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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당신, 희망은 있습니까?"

[철학자의 서재] <탐욕의 시대>

▲ <탐욕의 시대>(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프레시안
주식 투자를 위해 전세금을 빼서 월세로 옮겼다가 이번 금융위기에 주식이 반토막 나서 낭패를 보았다는 사람의 얘기를 매스컴을 통해 접하면서 '결국은 탐욕이 문제임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데' 생각했다. 그런데 서점에 갔더니 이 책, <탐욕의 시대>(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가 있었다. 유엔 식량계획에서 일하고 있는 스위스 대학 교수 출신의 지글러가 세계화가 가져온 폐해를 실제 통계로 낱낱이 보여주는 책이다. 초국적기업이 얼마나 엄청난 책략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62억 전 세계 인구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는 이 지구에서(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된다) 전체 사망자의 58%가 기아로 인해 사망하는 이유(매해 세계 전체 사망자는 6200만 명, 기아 사망자는 3600만 명), 18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수입에 의존해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고 있는 이유,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고 4분에 한 명이 비타민A결핍으로 시력을 잃는 이유, 지구 전체 인구 중 6명에 한 명 꼴로 심각한 만성영양결핍에 시달리는 이유가 대부분 초국적기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알려 준다.

금융, 곡물, 약품, 커피, 살충제 등등 초국적기업이 손을 뻗치지 않는 영역은 없지만 우선 커피의 경우를 살펴보자. 초국적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커피 시장에 뛰어들기 전인 1990년, 커피 생산국들은 1파운드당 1.2달러의 가격으로 110억 달러 어치의 원두를 수출했고 소비자들은 그 원두로 만든 커피를 300억 달러를 주고 마셨다. 2004년 초국적기업의 농간으로 커피 원두 가격이 떨어져 커피 생산 농부들은 1파운드당 50센트의 가격으로 겨우 55억 달러를 버는 데에 그쳤는데 커피 유통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소비자들은 커피 소비를 위해 700억 달러나 썼다. 원두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는데 커피 가격은 두 배가 넘게 오른 것 이다.

이 차액의 상당 부분이 초국적기업의 손으로 들어갔다. 초국적기업은 원두 시장의 45% 이상을 차지하는데 원두 가격을 가장 낮게 책정하기 때문에 차액 645억 달러의 70~80%가 초국적기업의 손으로 들어갔다고 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커피 관련 5대 초국적기업들은 원두 가격을 낮추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그래서 커피를 제배하는 나라 70개국의 수천만 명이 초국적기업에 목숨줄을 내맡긴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남반구 국가들의 부채가 '추악한 부채'라고 불리는 이유

금융 초국적기업들은 남반구 국가의 부패 정권에 외채를 빌려 주고 고액의 이자를 받아먹는다. 남반구 국가의 관료들은 외채를 맘껏 도입하고 그 과정에서 외채 액수에 비례하는 커미션을 챙기거나 아니면 외국자본이 사회간접자본의 건설비용을 부풀리는 것을 눈감아주고 뇌물을 받아 챙긴다. 이러한 이유로 부풀려진 외채를 갚기 위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해당 국가의 서민들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제 3세계 국가 대부분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이러한 부채를 '추악한 부채'라고 부른다. 이 추악한 부채는 해당 국가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국민들을 노예 상태에 처하게 하며 기아와 싸우게 한다. 에티오피아의 경우 전 국민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는데도 운송이 되지 않아서 한 쪽에서는 식량이 썩어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기아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외채를 갚느라 사회간접 자본을 확충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122개국에 달하는 남반구 국가들의 구매력이 40년 전에 비해서 3분의 1도 안될 정도로 하락한 것은 바로 이 부채 때문이다. 이 하락으로 인해 재미를 본 것은 물론 금융 관련 초국적기업이다. 2조 10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짊어진 제3세계 국가의 대부분에서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는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는 데 고스란히 바쳐진다. 브라질의 경우, 외채에 대한 이자로 내는 돈은 교육관련 예산의 5배가 넘는 액수로 브라질 국내총생산의 9.5%를 차지한다. 군부독재가 시작될 때의 부채가 25억 달러였는데 21년간의 군부독재가 끝날 때 1000억 달러를 넘게 된 것은 독재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든 비용 때문이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열심히 벌어 금융관련 초국적기업만 배부르게 하는 셈이다. 그것도 독재정권이 자신들을 핍박하느라 쓴 돈 때문에 말이다!

