나 실질적으로 다음 달 외환수급 약화 요인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시적이겠지만 1600선을 테스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팀장은 다만 "기본적인 레인지는 1500대다. 상반기 동안은 환율이 이 수준에서 머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20일 힘든 한 주를 보낸 끝에 코스피지수는 연중 최저치로, 원-달러 환율은 3개월 만에 다시 1500원선으로 질주했다. ⓒ연합 |
주식시장에는 한숨만…다시 세자릿수 돌입하나
외국인은 코스피에서 지난주 금요일까지 9거래일 연속 순매도를 기록했다. 이 기간 순매도액은 1조5041억 원이며 누적 순매도 규모는 6조8497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10월 15일부터 28일까지 10거래일 연속 지속된 순매도 이후 최장기록이다.
외국인의 한국시장 철수는 주가를 강력하게 찍어누르고 있다. 지난 17일과 20일 코스피지수는 각각 48.28포인트, 41.15포인트 빠져 올해 들어 두 번째, 세 번째로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이 때문에 1192.44였던 코스피지수는 한 주 만에 1065.95로 폭락, 연중 최저치로 떨어졌다.
개인과 연기금의 방어는 소용이 없었다. 개인은 한 주간 1조8000억 원 순매수로 외국인에 맞섰고 연기금도 작심한 듯 2000억 원대의 순매수로 개인을 지원사격했으나 조정을 이겨내지 못했다. 금융위기 여파로 코스피에서도 금융주가 하락장세를 주도했다. 한 주간 금융업종지수는 무려 14% 빠졌고 전기가스와 운수장비업종지수도 13%대 하락률을 기록했다.
심리적으로 상징성을 갖던 1100(코스피), 1500(환율)이라는 숫자가 무력하게 밀려남에 따라 앞으로 당분간 코스피의 바닥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황금단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이제 1000포인트 지지력 테스트 장세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는 새 저점이 어디인지를 찾는 장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코스피 방향성이 세자릿수를 뚜렷하게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승우 대우증권 연구위원은 "그나마 한동안 지속되던 종목장세도 지수가 '크리티컬 포인트'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차익실현 욕구에 자극받을 것이다. 이제 마땅한 투자 도피처를 찾기 어려워졌다"며 "당분간은 하락 압력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애널리스트들이 말하는 '당분간'은 대체로 '상반기까지'를 의미한다. 3분기 실물경기가 바닥을 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높기 때문에 선행지표인 주가지수는 상반기 내에 밑바닥을 확인할 것이라는 이유다.
▲존 기브 영란은행 부총재는 지난 19일(현지시간) 영국정경대(LSE)에서 영국 경제가 매우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며 "아직 위기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데 완전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유럽에서 시작된 위기에 영국 등 선진국이 타격을 입고, 이는 다시 한국을 옥죄오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한국, 벼랑끝에 서다?…채권금리 급등
채권시장 역시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역대 가장 낮은 2%로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20일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날대비 0.17%포인트 급등한 3.92%를 기록, 4%선에 바짝 다가섰다. 19일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공적자금 조성을 발표하는 등 재정악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채권금리를 자극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경기변동을 방관하더라도 금리는 경기 악화 우려로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물경기에 대한 우려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우량등급 회사채와 비우량 회사채 간 수익률 차이가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졌다. AA-등급 무보증 3년물 회사채 수익률은 20일 현재 6.93%인 반면, BBB-등급은 두 배인 12.44%에 달한다. 그만큼 돈이 유입되는 기업과 유입되지 않는 기업간 차이가 커진 것이다.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의 경우 기준금리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은 수익률을 얹어줘야만 겨우 시장이 들여다볼 정도로 공포가 확산된 것이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시장의 심리는 '부도만 나지 말아라'고 표현할 수 있다. A0급 이상, 업계순위 3위권 내 회사가 발행한 채권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 않게 됐다"며 "앞으로 돈이 들어간 기업과 들어가지 않는 곳의 차이가 더욱 극명해질 것"이라고 했다.
국내 기업 신용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 안정자금 조성 목적으로 해외에 발행하는 채권, 곧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에 대한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이 지난해에 이어 다시 폭등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올해 1월 2일 399bp(3.99%)이던 외평채 5년물 가산금리는 19일 현재 337bp로 낮아졌다. 신규 발행물량이 없어 등급평가만 이뤄지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경제여건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인식은 엿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기간 외평채CDS 프리미엄은 313bp에서 428bp로 무려 115bp나 치솟았다. CDS는 기초자산 부도사태에 대비한 보험개념의 파생상품이며 이 리스크를 넘기는 조건으로 프리미엄(추가 수익률)이 붙는다. 따라서 기초자산가격(외평채)의 평가액에 큰 변동이 없다면 파생상품인 CDS프리미엄 역시 대규모 변화가 없어야 정상이다. 외평채와 관계없는 현재의 CDS프리미엄 움직임은 비정상적이다.
CDS프리미엄 급등은 결국 한국 경제에 대한 시장의 유동성 우려가 커졌음을 입증한다. 이재형 동양선물 연구위원은 "CDS 시장 참여자들이 한국물의 유동성에 확신을 가지지 못해 호가가 자꾸 오르는 것"이라며 "근본적으로는 한국 시중은행이 해외에서의 달러차입에 어려움을 겪게 됨에 따른 상환불능 우려 확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시중은행의 경우 경영의 질과는 무관하게 유동성 우려가 급증하는 추세다. 이 연구위원은 "서유럽 은행에서의 달러 조달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지난 2~3년 간 국내 은행이 외화 단기차입을 크게 늘렸다는 점도 악재"라며 "이런 유동성 우려는 다른 산업에도 제기된다. 조선업의 경우도 회사 사정은 튼실하지만 차입구조의 문제로 환율이 급등하면 유동성 우려는 커진다"고 했다.
다만 최근 CDS프리미엄 움직임만으로 우려를 필요 이상으로 키울 필요는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CDS프리미엄 결정 구조 자체가 어느 정도 맹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공동락 하나대투증권 연구위원은 "전반적으로 한국의 금융시장이 불안한 것은 맞지만 지난해보다는 사정이 낫다"며 "CDS프리미엄에 쏠린 우려는 조금 과장된 편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선진국들도 CDS 규제를 보다 강화하기 위한 움직임을 재촉하고 있다. 규정된 거래소가 없어 시장참여자 정보가 극히 제한된 데다 별다른 규제가 없어 투기적 수요에 크게 흔들린다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블룸버그>는 지난 19일 "미국과 영국, 유럽 규제당국이 CDS 규제 공조를 위해 협의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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