초국적기업은 부패 정권에 부채를 제공하고 해당 국가들은 부채 때문에 발전을 하지 못하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후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세계의 현실이다. (1972년 27개국, 현재 49개국) 이들 국가의 인구는 6억5000만 명으로 지구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데 국민총생산량은 전 세계 국민총생산량의 1%에 미치지 못한다. 이들 국가의 현실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500개 초국적기업이 축적한 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133개국의 부를 모두 합한 것보다 크다. 이들 기업은 현재 전 세계 총생산량의 52퍼센트를 좌지우지하면서도 전 세계 노동력의 1.8%만을 고용하고 있어 고용기여도가 너무 미미하다. 세계화 시대의 성공모델로 여겨지는 초국적기업들의 고용수준이 이 정도이니 앞으로 다른 기업들이 이러한 경영전략을 계속 벤치마킹하면서 마른 수건을 짜대면 서민들의 세상살이는 더욱 팍팍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하기 편한 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익 극대화만을 지향하는 초국적기업들의 탐욕이 가난한 나라들에 어떠한 일을 자행하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지글러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초국적기업의 운영자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에게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까? 제3세계 국민들이 자신과 동일한 욕구와 희망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정말로 돈이 사람의 목숨 보다 중요할까?

그러나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타인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무감각해질 수 있는 존재이다. 누구든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기 시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죽든 말든 그건 그 사람의 사정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이는 인간이 인식을 하는 경향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인식을 좌지우지하는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하기 편한 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기 편한 대로 생각하다보면 자신에게 유리한 인식만 하게 된다. '내가 능력이 있으니까 돈을 잘 버는 거야'라는 인식은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어', '그래서 너는 그렇게밖에 못살고 나는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어차피 세상은 정글이야. 능력 없으면 빨리 죽는 거지, 뭐. 누군가는 굶어죽게 생겨 있는 세상에서 능력 없는 사람들이 죽어 자빠지는 것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지', '경쟁에서 누군가는 지게 되어 있는 거고 중요한 것은 내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야. 남 신경 쓸 필요 없어' 등으로 자가 동력적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되면 기아 난민이 왜 생기는지, 정말 생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어지게 되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누릴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쏟게 된다. '나 때문에 저 사람이 굶어.'라는 인식은 하지 않게 되고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이 들어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면서 그러한 인식에서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경향성은 인간의 모든 인식에서 드러난다. 누군가와 갈등 상황에 놓여있을 때 나는 내가 맞고 상대방이 틀린 것만 같다. 상대방은 자신이 맞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점에 조차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모두 나 편리한 대로 제쳐놓고서는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하는 생각에 매몰되고 만다. 이렇게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인간의 습성은 보고 싶지 않은 이면에 대해서는 질끈 눈을 감는 성향과 관련이 있다. 사실 '살아간다'는 곧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도 사람들은 '살아간다'에만 주목하지 '죽어간다'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죽어간다'에 주목하려면 마음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이 힘들어지는 인식은 습관적으로 피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생리이다.

이러한 본능적이고 습관적인 회피에 익숙해지면 바로 옆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도 꿈쩍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흑인 노예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백인들이나 유대인들을 독가스실에 보냈던 독일 군인들 모두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었는데 이러한 무감각 때문에 사람 같지 않은 짓을 그렇게도 태연하게 저질렀던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성찰력이 상당히 약화되기 때문에 타인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위험이 높아진다.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가'의 물음은 이익에 종사하지 못하므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가 동력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러한 자가 동력적 전개에 브레이크를 거는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이 괴물이 된지도 모른 채 괴물로 살아가게 되는 존재가 인간이다.

남의 탐욕을 보는 눈으로 나의 탐욕을 보지 않으면

이익 극대화의 원칙에 의해 작동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우리는 너무나 적응이 잘 되어서 '불로소득을 올린다'가 '재테크를 잘 한다'로 바뀌는 것도 잘 의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방식의 무감각이 초국적기업들의 무감각과 그리 다른 것은 아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 스스로 이러한 무감각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교묘하게 자기 정당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알게 되면서 그러한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자기 정당화를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얼마나 허황된, 자기 정당화의 극치에서 나오는 인식인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더 분명해진다.

자신들의 이익 추구 때문에 희생되는 타인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경향성을 성찰없이 스스로에게 허용하다보면 인간은 점점 더 탐욕적으로 변하게 된다. 지금의 세계화시대는 그 탐욕이 전 세계를 무대로 해서 삼킬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허용된 시대이다. 초국적기업은 전 세계를 무대로 사람이든 원료든 단물만 빼먹는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쌓아놓고 있는 초국적기업의 운영자들은 행복할까? 다른 더 큰 초국적기업이 자기의 기업을 집어 삼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초국적기업의 모습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도대체가 근본적으로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는 할 것인가? 도대체 얼마를 벌어야 사람은 만족을 할 것인가? 자신의 탐욕에 대해서 그 파급 효과를 깊이 성찰하면서 스스로 제동을 거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이 탐욕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힘이 있는 자들이 유리한 결과를 얻는 데에 충실히 복무할 것이다. 지금의 결과는 바로 이러한 탐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어릴 때 백화점에 가면 좋았다. 구경밖에 못하는데도 그 화려함에 끌렸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물건들은 백화점에서 잠을 자야 하고 그 물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은 백화점에 있는 그 물건을 그리워하느라 잠을 못자야 하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 의문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의문인데도 사람들이 이 의문을 별로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은 '살아간다'가 곧 '죽어간다'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식의 편향성이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이 나오는 지구에서 사망자의 58%가 기아 때문에 죽는다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경쟁력이나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명분하에 지구 위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은폐되는 것도 모두 탐욕에 입각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돈보다는 사람이 중요하고 지구위에 사는 사람은 모두가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조차 인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폐기되는 것은 '어떻게든 나만은 이겨보겠노라', '나만은 성공하리라' 하는 생각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패자의 위치에 넣어서 생각해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인식의 편향성 때문이다. 지금의 경제 시스템이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우리의 습관적인 인식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자가 동력적으로 전개되는 인식의 경향성에 따라 습관적으로 생각해서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좋은 대안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가 닿아야 할 진실

건강한 자본주의 사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정당화를 향해 자가 동력적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인식의 문제를 진지하게 천착하면서 어떠한 제동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대해서도 자신의 인식 방식에 대해서도 정교한 제동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탐욕이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탐욕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삶에 충만함을 느끼지 못해서라는 것, 탐욕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물질로밖에 채울 수 없는 정신이 빈곤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닿아야 할 진실일 것이다.

금융 위기와 같은 탐욕의 악순환의 문제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 각자가 왜 사는가를 분명하게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지금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으며 이 삶은 나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생각없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추구하며 휩쓸리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탐욕에 휩싸인 그들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편해진다. 마음껏 그들을 욕하면 만사가 끝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한 그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자기 정당화를 향해 자가 동력적으로 전개되는 인식의 문제를 극복해나가려는 노력 속에서야 타인의 목숨이 내 목숨만큼 귀하다는 사실, 타인도 나와 동일한 욕구와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속에서야 어떠한 제동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고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글러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인용하며 저자의 말을 끝맺고 있다.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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